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사라지다(3)
“백작이 공작가와 혼인 동맹을 맺게 되자 더 이상 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아니, 그보단 이제 막 성인이 된 카일을 상급 엑스퍼트에 올려준 검술이 더 욕심이 났을 거예요. 어쩌면 정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려줄 검술이라 생각한 건지도 모르죠.”
이엘의 말에 시안느는 물론 사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카일의 빠른 성장에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카일은 노를 저으며 한동안 독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해독할 방법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지만, 정신이 흐려질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 몸에 전해지면 일순간 오러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었다. 어쩌면 님프럼 독의 해독 방법이 여기에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님프럼 독이 작용하는 곳은….
“저… 그런데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생각에 잠겨 노를 젓고 있는 카일을 향해 에밀리아가 물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며 사라져가는 물안개 덕분에 배가 에일 영지에서 상당히 멀어졌음을 알게 된 것이다.
“저흰 이대로 물길을 따라 북상할 생각입니다. 이미 돌아가기에도 너무 멀리 왔으니까요.”
카일이 화염에 뒤덮인 갈대밭을 돌아보며 말했다. 넓은 갈대밭이 타들어 가며 에일 영지 전체가 뿌연 연기로 뒤덮여있었다.
“아, 안 돼요. 영지에서 성기사들이 절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나 역시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 더구나 이런 조그만 갈대 배로 계속 물길을 거슬러 갈 수는 없을 텐데?”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요?”
“그러니 당연히 돌아가야지.”
사하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우린 기사단을 피해 여기까지 왔어요. 다시 돌아갔다간 기사단에게 포위돼 잡히고 말 거예요.”
“그야 나와 흑기사가 없을 때의 이야기지! 백작가의 기사단쯤, 흑기사만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사하가 당당하게 말했다. 카일을 추적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흑기사와 떨어지긴 했지만, 카일을 찾은 이상 추적해 오는 자들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흑기사만 있다면 이따위 작은 영지 하나 사라지게 하는 건 일도 아니지, 영주 성만 날려버리면 알아서 길을 비켜줄 거다.”
“백작가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군요.”
“맞아! 백작가는 너무 쉬운 상대지. 어때 시험해 보겠어?”
이엘이 날카롭게 노려보았지만 오히려 사하는 빙그레 웃으며 이엘을 놀리듯 말했다. 그러자 시안느가 사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린 네 뜻에 따를 생각이 없다. 더구나 카일이 피할 대상엔 너와 성녀도 포함되어 있다. 성기사나 흑기사 모두 나타나는 즉시 카일을 붙잡으려 하겠지.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배에서 내려!”
시안느의 싸늘한 말에 사하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렸다.
“흥, 역시 언닌 아직도 동생보단 지키는 아가씨가 소중하군요.”
“아니, 이건 가족 이전에 예의에 대한 거다. 동생이라면 적어도 내가 지키는 아가씨에 대한 예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분을 무시하고 가문을 놀리는 건 날 모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안느가 사하를 노려보며 말하자 사하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치듯 지나갔다. 설마 시안느가 자신을 동생이라 부를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하는 고개를 돌린 시안느를 보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뻥긋거리다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지도 못한 이런 상황이 사하에겐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사하와 시안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카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노를 저으며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던 카일이 갑자기 배를 틀어 갈대숲으로 밀어 넣었다.
“무슨 일이죠?”
이엘의 물음에 카일이 대답 대신 연기로 뒤덮인 하늘 위를 가리켰다.
“와이번!”
이엘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연기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와이번에게로 향했다. 나타난 와이번만 해도 무려 30마리가 훌쩍 넘었다. 이들이 하늘 위를 선회하며 갈대밭 위를 날아다니자 자욱하게 깔려있던 연기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국경에 배치된 백작가 소속의 와이번들이에요. 하늘 위에서 주변을 지휘하는 사람이 바로 펠론 자작이죠.”
와이번을 유심히 살피던 시안느가 말했다.
“날이 풀리면 곧 전쟁인데… 아무리 급하다고 국경을 방어하는 와이번 기사단까지 빼낼 줄은 몰랐군요.”
카일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와이번들이 정찰을 하며 때로는 크고 작은 공중전이 수시로 벌어지는 곳이 바로 국경지대, 그중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 이곳 제국과 인접한 동부전선이었다.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국경을 수비하는 주요 전력인 와이번 기사단까지 동원할 거라고는 카일로서도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30기 정도 빠져나간다고 해도 국경방어에는 큰 영향이 없어요. 저 정도면 전쟁을 고려해 최소한의 인원만 데려온 거예요.”
“…30기가 최소한의 병력이란 말입니까?”
이엘의 말에 카일이 깜짝 놀라 물었다. 30기의 와이번 나이트라면 최소 1개 와이번 나이트 기사단의 전력으로, 이 정도만 해도 북부 마파린 후작가가 보유한 전체 와이번 숫자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국경지대, 그것도 제국과 인접한 곳이잖아요. 가문의 노력도 있지만 국경엔 동부 영지들이 파견해 만든 2개의 연합기사단과 함께 왕실에서 파견된 기사단도 있어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답니다. 후작가의 기사단 일부가 빠져도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큰 문제는 없어요.”
“왕실 기사단이 국경에 배치되어 있는 줄은 몰랐군요.”
“목적은 부족한 와이번 나이트의 지원이지만, 실제로는 변경백들의 기습적인 반란을 막기 위해서가 더 정확하겠죠.”
“왕실 나름의 안전장치란 말이군요.”
“맞아요.”
카일의 물음에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을 하는 카일이나 이엘도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럼… 저 와이번 나이트들이 우릴 끝까지 추적해 올 수도 있단 말이군요.”
“아마도… 펠론 자작이 직접 나섰다면 추적은 쉽게 멈추진 않을 거예요.”
“그럼 결론은 간단하군요. 우린 이대로 계속 북상합니다. 두 분이 반대하신다면 어쩔 수 없이 우린 헤어져야 합니다.”
“이 넓은 습지 위에 우릴 버려두고 가겠다고?”
“걱정 마십시오. 어두워지기 전까지 두 분이 안전하게 돌아갈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때까지 두 분도 우리와 함께할지, 아니면 에일 영지로 돌아갈지 확답을 주십시오.”
이야기를 마친 카일은 불에 탄 갈대밭 위를 저공 비행하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와이번들을 뒤로하고 갈대숲을 빠져나와 다시 북상을 시작했다. 그 무렵, 전날 저녁 에일 성 서문을 통해 빠져나온 수십 대의 마차가 왕성을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돌아가실 건가요?”
“네, 지금은 돌아가야 합니다. 이젠 카일 님과 합류하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세인의 말에 멀린이 고개를 저었다.
“늦지 않았어요. 멀린 님만 도와주신다면 분명 카일 님을 찾을 수 있어요.”
세인은 와이번 나이트다. 카일의 마법 팔찌에 내장된 추적마법만 따라간다면 어렵지 않게 카일을 찾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멀린과 세인, 그리고 코퍼 용병대가 에일 영지까지 카일의 뒤를 쫓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마법 팔찌를 추적한 것이다.
“물론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에일 영지에 어제저녁부터 수십 마리의 와이번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세인 경이 와이번을 불러내는 순간 모든 와이번 나이트가 세인 경을 표적으로 삼을 겁니다.”
“그건…!”
“이미 세인 경도 아실 겁니다. 이대로 뒤를 쫓았다간 오히려 역으로 카일 님의 행적이 백작가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집중을 하시죠. 벨하크 님을 안전하게 모시는 것 역시 더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멀린의 말에 잠시 얼굴을 찌푸렸던 세인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어리석게 멀린 님께 괜한 투정을 부린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저 역시 카일 님의 안전이 걱정되지만, 그분이라면 안전하게 원정대와 합류하실 겁니다. 그러니 저희도 서둘러 3왕자의 원정대와 합류해야 합니다.”
멀린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세인을 달랬다. 언제나 진중해 보이는 세인이지만 카일과 관련된 문제에선 안전을 생각하지 않고 성급하게 나서는 바람에 종종 곤욕을 치르곤 했었다. 그렇다고 세인을 탓할 수는 없었다. 어제저녁 펠론 자작이 탐문을 시작한 대장장이 거리를 돌아보던 중 터그 형제에게 카일의 오러가 동결되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런 와중에도 카일은 전혀 절망하지 않고, 백작가의 추적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코퍼입니다.”
달리는 마차 옆으로 말을 탄 코퍼가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꼬리가 붙었습니다. 대략 20명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에일 영지에서 추적을 시작한 모양입니다.”
터그의 말에 멀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쓰다듬었다. 마차는 총 열 대, 에일 영지에 남아있던 대장장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탄 마차였다. 펠론 자작을 만나 대장장이들의 신변을 부탁했던 벨하크는 뜻밖에도 자작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자 대장장이들을 설득해 모두 이끌고 탈출을 선택한 것이다. 다행히 흑기사와 성기사, 그리고 수십 명의 기사들이 장시간 전투를 벌이고 성문을 지키는 기사들이 빠져나가자, 그 틈을 이용해 대장장이들과 함께 성을 빠져나와 곧장 왕성으로 향할 수 있었다. 거리가 먼 남부로 곧장 내려가기보단 왕성을 향하고자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을 했다고 해도 열 대의 마차가 동시에 움직였으니 에일 영주가 본격적으로 탐문을 시작했다면 들키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생각보다 늦었군요.”
“이마도 펠론 자작과의 만남이 주요했을 겁니다. 아무리 에일 영주라도 펠론 자작과 관계된 일이라면 확인이 어려웠을 겁니다.”
“우리에겐 더없이 잘된 일이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꼬리를 달고 왕성으로 향할 수는 없어요.”
“조금 전 보고를 받았습니다. 앞쪽에 작은 숲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털어내면 어렵지 않게 흔적을 지울 수 있을 겁니다.”
“잘됐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코퍼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자 곧 낮은 소성과 함께 마차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마차가 멈춰 섰던 곳으로 일단의 기사단이 달려왔다.
“이곳에서 속도를 높였군.”
말에서 내린 중년의 기사가 깊게 파인 바퀴 자국을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차가 갑자기 속도를 높였다는 건 자신들이 추적하고 있음을 알았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도주하고 있는 벨 하크와 대장장이들을 돕는 것이 분명했다.
“남은 흔적과 마차의 속도를 고려하면, 반나절 뒤면 놈들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늦다! 그때쯤이면 놈들은 동부를 완전히 벗어나 왕실 직영지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무력을 사용했다간 상황이 복잡해진다. 지금부터 말이 쉴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하곤 전력으로 추적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기사들의 큰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중년의 기사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선두에서 말을 몰아 추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빠르게 질주하던 기사단은 눈앞에 나타난 작은 숲에 다시 멈춰야만 했다.
“매복하기 좋은 곳이군.”
주변을 둘러본 중년 기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겉보기엔 평범한 작은 숲처럼 보였지만, 가파른 구릉지와 그 사이로 형성된 구불구불한 숲을 따라 외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만일 매복이 있다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벨하크와 대장장이들에게 조력자가 있음을 의심하는 상황에서 불리한 지형을 그대로 통과할 수는 없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고심하는 중년 기사의 옆으로, 얼굴 위에 긴 상처가 아로새겨진 날렵한 기사가 다가왔다.
“커드라면 믿을 수 있지. 다녀오게”
중년 기사가 미소를 지으며 답하자 커드라 불린 기사가 재빨리 숲속으로 사라져 갔다. 얼굴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부단장이 다가왔다.
“저런 반쪽짜리를 언제까지 데리고 있어야 합니까?”
“왜? 저런 녀석이라도 하나 있어야 이런 위험한 일에 투입할 것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기사단의 명예가 달린 일입니다. 저 녀석 때문에 저희들까지 싸잡아 놀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단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하하! 부단장 성격 참 알아줘야겠군. 알겠네! 이번 일이 끝나면 영주께 청을 넣어보겠네.”
“하지만 영주님은 허락하지 않을 실 겁니다.”
“그야 그렇지만… 방법이 없지 않은가? 영주님의 허락도 없이 무슨 수로 녀석을 기사단에서 내보낸단 말인가?”
단장의 말에 부단장이 주변으로 몰려든 기사들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