273. 사라지다(6)
“이게 용병들에게 지급하기로 했다던 그 약입니까?”
“툴린 님의 레시피를 토대로 장원에서 생산을 시작했으니 곧 용병들에게도 지급이 될 겁니다. 이건 제가 실험실에서 만든 일종에 시제품입니다. 크고 작은 상처 치료에 도움이 될 겁니다.”
코퍼가 뚜껑을 열자 끈적이는 반 고체형 약이 드러났다. 알싸한 향을 내며 끈적거리는 정체 모를 검은 약이 약간 불안해 보였다.
“아덱.”
코퍼의 부름에 아덱이 급히 팔을 감췄다. 대원중 가장 크게 다친 사람이라면 팔을 베인 아덱이었다. 그것 역시 검이 스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치료가 늦어 팔 전체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나, 난 아직 괜찮다. 나보단 버크부터….”
아덱이 손을 흔들며 버크를 가리켰다. 버크는 가장 앞장서서 기사단에 뛰어들었기에 가장 상처가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덱보다 깊은 상처는 없었다.
“아덱!”
코퍼가 단호하게 아덱을 부르자 아덱이 마지 못해 코퍼에게 다가갔다. 코퍼는 아덱의 팔에서 천을 풀어내 깨끗한 물로 대충 핏물을 씻어내곤, 멀린이 전해준 끈적이는 검은 액체를 상처에 바른 뒤 깨끗한 천으로 상처를 동여맸다.
“괘, 괜찮냐?”
브린이 눈을 감고 있는 아덱의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사실 아덱이 치료를 애써 거부한 건 약을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툴린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만든 마법사의 포션의 악명은 이미 아이언용병대 사이에서 유명했을 뿐 아니라 지난번 마법사의 포션을 먹고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던 제이콥을 직접 목격한 아덱으로선 툴린이 만들었다는 약을 쉽게 신뢰할 수 없었다.
“아! 시원하다.”
그러나 아덱의 입에선 고통스런 비명 대신 탄성이 흘렀고, 그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어렸다.
“정말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브린에 이어 버크는 물론 무관심한 듯 고개를 돌리고 있던 야튜까지 아덱을 바라보았다.
“하나도 안 아파! 정말 최고야!”
아덱의 말에 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에는 웰로우 나무 진액이 들어있어 고통을 줄여줄 겁니다.”
“웰로우 나무라면 강가에 지천으로 자라는 나무가 아닙니까? 그다지 큰 쓸모가 없는 나무라 생각했는데…”
“나무줄기와 잎에 있는 마취성분이 통증을 줄여준다고 하더군요. 레시피에 적힌 약초 대부분이 주변에서 쉽게 대량으로 구할 수 있는 거라 사실 저도 좀 놀랐습니다. 아마도 대량생산을 염두에 두고 만든 레시피 같았습니다.”
“그럼… 판매도 염두에 두신 겁니까?”
코퍼의 물음에 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 가족들뿐 아니라 주변 영지의 빈민들도 조금씩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숲에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장원을 유지하려면 다양한 수입처를 만들어야겠지요.”
“확실히 이런 치료 약이라면 용병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 것 같군요.”
“이미 아일론 상단과도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 중입니다. 채취가 힘든 약재도 상단의 도움을 받고 있죠.”
“그렇군… 요.”
코퍼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아일론 상단의 호위 대부분을 맡았던 코퍼 용병대는 더 이상 상단호위를 맡지 않기로 했다. 카일 일행과 헤어진 후 전쟁을 피해 남부를 아예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용병들에게 있어 큰돈을 벌 기회였지만, 그 대가는 목숨이었다. 실제 전쟁에서 큰돈을 벌어 살아 돌아오는 용병은 적었다. 대부분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많은 용병들이 참전을 위해 동부국경지대로 몰려들고 있음에도 코퍼는 전쟁을 피해 서부로 이주를 결정하면서 아일론 상단과 결별하게 된 것이다.
“감히!”
기사단을 정비하고 부상 당한 기사들에게 포션까지 먹여 치료를 마친 라이튼이 고개를 돌렸을 때에도 멀린과 코퍼는 여전히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라이튼과 기사단을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네놈들이 감히 나와 기사단을 무시하는 것이냐!”
라이튼의 고함 소리에 이야기를 나누던 코퍼와 멀린이 고개를 돌려 라이튼을 바라보았다. 심각한 부상을 당한 기사들을 제외하면 남은 기사는 이제 열 명도 채 안 되어 보였다. 절반 이상의 기사들이 그사이 죽임을 당하거나 전투 불능에 빠진 것이다.
“이미 끝난 전투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있겠소?”
“끝난 전투? 고작 잠깐의 승리에 취해 이겼다 생각하는 것이냐?”
“하하! 그럴 리가 있겠소. 그저 이만하면 전투를 끝낼 시간이 되었다는 소리요.”
멀린의 말이 끝나는 순간 가파른 경사지 위로 검은 그림자가 하나둘 모습이 드러났다.
“늦었습니다.”
구릉지에서 빠르게 내려온 터그가 멀린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뒤를 쫓던 자들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용병으로 보였습니다만 모두 엑스퍼트급 실력자라 어쩔 수 없이 모두 죽였습니다.”
터그의 말에 멀린이 고심에 찬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가장 뒤에서 쫓아오는 터그 형제의 막내 로닌과 둘째 이소프가 기사단을 발견하고 신호를 보냈을 때만 해도 뒤를 쫓는 추적대는 20기의 기사들이 전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숲 안쪽으로 접어든 순간 두 사람에게서 다급한 신호가 전해져왔다. 기사단의 뒤로 20여 명으로 이루어진 용병대가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기사단의 행로를 그대로 따라 내려온 것만 보아도 마차를 추적하기보단 에일 영지의 기사단을 추적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목적 역시 벨하크과 대장장이들에게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때문에 멀린은 터그 형제들을 따로 빼내 숲 입구에서 뒤를 쫓는 용병들을 기습한 것이다. 라이튼이 기사들과 했던 이야기처럼 좁은 길을 따라 지속적인 매복공격을 통해서 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무려 20명의 엑스퍼트들을 처리했음에도 마치 간단한 사냥을 다녀온 듯 터그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실제로 이번 전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숲 안으로 들어선 용병대의 선두와 후미의 말을 쓰러트린 뒤 우왕좌왕하는 용병들을 경사지 위에서 하나씩 저격한 것뿐이라 그리 힘이 들지도 않았다.
“그럼 이곳도 정리하겠습니다.”
터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멀린이 앞으로 나섰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터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물어볼 말이 있다.”
갑자기 경사지 위로 모습을 드러낸 터그 형제들로 인해 동요하는 라이튼과 기사들에게, 멀린이 물었다.
“당신들 뒤를 쫓아오는 자들이 있었소. 혹시 아는 자들인가?”
“쫓다니… 무슨 말이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코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멀린이 돌아서자 드디어 라이튼의 분노가 폭발했다.
“빌어먹을! 또다시 날 무시하다니, 네놈들 모두 지옥으로 보내주마! 모두 공격해라!”
라이튼의 외침과 함께 쐐기 진형을 형상한 기사들이 일제히 멀린과 용병들에게로 달려들었다. 사실 라이튼의 돌격은 분노의 표출보다는 경사지 위로 새롭게 등장한 적들 때문이었다. 활이나 크로스보우로 원거리 공격을 할 경우 마땅한 방어수단이 없는 라이튼과 기사들이기에 적들과의 난전을 통해 원거리 공격을 차단하고 여기에 더해 마차를 장악해 대장장이와 벨하크의 신변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라이튼의 시도는 곧이어 울리기 시작한 총성에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탕-
퍼억-
마차 앞에 선 터그의 라이플에서 탄환이 발사되며 가장 선두에서 달리던 기사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머리를 잃은 기사가 앞으로 꼬꾸라지며 피보라가 사방으로 비산하자 가장 선두에서 달리던 기사들이 깜짝 놀라 멈춰서며 진형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실전을 경험하지 못한 기사들의 치명적인 문제가 또 한 번 드러난 것이다.
“누가 멈추라고 했느냐!”
라이튼이 버럭 소리쳤지만 이미 진형은 엉망이 되었고 동시에 사방에서 탄환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탕-
타앙-
“커억-!”
“으악-!”
엉망이 되어버린 진형, 은폐할 곳 없는 넓은 공터, 그리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보이지 않는 공격. 아무리 노련한 기사들이라도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었다.
탕-
허무하게 무너지는 기사단을 돌아보던 라이튼이 입술을 깨물며 마차를 향해 달려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탄환이 그의 종아리를 꿰뚫었다.
“크윽, 빌어먹을… 내가, 이 라이튼이 이런 곳에서….”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선 라이튼이 다시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기며 분노한 얼굴로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더 이상 아무런 총성도 울리지 않았다. 이미 마차를 향해 달려들던 기사단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었다.
“네놈들은 도대체 누구냐! 세상에 이런 아티팩트로 무장한 세력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당연합니다. 세상에 처음… 은 아니지만 수백 년 만에 새롭게 등장한 마법이니 말이오.”
“수… 백 년!”
“미안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긴 힘들 것 같소.”
멀린의 말에 라이튼이 고개를 돌려 세인을 바라보았다.
“난 기사로서 명예롭게 죽고 싶다. 너도 기사라면…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라이튼의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세인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 다핸 남작가의 세인 몰티엔이에요.”
검을 뽑아 든 세인이 정중히 검례를 올리며 정식으로 자신의 소계를 했다.
“…남부에 어린 중급 여기사라니, 대단하군. 경이 남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어쩌면… 대단한 천재 여검사가 탄생했다 놀라워했을 거요.”
“남부를 폄하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군요. 당신이 보기엔 그저 작은 영지들이 난립한 곳이지만, 그곳에도 세상에 감춰진 대단한 실력자들이 숨어있답니다.”
“당신 같은 검사가 또 있단 말인가?”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어요. 상급 엑스퍼트가 그저 남부 촌구석 시골 마을 자경단의 단장으로 살고 있다면 믿을 수 있나요.”
“자… 경단? 그럴 리가…. 그런 자가 왜?”
“당신처럼 공명이 아닌 자유로움을 따라 삶을 영위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분보다 더 대단한 사람도 있어요.”
세인이 아련한 표정으로 잠시 북쪽을 바라보다 다시 라이튼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그만… 끝내야 할 것 같아요.”
“좋소, 부탁을 들어줬으니 오래 붙잡고 있을 순 없지.”
라이튼이 검을 들어 세인과는 다르지만 정중하게 검례를 올렸다.
“동부 에일 영지의 기사단장 라이튼 드 에쉬밀이다. 보시다시피 다리를 다쳐 내가 먼저 가긴 힘들 것 같군. 선공은 자네에게 양보하지.”
“거절하지 않겠어요.”
세인이 검을 들어 천천히 라이튼에게 다가서자 코퍼를 비롯해 용병들과 경사지에서 내려온 터그 형제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면서도 대결을 방해하지 않게 뒤로 물러나 공간을 터 주었다.
“크아악-!”
그때였다. 좁은 입구를 막아선 커드와 치열하게 결투를 벌이던 부기사단장 바터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잘 가라, 바터.”
고통 속에 울부짖는 바터를 보며 인상을 찌푸린 커드의 검이 곧장 바터의 심장에 박혔다.
“커억-!”
짧은 비명과 함께 바터의 숨이 끊어지자 커드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곤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가서 살펴봐라!”
터그의 말에 브린이 재빨리 커드에게 달려갔다.
“하압!”
그때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세인의 검이 교할한 뱀처럼 부드럽게 움직여 라이튼의 목을 향해 나아가자, 멈춰있던 라이튼의 검 역시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앙-
모두의 시선이 라이튼과 세인의 격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