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빛과 어둠(2)
“왜… 그렇게 생각한 겁니까?”
“이곳에 펠론 자작이 있기 때문이죠.”
“이미 모든 증거를 손에 쥔 에일 영주라면 오히려 자작을 참관시켜 대외적인 명분까지 얻으려 할 것 같은데요?”
벨하크는 대장장이면서도 왕실로부터 명예 작위까지 받을 정도로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증거를 만들었다고 해도 결국 정황에 불과할 뿐 직접 밀수에 참여하지 않은 이상 완벽한 증거라 할 수는 없으니, 에일 영주로서도 벨하크와 대장장이들을 잡아들여 노예로 만들기는 부담스러울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린넨 백작가의 이인자라 할 수 있는 펠론 자작이 참관한 재판에서 나온 결정이라면 에일 영주로서도 확실한 대외적 명분을 가지고 대장장이들과 벨하크를 손에 쥘 수 있을 테다. 에일 영주의 입장에선 지금이 오히려 벨하크와 대장장이들을 잡아들이는데 가장 적합한 시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엘은 카일의 생각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절대 그럴 수는 없어요.”
이엘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린넨 백작가의 휘하에는 수많은 상단과 여러 공방들이 있어 군수품 대부분을 직접 생산하거나 직영 상단을 통해 조달하고 있죠. 하지만 유일하게 무기만은 이곳 에일 영지에서 생산되는 것만 사용하고 있어요. 왜일 거라 생각하나요?”
“그야 품질이 우수하기 때문 아닙니까?”
카일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카일이 벨하크를 스승으로 인정한 것 역시 그의 뛰어난 실력 때문이었다.
“맞아요. 백작가에도 제법 많은 공방들이 있지만 이곳 에일 영지의 대장장이들보단 실력이 떨어지죠. 그래서 가문의 사람 중 일부는 에일 영지의 대장장이들을 적극 영입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백작께서 거부하셨죠.”
“당연합니다. 대영주가 하급 귀족의 영민을 힘으로 빼앗으려 한다면 누가 대영주를 진심으로 따르겠습니까?”
“맞아요. 하지만 이번엔 밀수사건은 달라요. 만약 이번 일을 펠론 자작이 알게 된다면 자작이 직접 이번 일을 조사하려 할 거예요. 그리고 대장장이들과 벨하크 님을 백작령으로 데려가려 하겠죠.”
“아무리 대영주라도 타 영지의 일엔 관여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론 그렇죠.”
“이 경우는 다르단 말입니까?”
“맞아요. 전혀 다른 문제죠. 밀수는 국경과 관련 있는 일이에요. 즉 백작이 아닌 국경을 책임진 변경백으로서 이번 일을 조사하고 처벌할 권한이 있단 말이죠.”
“아!”
이엘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넨 백작은 백작인 동시에 국경을 책임지는 변경백이다. 즉 백작은 국경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관여할 권한이 있다는 말이었다. 더구나 비밀스런 밀수 루트는 달리 생각하면 경비대의 눈을 피해 국경을 넘을 최상의 적 침투로라 할 수가 있으니 변경백인 백작이 직권으로 조사하고 처벌하려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전쟁을 눈앞에 둔 상황이라면 명분은 더더욱 변경백인 백작에게 있었다.
“더구나 상대는 펠론 자작이에요. 상황을 접하는 순간 이번 일에 에일 남작이 관여되었음을 직감할 거예요. 그럼 더더욱 조사를 명목으로 거리낌 없이 대장장이들과 벨하크 님을 백작령으로 데려가겠죠.”
일단 백작령으로만 간다면 그 이후는 더 이상 에일 남작도 관여할 수가 없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예측이 아닌가? 오히려 펠론 자작이 에일 남작을 도와줄 수도 있는 일이지.”
이야기를 듣던 벨하크의 의문에 이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요.”
“너무 확신하는 것 아닌가?”
이엘의 답에 벨하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 일은 대장장이들과 자신의 미래가 걸린 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건만, 이엘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조금 전 대장장이들을 영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있다고 했었죠.”
“백작의 거부로 무산되었다지?”
“맞아요. 그때 그 일을 가장 앞장서서 주장했던 사람이 바로 펠론 자작이에요.”
“그럼…!”
“자작이 이번 일을 알게 된다면 기회를 놓치지 않겠죠. 아마도 에일 영주도 이런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동부 일대의 사교계에선 알게 모르게 퍼진 이야기니까요.”
이엘의 말대로라면 에일 남작으로선 펠론 자작이 돌아갈 때까지 이번 계획을 뒤로 미룰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 드는군, 남작이 우릴 노예로 만든다고 해도 결국 백작이 변경백이란 명분으로 다시 조사를 한다며 우릴 백작령으로 소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일반적인 경우라면, 노예가 된 대장장이들이나 벨하크 님을 다시 소환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어요. 아니, 그럴 기회가 없을 거예요.”
이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때문이군요. 곧 전쟁이 벌어질 테니 백작가로선 휘하의 영주들과 괜한 분쟁을 만들려 하지 않겠죠. 특히 무기를 납품하는 에일 영지와는 더더욱 말이죠.”
“맞아요. 전쟁 시 가장 중요한 건 지속적으로 소모되는 무기를 안정적으로 보급하는 일이에요. 남작가와 괜한 분쟁을 만들어 무기 생산에 차질을 입힐 수는 없으니, 백작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밖에는 없을 거예요.”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이 시점에서 일을 벌인 거란 말이군.”
“아마도 제국과의 전쟁이 결정된 순간 이번 일을 계획하기 시작했을 거예요.”
이엘의 말에 벨하크가 깊은 고민을 하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남작의 암수에서 벗어나려면 결국 백작가에 몸을 의탁해야 한단 말이군.”
카일과 백작은 원수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만약 자신이 백작가에 몸을 의탁한다면 다시 카일을 만나기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에일 남작령이라면 몰라도, 카일이 백작령까지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을 찾아오기는 힘들 것이다.
“아니, 다른 방법도 있죠.”
“다른… 방법?”
벨하크가 이엘을 돌아보았지만, 정작 이엘은 눈을 빛내며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인원을 모두 데려가긴 힘듭니다.”
굳게 닫혀있던 카일의 입이 열렸다.
“모두 데려갈 필요는 없어요.”
“결정은… 스승님께서 하셔야겠죠.”
카일이 벨하크를 돌아보았다.
“남부에 작은 장원이 하나 있습니다.”
“장… 원?”
“네, 제가 대장으로 있는 용병대가 참전하는 조건으로 받은 겁니다.”
카일의 말에 불현듯 대장간으로 찾아왔던 도문트와 카일의 대화가 떠올랐다.
“설마 3왕자파에 가담했다는 아이언 용병대가 그럼…!”
“제가 그것의 대장입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만 허락하신다면 그곳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카일의 말에 벨하크의 얼굴이 잠시 밝아졌다가, 얼마지 않아 다시 어두운 빛을 띠었다.
“대장장이들 모두를 데려갈 수는 없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남은 대장장이들도 펠론 자작에게 몸을 의탁한다면 안전하게 영지를 떠날 수 있을 겁니다.”
카일의 말에 벨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것이 최선임을 알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함께한 그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얼굴은 더더욱 침울해졌다.
“어쩔 수 없지. 네 말에 따르겠다.”
벨하크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일의 얼굴이 밝아졌다.
“터그.”
“네, 부르셨습니까?”
“터그와 형제들은 이곳에 남아 스승님을 안전하게 모셔주세요.”
카일의 말에 터그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이곳에 남으란 말씀입니까?”
“네, 여기서부터는 저희 셋만 움직이겠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안전하게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있으니 말이죠.”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목에 걸린 블랙 사파이어를 쓰다듬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카일의 뜻을 알아챈 터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형제들에게 현 상황을 알렸다.
“이곳에서 최대한 숨어 있어야 할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벨하크가 끝없이 넓게 펼쳐진 갈대밭을 보며 말했다. 이곳은 에일 영지 동북쪽에 위치한 넓은 습지 지대로 사람 키만 한 높이의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는 곳이라, 일단 갈대숲 안으로 들어서면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기 쉽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넓은 습지대와 강으로 인해 한번 습지로 들어서면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은 곳이었다. 오래전 제국군이 이곳을 통해 동부를 침입하려 했지만 제대로 된 길을 찾지 못하고 습지에 갇혀 패퇴한 일화까지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벨하크가 카일을 이곳에 데려온 것도 탈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길잡이를 통해 잠시 넓은 갈대숲에 숨어 펠론 자작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길잡이를 할 밀수조직이 사라지면서 이젠 카일이 직접 갈대숲을 지나 마른 땅을 찾아야만 했다.
“걱정 마십시오. 갈대는 아니지만 이곳과 비슷한 곳에서 생활해본 적이 있습니다.”
카일의 말에 이엘과 시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 모두 오크랜드의 늪지에서 위험한 며칠을 보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꽈앙- 꽝
그때였다.
갑작스런 폭음과 함께 성벽 한쪽에서 검은 불길이 치솟더니 성벽에 남아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불길이 일어난 곳으로 황급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휴, 그녀가 여기까지 쫓아온 모양이군요.”
“네?”
“사하와 흑기사가 이곳에 와 있습니다.”
카일의 말에 이엘과 시안느가 깜짝 놀라며 황급히 일어났다.
“빨리 출발하는 것이 좋겠어요.”
“맞아요. 어서 가야 해요.”
두 사람의 재촉에 카일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그, 스승님을 부탁합니다.”
“반드시 무사히 모셔가겠습니다.”
터그와 형제들이 벨하크의 뒤에 늘어섰다.
“…조심히 가라!”
“스승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
카일이 웃으며 몸을 돌려 갈대숲 안으로 향했다.
“벨하크 님, 저희도 서둘러 떠나야 합니다. 마법사의 눈에 띄었다간 큰 화를 당할 수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카일을 바라보던 벨하크가 터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로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불길 사이로 사하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짜증스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까지 따라올 생각이야!”
사하가 광휘에 휩싸인 채 검은 불길을 헤치고 다가오는 에밀리아를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말하지 않았나요. 저와 당신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요. 가는 방향이 같은 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에밀리아의 반문에 사하가 황당한 표정으로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하가 기사들과 병사들을 죽여가며 뚫고 들어온 길을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걸어 말 그대로 그저 따라온 것뿐이었다.
“지금 말장난을 하려는 거야! 여기까지 올라오며 죽인 녀석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정확히 34명이죠. 아! 부상자가 한 명 있었지만 치료를 했으니 곧 일어나 걸을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생존자를 살려 보냈단 말이야?”
“물론이죠. 여신의 축복에 감사하며 앞으로 신을 섬기겠다고 약속했답니다.”
에밀리아가 여전히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사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원병을 부를 수 없게 생존자 하나 없이 죽이며 성벽까지 올라왔건만, 에밀리아가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하… 빌어먹을!”
사하가 허탈한 한숨을 쉬며 성벽 아래에서 성기사와 열심히 투닥거리는 10호를 돌아보다 고개를 저었다.
“모두 멍청한 놈들 뿐이야!”
사하가 멀리서 달려오는 기사들을 보며 그대로 성벽을 뛰어내렸다.
“앗, 같이 가요.”
갑자기 성벽 아래로 몸을 던진 사하에 에밀리아가 베아츠를 힐끔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 주저 없이 성벽에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