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빛과 어둠(3)
넓은 갈대밭을 바라보던 카일이 뒤를 돌아보았다. 예의 이엘이 카일의 뒤에 섰고 가장 끝에 시안느가 섰다.
“제가 밟은 곳만 밟아야 합니다.”
“걱정 마요. 이미 한번 경험이 있잖아요.”
이엘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와 시안느는 이미 오크랜드에서 이끼로 뒤덮인 습지를 건넌 적이 있었다.
“네, 그때와 똑같이 따라오시면 됩니다.”
카일이 가지고 있던 가죽끈을 건넸다. 서로의 허리를 묶어 혹시라도 물에 빠질 경우 신속히 구하려는 것이었다.
출렁-
카일이 조심스럽게 한 발 내딛자 갈대가 물결치듯 출렁이며 습지 아래에서부터 물이 조금씩 배어 나왔다.
오랜 시간 습지 위로 갈대가 적체되면서 사람이 걸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두텁게 물 위에 뜬 독특한 지반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다고 갈대 지반이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갈대가 엉성하게 형성된 곳을 잘못 밟아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간 발버둥 치면 칠수록 얼기설기 엮인 갈대가 더욱 사람을 옭아매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빠져나갈 수 없게 되는 죽음의 늪이기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다닐 수 있는 거죠?”
마치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처럼 능숙하게 갈대 위를 걷는 카일의 모습에 시안느가 궁금한 듯 다가와 물었다.
“아마 화이트우드 습지를 걸었던 경험 덕분이겠죠. 갈대나 이탄층 모두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내부의 오러를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희미하게 느끼기 시작한 외력이 도문트와의 격돌로 보다 명확하게 인지된 덕분이었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외력의 파장이 단단한 갈대 층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아마도 혼원장을 오랫동안 수련하면서 내부 깊숙이 스며든 오러가 전혀 새로운 형태의 흐름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외력이 오러 소드처럼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외부의 타격을 조금 더 줄여주고 오감을 민감하게 만들어 주거나, 지혈을 돕고 치유력을 조금 더 높여주는 것뿐이었다. 마치 피부 위에 형성된 투명한 막이 한 겹 씌워진 느낌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오러를 원활하게 사용할 수 없는 카일에겐 이것만으로도 커다란 도움이 되겠지만 말이다.
“결국 경험이란 말이군요.”
“그런 겁니다.”
카일이 대충 이야기를 끝내고는 서둘러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성벽에서 뛰어내린 사하와 성녀가 카일과 멀지 않는 곳에서 갈대밭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칫 두 사람과 마주쳤다간 골치 아픈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잠깐!”
앞서가던 카일이 급히 걸음을 멈추곤 잠시 성벽 너머를 올려보더니 갈대밭 안 깊숙이 몸을 숨겼다.
“무슨 일이에요?”
“와이번입니다.”
카일이 급히 하늘 위를 가리켰다. 성벽 너머에서 다가오던 다섯 개의 황금빛 작은 점들이 점점 커지더니 습지를 스치듯 낮게 날다가 곧장 하늘 위로 치솟았다.
“에일 남작령에 있는 와이번 모두가 나온 것 같아요.”
이엘이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간 와이번의 문장을 보곤 말했다.
“성벽 위로 불길이 일 정도면 병사들이나 기사들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남작도 가만히 있을 순 없겠죠.”
카일이 검은 불길에 휩싸여 반쯤 파괴된 성벽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쩌죠?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요.”
“일단은 기다려야 합니다. 무작정 움직였다간 와이번의 감지력에 위치가 탄로 날 겁니다.”
카일이 하늘 위를 잠시 올려보더니 갈대밭 주변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리고는 작게 웃으며 이엘과 시안느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우리가 아니더라도 먼저 움직여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카일이 멀지 않은 곳에서 요란하게 흔들리는 갈대숲을 가리켰다.
“곧 와이번이 발견할 겁니다. 우린 그때 움직입니다.”
카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새하얀 빛이 하늘 위를 선회하는 와이번에게 쏘아졌다.
“지금!”
카일이 두 사람을 돌아보더니 몸을 잔뜩 낮추곤 갈대밭을 헤치며 빠르게 나아갔다.
끼아악-
시끄러운 와이번의 울음소리에 카일이 다시 갈대밭 안으로 몸을 낮추고 고개를 들었다.
“역시 미숙하군요. 저러면 표적이 되기 딱 쉬울 텐데.”
선회하는 와이번들에 새하얀 광선을 거침없이 난사하는 성녀를 보고, 이엘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성녀는 대신전에서 귀하게 보호받고 자랐을 겁니다. 언제 이런 전투를 경험했겠습니까? 아마 와이번도 처음 볼 겁니다.”
시안느가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이번 전투는 에밀리아가 성기사들의 보호 없이 치루는 첫 전투였다. 특히 사람을 상대로 하는 공격 마법은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어, 에밀리아는 성벽을 통과할 때도 마녀라 부르던 사하의 뒤만 줄곧 쫓아왔던 것이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그녀를 보호해야 할 베아츠가 10호와의 전투에 몰입하면서 벌어진 결과였다.
“아악-!”
하늘 위를 빙글빙글 돌다 신성 마법을 피해 아래로 떨어지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와이번에, 성녀가 기절할 듯 비명을 지르며 곧장 앞으로 달려갔다.
투웅-
그때였다. 마치 잔잔한 수면 위로 일어나는 작은 파문처럼 검은 파장이 허공에 번져나가더니 거대한 핏빛 마법진이 하늘 위로 떠 올랐다. 마법진이 곧 급강하하는 와이번을 옭아매더니 그대로 습지 아래로 추락했다.
콰아악-
물 위로 추락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충격과 파장이 습지 위에 번져나가며 갈대밭이 거친 파도처럼 출렁였다. 카일이 숨어 있던 제법 멀리 떨어진 갈대밭까지 그 물결이 번져왔다.
끼아악-
와이번이 온몸을 휘감은 마법진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괴성을 질렀지만, 그럴수록 마법진은 더욱더 강하게 와이번을 옭아매며 압박할 뿐이었다. 완벽한 제압임에도 정작 마법을 시전한 사하는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빌어먹을.”
사하가 짜증스럽게 에밀리아를 노려보았다. 사하는 와이번이 나타나자마자 검은 로브를 눌러쓰며 몸을 최대한 낮추고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그녀는 이미 와이번과 전투를 벌여선 이길 수 없단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최대한 그들의 시선을 피하려 한 것이다. 아무리 암흑마기가 강하다 해도 와이번의 항마력을 이겨내고 외피를 뚫어 직접 타격을 줄 마법은 고서클 중에서도 극히 드물었다. 물론 와이번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줄 소드 마스터 흑기사가 있다면 해볼 만하겠지만, 혼자인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저 멍청한 성녀가 갑자기 신성 마법을 마구잡이로 난사하며 표적을 자처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사하를 짜증나게 만든 건 와이번들이 몰려들자 당황한 성녀가 자신이 숨은 갈대밭으로 뛰어들면서 자신 역시 와이번의 표적이 되어버렸단 사실 이었다.
“제발 저리 좀 꺼져!”
사하가 버럭 고함을 치며 급히 몸을 피해 달아났지만, 이미 거대한 와이번의 기세에 눌린 에밀리아는 회복마법까지 동원해가며 멀어져가는 사하의 뒤를 맹렬하게 쫓기 시작했다. 더 황당한 건 성녀가 입은 옷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로브 위로 황금빛 수를 놓아 어두운 밤에도 달빛을 받으며 성스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녀의 고결한 품격과 성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옷이었지만, 하늘을 나는 와이번 나이트에겐 그저 잡기 좋은 연습용 표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더불어 그녀를 피해 갈대숲을 헤집으며 달리는 사하의 존재 역시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사, 살려줘요!”
성녀가 간절한 목소리로 앞서 달리는 사하를 불렀다. 항상 누군가의 보호 속에서만 살아온 에밀리아에겐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힘든 고통과 공포의 순간이었다.
이제 그녀에게선 더 이상 성녀의 우아함과 도도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공포와 두려움에 질린 힘없는 소녀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익!”
달려가던 사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렇게 도망쳐서는 와이번의 추격을 피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갑작스런 마법 공격에 당황해 공격을 주저하며 하늘을 선회하고 있지만 추락한 와이번이 아무런 피해 없이 풀려나 버리면 와이번 나이트들도 더 이상 공격을 주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왜!”
갈대를 헤치며 달려가던 사하가 버럭 고함을 치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추곤 돌아서서 달려오는 에밀리아를 냅다 걷어차 버렸다.
“널 구해야 하냔 말이야!”
갑작스런 사하의 공격에 에밀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출렁이는 갈대밭을 뒹굴었다.
“아악-!”
“조용히 못 해! 너 때문에 나까지 죽게 생겼잖아!”
사하가 쓰러져 있는 에밀리아는 노려보며 으르릉거리더니 돌연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사하의 몸 위에 던졌다.
“허락 없이 벗었다간 놓고 갈 거야!”
“…고마워요.”
“천만에! 네가 널 데려가는 건 위급 시에 미끼로 던져 놓고 도망가기 위해서야! 알았어?”
사하가 버럭 고함을 치더니 냉정히 돌아서 갈대밭을 헤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뭐해! 안 갈 거야?”
“아, 아니에요.”
사하가 다시금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에밀리아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황급히 사하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몰랐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갈대밭에서 그녀들이 그토록 찾고 있던 카일이 둘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요상한 조합이군요. 어둠을 상징하는 암흑마법사가 빛을 상징하는 성녀를 도와주다니. 정말 이상한 동행이 아닐 수 없네요.”
이엘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사하와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서로 앙숙이라 할 수 있는 두사람이 위기에 처하자 결국 힘을 합치기 시작한 것이다.
“빛과 어둠이 선과 악은 아니죠. 악한 힘을 받았더라도 자신을 희생해 대륙을 구할 수 있고, 신이란 가면 뒤에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대륙을 피로 물들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카일의 말에 이엘과 시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신을 믿지 않는 그녀들이지만, 신관과 성기사는 언제나 선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와이번들의 목표에선 벗어났으니, 일단 잠시 몸을 숨길 쉴 곳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카일이 사하와 에밀리아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잡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고 발버둥 치는 와이번과도 제법 멀리 벌어져 고요한 적막감까지 밀려올 쯤, 갈대숲을 한참 동안 헤매고 다니던 카일이 걸음을 멈췄다.
“땅입니다.”
카일이 한쪽 무릎을 굽혀 갈대 사이로 보이는 두꺼운 이끼와 모래를 매만졌다. 촉촉한 수분이 느껴지긴 했지만 출렁거리는 갈대가 아닌 단단한 땅을 밟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쌓여있던 피로가 풀어지는 듯했다.
울렁거리는 갈대밭을 헤치며 달리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쉬고 계십시오.”
카일이 땀으로 흠뻑 젖은 이엘을 부축하다 상당히 지친 시안느를 돌아보며 말했다.
“뭘 하려는 거죠?”
카일이 주변을 돌아보더니 등 뒤로 비끄러맨 대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곧 주변을 돌아다니며 갈대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여긴 사방이 트인 습지 위입니다. 지금은 바람이 약해 보이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바람이 강해지고 기온도 더 떨어질 겁니다. 더구나 땀까지 흘렸으니 일단 바람을 막아줄 공간이 필요합니다.”
카일은 주변에 널려있는 사람 키만 한 갈대를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대검을 횡으로 휘두르자 높게 자라던 갈대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이곳의 갈대는 크기가 클 뿐 아니라 대가 굵고 단단한 수종이라 에일 영지에선 갈대를 이용해 다양한 물건을 만들었다. 특히 갈대를 단단히 엮어 지붕을 만드는 것은 동부에서도 오직 에일 영지만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갈대로 집을 만들 생각인가요?”
갈대를 모아 통나무 굵기로 다발을 만드는 카일의 곁으로 시안느가 다가와 물었다. 그러자 카일이 굵은 갈대 하나를 뽑아 시안느에게 건넸다.
“갈대를 보면 안쪽이 비어있습니다. 대신 이곳에 공기가 들어차 있죠. 이걸 이렇게 다발로 엮으면 공기가 층을 이루게 됩니다. 층층이 쌓인 공기층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냉기를 막아줄 겁니다.”
카일이 여러 개의 갈대 다발을 묶더니 원뿔 형태의 작은집을 뚝딱 만들었다. 그리곤 남은 갈대를 깔아 바닥에서 올라온 습기를 차단했다. 단순한 형태지만 아무것도 없는 갈대밭 위에서 지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늑한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