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69화 (269/404)

269. 사라지다(2)

에일 영주가 머릴 감싸 쥐며 좌절하고 있을 그 시각, 매캐한 연기를 피해 조심스럽게 북상하던 카일과 일행에게도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무성하게 자란 갈대숲 안쪽에서 갑자기 검은 인영들이 연달아 뛰쳐나와 강물로 뛰어들며 비명을 지른 것이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불길이 무성한 갈대숲을 뒤덮었다.

첨벙-

첨벙-

“어푸- 사람 살려!”

“비켜! 제발 저리 가란 말이야!”

물속으로 뛰어든 사람은 다름 아닌 사하와 성녀 에일리아였다. 더 황당한 건 그들의 행동이었다. 성녀인 에밀리아가 물속을 허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암흑마법사인 사하에게 매달리고 있었고, 사하 역시 필사적으로 에밀리아를 밀어내며 물에 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참… 가관이군요.”

황당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던 카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도 구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휴… 도움을 받은 적이 있으니 그래야 할 것 같기는 합니다.”

카일이 조심스럽게 노를 저어 허우적거리는 사하와 에밀리아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배 안은 아직 여유가 있어 두 사람 정도는 더 태워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이봐, 언제까지 허우적거릴 거야!”

카일이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너… 아악!”

카일을 알아본 사하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허우적거리던 에밀리아가 사하의 머리를 필사적으로 누르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사, 살려줘요!”

에밀리아가 카일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가만히 있어!”

“살려…!”

“허우적거리지 말고 두 발로 서란 말이야!”

카일이 다시 한번 버럭 외쳤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에밀리아는 카일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정신없이 소릴 지를 뿐이었다.

푸화악-

그때였다. 에밀리아에게 잡혀 물속에 잠겨있던 사하가 겨우 에밀리아에게서 벗어나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허우적거리는 에밀리아에게 다가가 인정사정없이 따귀를 날렸다.

쫘아악-

“아악-!”

비명을 지르며 물속에 처박혔던 에밀리아가 잠시 허우적거리더니, 곧 정신을 차리곤 바닥에서 일어나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사하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사하와 에밀리아가 허우적거리던 곳의 수위는 고작 두 사람 허리 높이에 불과할 정도로 얕았다.

“한 번만 더 엉겨 붙으면 진짜 죽여버리겠어!”

사하가 에밀리아를 죽일 듯 노려보더니 고개를 홱 돌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는 카일과 시안느, 이엘을 향해 걸어갔다. 어차피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려면 배를 타는 방법밖에는 없어 보였다.

“잠시… 실례하겠어요.”

사하가 카일을 향해 당당하게 말하며 대답도 듣지 않고 배 위로 몸을 실었다. 잠시 배가 출렁이며 흔들렸지만 이미 한번 경험한 일인 만큼 시안느와 이엘은 이번엔 당황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균형을 유지했다.

“뭘 멍하게 서 있어! 안 탈거야?”

카일이 난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밀리아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 아니에요.”

에밀리아가 황급히 다가오더니 배 위로 올라가려 안간힘을 썼지만 두터운 사제복에 사하가 입고 있던 로브까지 물을 잔뜩 먹어서인지 혼자 힘으론 도통 배 위로 올라서질 못했다.

“잡아요.”

보다 못한 시안느가 에밀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 고마워요.”

시안느에게 고개를 숙인 에밀리아가 그녀의 손을 잡아 당기며 힘겹게 배 위로 올라섰다.

“움직임은 최대한 줄이세요. 잘못하다간 배가 버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카일이 반쯤 물에 잠긴 배를 보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탄 이상 절대 가라앉진 않을 테니까!”

사하가 지팡이를 들어 배 위를 가볍게 두들겼다.

“인텐션(intension)”

사하의 지팡이 위로 푸른 마나가 뭉치더니 곧 배 전체로 퍼지며 반쯤 가라앉았던 배가 다시 떠올랐다.

“백마법?”

에밀리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사하를 바라보았다. 신을 섬기는 사제는 신을 믿음으로써 받아들인 신성력을 기반으로 마법을 사용한다. 때문에 신성력을 제외한 다른 기운은 일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오직 그들만을 위해 신성력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신성 마법이 탄생한 것이다. 헌데 마왕을 모시는 사하는 마기가 아닌 백마법까지도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신을 모시는 사제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이다.

“말했잖아! 난 암흑 사제가 아니라 마법사라고. 적어도 마기는 신성력처럼 모든 기운을 배제하진 않거든.”

“그게 문제죠.”

노를 젓던 카일이 당황해하는 에밀리아를 대신해 답했다.

“문제라니?”

“신성력은 다른 기운을 배척하기에 아무리 막대한 신성력을 쏟아부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체내에서 사라져 버리지. 하지만 마기는 오히려 그 반대야! 적은 양이라도 내부로 들어오면 쉽게 빠져나가지 않고 내부의 오러와 충돌하기에 결국 오러로 태워버려야 하지.”

카일의 경우엔 막대한 마기가 한 번에 들어오며 반대로 동화되어버렸지만. 일반적인 경우라면 태워버리지 않는 이상 마기를 견디지 못하고 심각한 내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넌 다르잖아?”

“맞아! 하지만 그것도 이제 곧 달라지겠지.”

카일이 웃으며 사하를 바라보았다.

“어때, 지난번과 좀 다르지 않아?”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잠시 카일을 노려보던 사하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배가 심하게 흔들리며 사하가 균형을 잡지 못해 비틀거렸다. 아무리 강화마법이 걸린 배라지만 좁은 폭으로 인해 함부로 움직였다간 배가 뒤집힐 수도 이었다. 다행히 카일이 대검을 바닥에 급히 찔러넣어 균형을 잡으며 뒤집히는 것만은 겨우 면했지만 사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결코 좋지 못했다.

“조심해! 아직 수심이 깊은 곳은 아니지만, 여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다 죽을 수 있으니까.”

카일이 사하에게 경고를 한 뒤 다시 배를 저어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마기의 양이 확연히 줄었잖아!”

“시, 신성력도 줄었어요.”

에밀리아 역시 당황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의 몸에 존재하는 신성력과 마기는 모두 혼돈의 마나를 기반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부에 남아있던 오러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마기와 신성력 역시 한번 사용된 이후 더 이상 보충이 되지 않으면서 급기야 몸 안에 남아있던 마기와 신성력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도문트와의 충돌로 인해 더 많은 마기와 신성력이 사라져 버렸다. 신성력은 부상 당한 카일의 몸을 치료하며 소모되었고, 충돌 직후 움직이기 시작한 마기와 오러는 자연스럽게 팔찌로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저 오러가 동결되며 생긴 부수적인 효과라고나 할까?”

“무슨 뜻이지? 오러가 동결되다니?”

“무슨 독을 먹었는데… 오러가 더 이상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더군.”

“설마… 절망의 꽃 님프럼!”

사하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절망의 꽃?”

“님프럼이란 꽃이 있다. 여기서 추출된 독을 수년 동안 정제하면 몸 안에 잠든 오러를 평생 사용할 수 없게 동결시켜 버리지. 그래서 님프럼을 다른 뜻으로 절망의 꽃이라 부른다.”

“그런 대단한 독이라면 이미 널리 알려졌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전 그런 독이 있다는 것도 처음 들어봤어요.”

이엘이 사하를 보며 물었다. 그녀는 백작가에 보관 중인 수많은 책을 읽었고, 그중엔 전설적인 독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껏 절망의 꽃 님프럼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님프럼은 워낙 희귀한 꽃이라 찾기도 어렵지만, 설령 찾는다고 해도 꽃 자체가 수십 년에 한번 피기에 구하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꽃에서 독을 추출하는 것이 더 어렵다 보니 세상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이 독은 각 마탑의 탑주 정도가 아니면 모를 거다.”

“사람을 죽이는 강력한 독도 아니고 단순히 오러 동결을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하기엔 너무 극악한 조건의 독이군. 굳이 이런 독을 왜 만들어 냈는지 이유를 알 수 없군요.”

카일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이 당한 독이 극악한 조건에서 만들어지는 희귀 독이란 사실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휴, 아직 제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군요.”

사하가 씁쓸하게 웃는 카일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 독은 사람을 죽이지 않아요. 아니 독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마시면 신체와 장기를 더욱 질기고 단단하게 만들어 주니 엄밀히 말하면 독이라 할 수가 없죠. 그래서 포션이나 신성력도 이 독을 해독하진 못해요. 아니, 애초에 몸에 이상을 주지 않으니 해독할 필요가 없는 거죠. 이게 정말 뭘 뜻하는지 모르겠나요?”

“글쎄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휴… 좋아요. 도움을 받았으니 보답으로 알려주죠.”

사하가 한숨을 길게 쉬며 말을 이었다.

“엑스퍼트에 오르면 경지가 높아질수록 내부에 쌓이는 오러는 많아질 뿐 아니라 고밀도로 압축되죠. 이 정도는 카일도 잘 알겠죠.”

“검을 든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기초적인 상식이라 할 수 있죠.”

“맞아요. 그래서 엑스퍼트는 쉽게 중독되지도 않지만, 설령 중독이 된다고 해도 대부분 오러를 이용해 태워버리거나 외부로 밀어내죠. 몇몇 특수한 마법 합성 독을 제외하면 말이죠.”

“저도 아버지께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님프럼이란 독은 전혀 다르더군요.”

카일의 말에 사하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님프럼은 일반적인 독이 아니니까요. 님프럼이 다른 독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야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다른 독?”

카일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아직, 님프럼의 해독제는 없어요. 하지만 일단 다른 독과의 차이를 알면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일리가 있군요. 그럼 부탁을 드리죠.”

“좋은 자세군요. 저도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간단하게 알려드릴게요.”

사하가 고개를 돌린 채 노를 저어가는 카일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언뜻 노 젓기에 집중하는 듯 보였지만 카일이 자신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독에는 식물 독, 광물 독, 동물 독, 그리고 이런 독을 여럿 섞어 만든 혼합 독이 있죠. 또 이런 혼합 독에 마법을 가미한 마법 합성 독이 있어요. 그 밖에도 여러 독이 있지만 대충 이 정도죠. 하지만 사실 이런 건 카일이 굳이 알 필요는 없어요.”

“그럼 지금 알아야 하는 건 뭡니까?”

“독이 작용하는 원리죠. 원리를 알아야 해독 방법도 찾을 수 있으니까요.”

“원리?”

“독은 종류에 따라 공격하는 곳이 달라요. 각 장기를 직접 공격하는 독에서부터 몸에 쌓이는 만성 독, 피를 통해 중독되는 혈액독, 신경에 작용하는 신경독이 있어요. 이런 독이 몸 안에 침투하면 오러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독이 침투한 곳을 찾아 독의 활동을 억제하거나 해독하는 거죠.”

사하의 설명에 노 젓기를 잠시 멈춘 카일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강물을 내려다보다 사하를 향해 물었다.

“그럼 소드 마스터는 어떻습니까? 강대한 오러를 가진 소드 마스터라면 님프럼 독을 이겨낼 수 있는 겁니까?”

“이제야 제가 원하는 질문을 하는군요.”

사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드 마스터는 강대한 오러를 가진 존재, 이미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고들 하죠. 그래서 앞서 언급한 어떠한 독도 소드 마스터를 중독시킬 수 없어요. 하지만 님프럼은 달라요. 신체를 공격하지 않는 독, 아무리 강대한 오러를 가진 소드 마스터라도 중독을 피할 수 없는 독…. 그것이 이 독이 특별한 이유죠.”

사하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 마스터를 죽일 수는 없지만 중독시켜 오러를 동결시킬 수 있다. 님프럼은 사실상 소드 마스터를 죽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독인 것이다. 그리고 님프럼이란 독을 왜 그린넨 백작이 가지고 있었는지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백작가는 대영주 중에서도 가장 무력이 약하다. 하지만 이를 무시해도 좋을 만큼 상계를 좌우하는 막강한 영향력으로 대영주들을 통제해 왔다. 북부 마파린 후작가가 막강한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지금껏 백작가를 무너트리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백작가도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중부의 지배자 트라발트 공작가였다. 그들은 백작가를 위협할 정도로 상계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강력한 무력 또한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 바로 소드 마스터인 트라발트 공작이 있었다. 그린넨 백작가로서는 소드 마스터를 대적할 마지막 수단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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