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사라지다(5)
“불리한 지형임을 알면서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틀렸어요. 이곳이 우리에겐 최상의 지형이기에 여기서 기다린 거예요.”
“…최상?”
“맞아요. 당신들 중 단 한 사람도 이곳을 빠져나가선 안 되거든요.”
세인이 미소를 지으며 기사들이 지나온 좁은 길을 막아선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라이튼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커드… 이놈, 지금 배신을 하겠다는 것이냐!”
라이튼의 외침에 깜짝 놀란 기사들이 고개를 돌리자 입구를 커드가 바닥에 검을 박아넣은 뒤 가죽 끈을 풀어 검을 잡은 손을 단단히 동여맸다.
“지금 배신이라 했습니까?”
검을 뽑아 든 커드가 죽일 듯이 노려보는 라이튼과 기사들을 따라 사납게 노려보며 외쳤다.
“같은 기사단원인 저를 먼저 죽이려 한 건 배신이 아니란 말입니까?”
“흥, 네놈 같은 반쪽짜리를 누가 같은 동료로 생각한단 말이냐!”
“차라리 잘됐구나, 어차피 넌 여기서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여기서 깔끔하게 죽여주마!”
기사들이 하나둘 검을 뽑아 들며 커드를 향해 다가섰다.
“역시 멍청한데. 눈앞에 적을 두고 고개를 돌리다니 말이야!”
브린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라이튼이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으로 맹렬하게 빛을 토해내는 붉은 수정구가 날아들었다. 라이튼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어 버리자 수정구가 얼굴을 스치며 곧장 뒤로 날아가 기사들이 모인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꽈앙-
“으악!”
“악, 사람 살려!”
붉은 화염과 함께 일어난 강렬한 폭발로 인해 말과 기사들이 사방으로 튕겨 날아가며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그중 폭발에 중심에 있던 두 기사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주변에 있던 기사 셋이 커다란 중상을 입으며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폭발에 비해 그나마 이 정도로 피해가 약했던 건 기시단 전원이 타고 있던 말이 아래에서 터진 폭발과 압력을 막아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폭발로 대부분의 말들이 죽거나 발목이 부러져 버리는 중상을 입었다.
“비, 빌어먹을!”
바닥에 쓰러진 라이튼이 낮은 욕설을 뱉으며 고개를 몇 번 흔들더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피고, 바닥에 쓰러져 발버둥 치는 말을 내려다보았다. 수년을 함께해온 자신의 애마가 발목이 기형적으로 꺾인 채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사실상 전투마로서의 운명은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젠장!”
버럭 고함을 친 라이튼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들어 단번에 말의 목을 베어버리고, 고개를 돌려 수정구를 던진 브린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가 검을 뻗어 브린을 가리켰다.
“죽인다!”
라이튼이 브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브린을 향해 쏘아져 나가던 라이튼의 측면으로 강렬한 오러가 튀어나와 그의 허리를 베어왔다. 깜짝 놀란 라이튼이 급히 몸을 비트는 동시에 찔러오는 검을 강하게 튕겨 측면의 오러소드를 막아냈다.
꽝-
“…중급 엑스퍼트!”
라이튼이 신음을 흘리며 자신의 앞을 막아선 세인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계집이 벌써 자신과 같은 중급 엑스퍼트에 올라서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지만 당신 상대는 저예요.”
“네년… 도대체 정체가 뭐냐!”
“그건 알려줄 수 없군요. 대신, 고통 없이 보내드리겠어요.”
세인이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라이튼을 향해 빠르고 신속하게 찔러 들어갔다.
“흥, 어림없다. 내가 쉽게 당할 것 같으냐!”
라이튼이 세인을 향해 마주 날아들며 강맹한 공격을 연이어 퍼부었다. 덕분에 언뜻 세인을 몰아붙이는 듯했지만, 그때마다 그녀가 유려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라이튼의 검을 아슬하게 피하며 위력적이고 정교한 찌르기로 헛점을 집요하게 노리자 오히려 맹공을 펼치던 라이튼이 주춤 뒤로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인의 공격으로 간혹 수세에 몰리면서도, 노련한 기사단장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역시 강렬하고 위력적인 검격을 연이어 날리며 체격적인 우위와 힘을 바탕으로 세인을 압박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 들었다.
꽝-
꽝꽝-
세인이 연달아 이어지는 강력한 압박에 빠르게 스텝을 밟으며 뒤로 물러나더니 라이튼을 중심으로 주변을 돌며 가볍지만 빠르고 치명적인 공격을 연이어 날렸다. 비슷한 경지에 올랐지만 서로 확연하게 다른 검술로 격돌하는 두 사람의 싸움은 도저히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코퍼 용병대와 기사단의 전투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우왁!”
세인과 라이튼이 강하게 부딪히는 순간 버크가 크게 기합을 넣으며 대검을 휘둘러 폭발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기사의 목을 베어 넘겼다.
푸확-
대검을 따라 사방으로 붉은 피가 비산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기사의 신체가 목과 분리되며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상대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덤벼라! 내가 바로 버크 님이시다.”
목을 베어 넘긴 버크가 다시 기사들 사이로 뛰어들며 종횡무진 대검을 휘둘렀다.
“저, 저 미친놈! 너 그러다 죽어!”
브린이 검을 뽑아 들고는 다급히 버크의 뒤를 따라 기사들 사이로 파고들더니 바닥을 구르며 다리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버크가 대검을 휘두르며 상체를 공격한다면 브린이 하체를 노리는, 두 사람 나름의 합공법이었다. 기사들은 폭발의 충격도 가시기 전 갑자기 들이닥친 버크와 브린의 변칙적인 합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피해만 입으며 연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기사단을 지휘해야 할 단장이 세인과의 결투에 막혔고 부단장인 바터 역시 후위를 막아선 커드와 접전을 펼치며 이렇다 할 지휘를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스각-
브린을 피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기사가 겨우 중심을 잡으려는 순간, 날아든 코퍼의 검이 기사의 가슴을 꽤 뚫었다.
“커억-”
가슴을 뚫고 들어간 검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던 기사가 결국 바닥에 쓰러지자, 코퍼가 검을 뽑아내더니 빠르게 주변 전황을 살폈다. 전체적으로 적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이 기사들을 밀어내며 승기를 잡아가는 형국이지만, 아직 수적인 여유는 기사들이 앞서고 있어 언제 다시 기사들에게 승기가 넘어갈지 알 수가 없었다.
까앙-
“크윽-!”
갑자기 등 뒤에서 전해진 강렬한 충격에 앞으로 밀려난 코퍼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흘러나왔다. 당연히 죽었다는 생각에 방심하고 있다가 불의에 일격을 당한 것이다.
“이… 런, 미친!”
분명 등을 꽤 뚫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의 검이 거친 금속음과 함께 코퍼의 등에서 튕겨져 나가자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바라보던 기사가 낮은 욕설을 내뱉었다.
“…뭐야!”
“뭐긴, 이제 네놈이 죽었단 뜻이지!”
브린의 검이 당황한 기사의 목을 베어 넘기며 코퍼에게 다가갔다.
“대장! 괜찮아!”
“걱정 마라! 다행히 흉갑 덕분에 검이 뚫고 들어오진 못했다.”
“어디 봅시다.”
코퍼의 말을 믿지 못하겠는지 브린이 급히 코퍼의 등을 바라보았다. 가죽 겉옷에는 검이 뚫고 들어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다행히 안쪽에 입은 강철 흉갑엔 약간의 흔적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때 뒤에서 라이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녀석들, 물러나지 마라! 훈련받은 대로 진형을 갖추고 놈들을 밀어붙이란 말이다. 녀석들은 고작 여섯에 불과하다!”
세인과 격렬한 공방을 이루던 라이튼이 뒤로 훌쩍 물러나 혼란에 빠진 기사들을 보며 버럭 고함을 지르고 분통을 터트렸다. 살아남은 기사만 해도 열 명이 훌쩍 넘었지만, 폭발에 이어 가해진 코퍼 용병대의 변칙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모두가 정신없이 물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기사단의 상황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에일 영지가 국경과 인접한 영지라고는 해도 수십 년간 전쟁 한번 없었고, 타 영지와도 큰 분쟁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기사단이 경험한 실전이라고는 작은 분쟁이나 기사들 간의 대련이 전부였을 뿐, 지금처럼 기사단 전체가 목숨을 걸고 벌이는 치열한 난전은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를 지휘하고 통솔해야 할 단장은 세인의 결투에 발이 묶였고 부단장 역시 후미를 막아선 커드와 격렬한 결투를 벌이고 있었다. 용병에 비해 두 배가 넘는 기사단의 숫자만 믿고 두 사람 모두 지휘를 망각해 버린 것이다.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챈 라이튼이 세인과의 결투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후우….”
라이튼을 바라보던 세인이 참았던 탁한 숨을 길게 토해내더니 고개를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 역시 중급 엑스퍼트에 올랐다고 해도, 라이튼은 이미 오래전 중급 엑스퍼트에 오른 완숙한 기사였다. 그만큼 오랜 연륜에서 나오는 경험과 실력을 넘어서기란 이제 막 중급에 올라선 세인으로서는 무리였다. 라이튼이 처음 겪을 독특하고 정교한 검술과 빠른 스텝 덕분에 지금껏 버틸 수 있었지만, 결투가 장시간 이어질수록 상대적으로 체력이 떨어지는 세인에게 불리할 수밖에는 없었다. 만약 조금 더 시간이 지났다면 라이튼보다 세인이 먼저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죄송해요. 단장을 잡았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미 이 전투는 우리가 이겼습니다.”
멀린이 코퍼 용병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신속하게 기사단을 정비하는 라이튼을 보며 말했다. 코퍼 용병대 역시 본격적으로 라이튼이 전장으로 뛰어들자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 마차 앞에 정렬했다. 일방적으로 기사단을 밀어붙였다고 생각했던 코퍼 용병대 역시 가죽 겉옷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안쪽에 입고 있던 흉갑이 드러난 상태였다. 너덜너덜한 그들의 모습이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들, 다친 곳은 없습니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저 단순 찰과상 정도입니다.”
“그래도 상처는 미리 치료하는 게 좋을 겁니다.”
멀린이 품 안에서 황동으로 만든 작은 합을 꺼내 내밀었다. 이번 전쟁에 대비해 카일이 지니고 다니던 일종의 지혈용 고약에 툴린이 추가로 포션을 섞어 보관이 쉽고 적은 비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반 고체형 지혈용 상비약을 만들어 용병들에게 지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포션에 비해 즉각적인 치료가 일어나진 않지만, 지속성과 지혈 효과는 뛰어나 긴급한 상황에서 응급처치용으로 사용하기에 용이했다.
“당장 치료할 정도로 큰 상처들은 아닙니다.”
“그래도 이건 가지고 계십시오. 필요할 때가 있을 겁니다.”
멀린이 거절하는 코퍼의 손에 작은 합을 쥐여주었다. 검을 파는 용병들은 크고 작은 부상이 일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기사와 달리 자비로 치료하는 용병들은 작은 부상에 값비싼 포션을 마구 쓸 수는 없는 일, 대부분의 용병들은 자연 치유되길 기다리거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약초를 찾아 즙을 발랐다. 툴린이 카일의 부탁으로 용병들에게 지급될 상비약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함께하길 요청했던 카일의 제안을 거절한 코퍼와 용병들은 그린넨 백작령까지만 동행한 이후 떠나기로 했기에 더 이상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