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사라지다(4)
“아시겠지만, 벨하크와 대장장이들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전투는 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 정황을 보면 분명 이런 일에 전문적인 자들일 테니 자네 말대로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겠지, 헌데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건가?”
“그럼 저희 쪽 희생도 불가피하게 생기겠죠.”
부단장의 말에 단장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이제야 이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챈 것이다,
“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나?”
“기사단은 개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대규모 전투에선 무엇보다 조직력이 중요합니다.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해서라도 기사단에 불필요한 녀석은 일찍 정리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단장이 부단장의 말에 고심에 찬 표정으로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같은 생각인가?”
주변으로 모여든 기사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결정임을 알고 있습니다. 단장님께서는 그저 모른 척 눈만 감아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부단장의 말에 단장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결국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묵적인 허락의 뜻이었다.
“이번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네.”
“물론입니다. 지금 한 이야기는 모두 머릿속에서 지우겠습니다.”
부단장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숲 안쪽으로 사라졌던 커드가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어떤가?”
“매복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직접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커드의 말에 단장이 잠시간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직접 확인해 보겠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커드 역시 말에 올라 가장 선두에서 기사단을 이끌었다. 기사단이 커드를 따라 천천히 숲 안으로 들어서자 좁은 구불구불한 길 양옆으로 가파른 경사지를 따라 크고 작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었다.
“주변을 잘 보아라! 경사가 가파르고 크고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몸을 감추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더구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이런 곳이야 말로 매복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이런 곳에서 매복공격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 방법이 있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이 두 가지만 알면 나머지는 상황에 맞게 응용할 수 있지.”
“경청하겠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부단장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뒤를 따르던 기사들 역시 하나둘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르는 기사들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첫 번째 방법은 적이 숲으로 들어섰을 때 함정을 이용해 허리를 끊는 것으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이다. 병력을 동원해 허리를 끊는 방법도 있지만, 지형을 이용한 함정이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병력을 양분해 한쪽을 먼저 압살할 수 있겠군요.”
“병력 차이가 크다면 한쪽을 먼저 압살하는 것도 좋지만, 길 양 끝에 미리 기사단을 배치해 앞뒤로 공격하는 것 역시 좋은 방법이 되겠다.”
“그렇군요. 이런 좁은 길이라면 고작해야 상대할 수 있는 적병의 숫자는 서너 명 정도에 불과할 테니 말입니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좁은 길을 따라 지속적인 매복공격을 감행해 피해를 가중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을 사용하려면 대병을 함정에 끌어들여야 하고 지형 역시 아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역습을 당할 수 있으니 명심하도록.”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단장에게 감사를 표할 때쯤 좁았던 길이 갑자기 넓어지더니 마차 대여섯대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의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 그들이 찾던 마차 십여 대가 공터 끝을 반원을 그리며 막아서고 있었다.
“허! 의외군. 이런 곳에서 진을 치고 있다니….”
앞을 막아선 마차를 보며 단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추적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쉬지 않고 도망쳐도 모자랄 것을 오히려 이곳에 진을 이루고 마치 뒤를 쫓아온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군, 라이튼 경”
그때였다. 앞을 막아선 마차 사이로 벨하크가 걸어 나왔다.
“오랜만이군요, 벨하크 님. 설마 이렇게 아무런 인사도 없이 갑자기 영지를 떠나실 줄은 몰랐습니다. 영주님께서 많이 슬퍼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혹 서운하게 해 드린 점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영주님께 말씀드려 개선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단장 라이튼이 안타까운 눈으로 벨하크를 향해 달래 듯 말했다.
“허허, 돌아가자? 지금 돌아가면 우리가 무사할 수 있단 말인가?”
“영지를 떠나긴 했지만 모두 자유민이니 벌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지요. 지은 죄가 없다면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라이튼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런 라이튼의 말에 벨하크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마치 죄를 만들어서라도 벌을 내리겠다는 말로 들리는군.”
“하하,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왜,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나? 여기 있는 모두가 돌아가면 누명을 쓰고 노예가 될 거란 걸?”
“어디서 그런 말씀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밀수꾼 대부분이 사라졌음을 모른다고 할 텐가?”
“최근 제국과 밀수를 벌인 범죄자들을 잡아들이긴 했지만, 설마… 벨하크 님까지 가담하고 계신 줄은 몰랐군요.”
라이튼이 정말 안타깝다는 얼굴로 벨하크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됐지만, 벨하크 님께서 직접자백을 하셨으니 다시 영지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제 목숨을 걸고 벨하크 님과 대장장이들의 목숨만은 구명하겠습니다.”
라이튼이 벨하크와 대장장이들에게 큰 은혜를 내리듯 얼굴 가득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바로 그것이 목적이겠지, 노예로 만들어 평생 에일 영주를 위해 망치를 드는 것 말이야!”
“아! 아닙니다. 평생이라니요,”
라이튼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한번 노예는 그 자식도 노예인 법, 대를 이어 에일 영지를 위해 망치를 들어야 겠지요.”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하하, 어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만난 이상 네놈들을 절대 놓칠 수는 없지.”
스르릉-
라이튼이 허리에서 천천히 검을 뽑아 벨하크를 가리켰다.
“이 검, 기억하고 있나?”
얼굴은 잔뜩 찌푸려졌으면서도, 검면을 쓰다듬는 손은 부드러웠다.
“네놈에게 얻은 검이다. 천한 대장장이 놈에게 사정해 겨우 얻은 검이지. 하지만 확실히 벨 하크, 네놈의 검은 뛰어나단 말이야! 강하고 질긴 합금에, 절묘한 균형감과 무게까지…. 천한 대장장이에게 사정해서라도 얻고 싶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단 말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벨하크를 대하던 깍듯한 말투와 태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조소만이 가득했다.
“사실 그동안 좀 짜증이 났다. 고작 천한 대장장이 주제에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아 기사인 내가 깍듯이 모셔야 한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단 말이지. 하하, 어떤가? 지금이라도 순순히 따라온다면 다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흥, 너 같은 위선자를 따라갈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영지를 떠나지도 않았다.”
“위선자? 영감, 감히 나에게 그따위 망발을 내뱉다니 죽고 싶은 건가??”
라이튼이 벨하크를 노려보며 사납게 소리쳤다. 그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위선자였다. 벨하크는 잠시 라이튼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나 옆으로 다가온 멀린과 세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런 일일수록 마음에 앙금이 남아선 안 되지요. 그리고 벨하크 님께서 시간을 벌어주신 덕분에 일이 한층 수월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멀린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벨하크가 씁쓸한 표정으로 마차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코퍼 용병대가 하나둘 마차 앞을 막아섰다.
“이제 보니 용병을 고용해 탈출한 모양이군.”
라이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벨하크와 대장장이들은 그동안 국경지대에 무기를 납품하며 그럴듯한 재력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밀수를 하며 벌어들인 골드 역시 상당하다고 들었다. 이만한 재력이라면 실력 있는 용병 정도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이튼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실력이 좋은 용병이라도 결국 용병이었다, 상황의 불리함을 알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 버릴 것이다.
“누가 이곳의 대장인가?”
“용병대의 대장은 아니지만 일단 이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나요.”
멀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제법 고급스런 옷을 입었지만 허약한 육체와 머리칼 사이로 듬성듬성 돋아난 흰 머리카락만 보아도 용병보다는 상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어디에서 온 자인지는 모르지만, 저들은 모두 에일 영지에서 죄를 짓고 도망친 자들이다. 순순히 물러난다면 죄인을 탈주시킨 죄는 묻지 않을 테니 썩 물러가거라!”
아무리 용병이라도 밀수를 벌이고 도망치는 중죄인을 도왔다간 그들 역시 밀수범과 함께 처벌받을 수 있었다. 더구나 앞으로 나선 사람이라고 해 보았자 늙은이 하나에 용병이 여섯이었고, 그중 하나는 계집이었다. 이만한 숫자로 기사 20명을 상대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 만약 일반적인 용병이었다면 라이튼의 위협적인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용병이 아니었다. 더구나 벨하크는 카일이 스승으로 인정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멀린과 세인은 물론 코퍼 용병대 역시 아무런 동요도 없이 라이튼을 비롯한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이제 보니 자넨 상당히 멍청한 자였군.”
“뭐라!”
조소를 지으며 내뱉은 갑작스런 멀린의 말에 라이튼이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멀린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머리가 있다면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멀린의 말에 라이튼이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대소를 터트렸다.
“와하하하! 설마 이곳에서 우릴 전멸시키려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하하하!”
“하하!”
라이튼의 웃음소리에 기사들 역시 따라서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는 거지?”
“우린 기사들이다. 한마디도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군사훈련을 받은 전문가란 뜻이다. 당연히 여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곳 지형은 이미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라이튼의 말에 멀린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하하, 멍청한 놈들! 차라리 이곳보다 조금 더 뒤쪽, 좁은 협곡을 틀어막고 기습을 했다면 어느 정도 피해는 입힐 수 있었겠지만 이미 협곡을 빠져나온 이상 우릴 막을 수는 없단 말이다. 더구나 이곳은 넓은 공터다. 수적으로나 실력으로나 너흰 우릴 이길 수 없다.”
라이튼이 멀린을 비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지만 곧 걸음을 멈췄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당신 말이 맞아요.”
멀린의 뒤에 서 있던 세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제 보니… 용병이 아니라 기사였군.”
세인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던 라이튼이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계집이라 해도 기사라면 귀족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이번 일에 귀족 가문이 관여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만약 이대로 전투가 벌어진다면 자칫 귀족 간 분쟁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었다. 라이튼이 고민에 잠긴 사이, 세인은 주변 지형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좁아진 협곡이 끝나고 길이 넓어지는 구간이라 여기 있는 여섯으로 당신들 모두를 상대하기엔 벅찬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저희가 여기서 당신들을 기다린 게 정말 멍청해서일까요?”
세인이 미소 어린 얼굴로 라이튼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