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사라지다
“일어나십시오.”
카일이 시안느와 이엘이 잠든 갈대집으로 다가가 입구를 막은 갈대 다발을 밀어내며 작은 목소리로 두 사람을 깨웠다.
“…무슨 일인가요?”
“습지 안으로 병력을 투입하려는 것 같습니다. 지금 성벽 아래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병사들이란 말인가요.”
이제 막 일어났는지 거칠어진 목소리의 이엘이 물었다.
“네, 정확하진 않지만,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이따금 들렸습니다. 누군가 우리가 이곳에 숨어 있을 거라 판단한 모양입니다.”
“…자작이겠지요.”
“자작이 아니면 에일 영주겠죠. 누구보다 이곳 지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니까요.”
이엘와 시안느가 갈대집 안쪽에서 분주히 움직이더니 곧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거친 바람이 부는 갈대 습지 위에서도 너무 잘 잔 것 같아 카일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당황한 이엘이 급히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닙니다.”
카일이 웃으며 갈대집을 엮었던 단을 풀어냈다. 어제저녁에 카일이 잠들었던 갈대 단은 이미 해체되어 한쪽에 쌓여있었다. 두 사람이 잠든 동안에도 카일은 이미 분주히 움직이며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을 해체해도 우리가 여기에 머물렀단 흔적은 지울 수가 없어요.”
이엘이 카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갈대를 베어낸 흔적은 물론, 이끼와 모래층 사이로 깊은 발자국까지 남아있었다. 갈대집을 해체하며 시간을 낭비하기보단 병력이 투입되기 전 조금 더 넓은 습지로 달아나는 것이 지금으로선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을 최선의 길이리라. 하지만 카일은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으로 갈대 단 하나하나를 분리해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긴 강물이 죽음의 호수와 만나 생긴 퇴적토 위로 넓게 형성된 갈대 습지죠. 언뜻 퇴적토 안쪽과 바깥쪽이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다르다니요?”
“사람이 걸어 다니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지금 밟고 있는 모래톱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조금 더 넓고 큰 모래톱과 갈대밭이 형성되어 있겠지만, 그건 이곳에 살고있는 에일 영주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모래톱 외곽을 넓게 포위하면 잡히는 건 시간문제겠군요.”
“퇴적지가 워낙 넓어 에일 영지의 병력으론 전체를 포위하긴 힘들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 정도는 차단할 수 있겠죠.”
“그럼 병사들이 몰려오기 전에 더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야 퇴적지를 따라 이동할 때의 이야기죠.”
카일은 해체한 갈대 단을 한곳에 모아 새롭게 엮더니 마치 갈대 입처럼 폭이 좁고 날렵한 배를 순식간에 만들어 버렸다. 이미 이곳에 자리를 잡은 순간부터 배를 타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는지 갈댓잎을 꼬아 제법 긴 밧줄까지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다.
“설마 이걸 타고 여길 빠져나가겠다는 말인가요?”
미리 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갈대로 만든 배는 금방이라도 가라앉아 버릴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보기엔 약한 것 같아도 절대 가라앉지는 않을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벗어놓은 넓은 피풍의를 배 안쪽에 깔았다. 피풍의는 가죽을 얇게 두들긴 뒤 빗물이 안으로 침투하지 못하게 기름을 잔뜩 먹였기에 배 안쪽으로 혹시라도 들어올 물까지 막아줄 수 있을 것이다.
카일은 미리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배를 끌고 안쪽으로 향했다.
“설마 이 주변을 미리 돌아본 건가요?”
어제저녁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빽빽하던 갈대숲이었다. 그 사이로 새롭게 만들어진 길을 보며 이엘이 물었다. 카일은 그녀들이 지쳐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탈출을 위해 밧줄을 만들고 주변을 정찰하며 쉬지 않고 움직였던 것이다.
“잠이 오지 않아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을 뿐입니다.”
자책하듯 고개를 떨군 이엘에 카엘이 당황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미안해요. 오러만 사용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카일에겐 맹약을 맺은 블랙 와이번 시카니스가 있다. 터그가 카일의 명에 따라 벨하크의 호위에 동의한 것도 카일이 시카니스를 부른다면 하늘을 통해 충분히 탈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카일을 따라간다고 해도 모두가 시카니스를 타고 한 번에 탈출하기는 불가능하니 카일의 명에 따라 벨하크의 호위로 영지에 남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카일은 시카니스를 불러낼 수가 없다. 아공간석을 개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오러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엘은 이미 카일이 시카니스를 불러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 상황에선 카일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차피 시카니스를 불러낼 수 있었다고 해도 하늘을 통해 탈출하긴 힘들었을 겁니다.”
“네?”
“밤새 하늘 위로 와이번들이 서너 마리씩 편대를 이루며 정찰하더군요. 아마도 백작가의 와이번들이 증원된 것 같았습니다. 시카니스를 불러내는 순간 백작가의 와이번에게 포위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카일이 사실대로 말했다. 카일이 잠들지 않고 주변을 정찰한 것도 하늘 위를 쉬지 않고 날아다니는 와이번들 때문에 이곳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카니스와 어제부터 다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마… 오러가 돌아왔단 말인가요?”
시안느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공간석에 잠들어 있는 와이번과 대화를 하려면 오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저 다른 방법 중 하나라고 할까요?”
정확히는 외력 덕분이었다. 피부 외부로 흐르는 외력이 오러를 대신해 아공간석에 직접적으로 기운을 전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부의 오러를 인위적으로 아공간석에 주입하는 방식과는 달리, 피부에 접하는 아공간석에 직접적으로 기운을 전달하는 외력은 효율적인 면에선 오히려 오러보다 더 뛰어나가 할 수 있었다.
“그럼… 시카니스도 불러낼 수 있단 말인가요?”
“물론입니다.”
“다행이에요. 정말 잘됐군요.”
이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카일에게 있어 오러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건 단순히 검사의 문제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카일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자 좁은 수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물속에서부터 자라난 갈대들이 작은 섬을 이루며 군데군데 자생해 강변을 따라 미로 같은 작은 수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배를 타야 합니다.”
카일이 두 사람을 태운 뒤 강으로 배를 밀었다. 배가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물 위로 떠오르자 카일이 재빨리 배 위로 뛰어올랐다.
출렁-
“까악-!”
카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배가 출렁이며 반쯤 가라앉자 이엘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가 스스로 놀라며 급히 입을 막았다. 시안느의 얼굴 역시 창백하게 변했지만 곧바로 다시 떠오르는 배를 보며 겨우 안정을 찾았다.
“미, 미안해요.”
이엘이 무안한 듯 붉어진 얼굴로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카일이 웃으며 등 뒤로 비끄러매고 있던 검과 단봉을 연결했다. 장병기인 대검이 순식간에 훌륭한 노가 되어버린 것이다. 대검을 설마 이렇게까지 다양하게 활용하게 될 줄은 카일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일단 배를 타고 최대한 이곳에서 멀어질 겁니다.”
다행히 날이 밝아오면서부터 피어오른 물안개가 정찰 중인 와이번들의 시선을 막아주어 지금이 이곳을 빠져나갈 최적기이기도 했다.
카일은 최대한 몸을 낮추며 조심스럽게 노를 저어 북쪽으로 향했다. 이대로 올라간다면 안개가 걷힐 때쯤 어렵지 않게 와이번의 정찰 범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카일의 생각을 비웃듯 앞쪽에서부터 안개와는 전혀 다른 기운이 습지 전체를 뒤덮었다.
“이런… 미친! 다 태워죽일 생각인가!”
카일이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앞을 가로막은 새하얀 기운은 갈대를 태우며 생겨난 메케한 연기였다. 새벽녘 북동쪽에서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을 따라 갈대밭 북쪽 끝부분에서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바짝 마른 갈대를 따라 일어난 불이 바람을 따라 무섭게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보니 성 밖으로 나온 병력들은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차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북에서 내려온 불길이 영지 쪽으로 넘어오는 걸 차단하는 동시에 불길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카일 일행과 마법사, 성녀를 잡아들이려는 전략인 것 같았다. 다만 이상한 것은 이엘을 생포해야 할 펠론 자작이 이처럼 무식하고 위험한 방법을 사용할 리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용을 써도 빽빽하게 자란 갈대를 헤치며 불길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건 갈대밭 안에 숨어 있는 사람 모두를 죽이겠다는 의도나 마찬가지였었다.
꽝!
에일 영주의 집무실 문이 부서졌다. 펠론 자작이 막아서는 기사들을 밀어내며 그 안으로 들어섰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집무실에 앉아 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에일 남작이 펠론 자작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네놈이야말로 무슨 짓이냐! 내 허락도 없이 감히 습지에 불을 지르다니! 당장 멈추게!”
“지금 허락이라 하셨습니까?”
에일 남작 역시 노한 얼굴로 펠론 자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곳의 영주는 저 에일 남작입니다. 왕실로부터 인정받은 영지의 주인이란 말입니다. 헌데 왜 제가 자작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지금 그 말… 백작가와 척을 지겠단 말인가?”
강하게 반발하는 에일 남작의 말에, 펠론 자작이 지지 않고 남작을 노려보았다.
“하하! 그건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이군요.”
“무슨… 뜻인가?”
“자작께서 에일 영지의 대장장이 다수를 빼앗아가셨지 않습니까?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무슨 소리? 당장 남작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내가 왜 그런 무모한 일을 하겠나!”
자작의 말에 이번엔 에일 남작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 말을 제게 믿으란 말입니까?”
“내가 거짓말을 한단 날인가?”
“…자작께선 이미 오래전부터 대장장이들을 영입하려 하시지 않았습니까?”
“맞아! 질 좋은 무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은 백작가엔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네. 하지만 그건 에일 남작가에도 좋은 일이었네.”
“…무슨 말씀입니까?”
“백작가 소속 공방이 백작령에만 있던가?”
“그… 건!”
그린넨 백작가는 상인 가문 특성상 여타의 대영주처럼 무력만으로 인근 영지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바로 백작가에 속한 수많은 공방을 인근 영지로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공방에서 영지로 납부하는 막대한 세금을 통해 영주들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영주들은 막대한 세금이 들어오는 공방이 철수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백작가에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바라는 건 대장장이들을 백작가의 소속으로 묶어 조금 더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공방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작께선 선대 영주께서 대장장이들을 이곳에 정착시킨 노력을 생각해 내 뜻을 거절한 것뿐이지.”
“…하지만 분명 어제 저녁 벨하크를 비롯한 일단의 대장장이들이 자작을 찾아갔지 않습니까?”
“맞아! 날 찾아온 건 사실이었다. 그대의 어처구니없는 짓거리를 말하며 내게 몸을 의탁하려 했지만 난 분명 거절했어!”
흑기사와 성기사 간의 치열한 전투는 결국 성기사의 패배로 끝이 났다. 강력한 재생력과 회복력을 가진 성기사들도 소드 마스터인 흑기사를 당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흑기사가 암흑마기의 상극인 신성력의 피해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도주하면서, 전투는 백작가에 피해만 남기곤 끝이 났다. 이후 벨하크가 지친 펠론 자작을 찾아가 에일 남작의 계획을 설명하며 대장장이들의 신변을 부탁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받아들일 것 같았던 펠론 자작이 이를 거절했다. 대신 남작이 무모한 일을 벌이지 않도록 중재해 주겠단 약속을 하곤 돌려보낸 것이다.
“그럼… 그들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자작의 말에 당황한 에일 남작이 소리치며 의자에 털석 주저앉았다.
“지금 대장장이들 모두가 사라졌단 말인가?”
펠론 자작 역시 당황한 듯 물었다. 지금 국경경비대의 모든 병력은 이곳 에일 영지 대장장이들의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이 사라졌다면 당장 전쟁에 필요한 무기 생산에 차질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 자작께서 대장장이들을 빼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난 그럴 이유도 없고 시간도 없단 말이네!”
“그럼…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단 말입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안단 날인가? 그것보단 지금 당장 작전을 취소하게! 만약 이번 일로 영애께서 조금의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백작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테니 말이야!”
“영애… 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빌어먹을! 호위 기사단은 백작가의 가족을 수호하는 기사단이네. 이들이 왜 이곳까지 왔겠나! 당장 망할 작전을 멈추게!”
펠론 자작이 바락 고함을 질렀지만, 남작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느, 늦었습니다. 이미… 자작께서 방문하시기 전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펠론 자작이 남작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부관을 돌아보며 급히 소리쳤다.
“와이번 나이트를 전부 출동시켜! 반드시 영애를 찾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자작이 집무실을 박차고 달려나가자 에일 남작이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