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 빛과 어둠(1)
“신성력!”
강렬한 정화마법과 함께 점점 흐릿하게 사라져가는 마법진을 보며 사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홀을 높이 치켜들고, 순백의 여인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성녀!”
사하가 다시금 놀라며 소리쳤다. 그녀 역시 누군가 자신의 뒤를 쫓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존재가 설마 성녀일 줄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차앙-
성녀와 함께 달려오던 성기사 배아츠가 검을 뽑아 들더니, 말에서 높이 뛰어올라 사하를 찔러 들어갔다.
“네놈 상대는 나다!”
쿠웅-
사하의 앞을 막아선 10호가 강력한 진각을 내뻗었다. 10호의 주먹 위로 뭉친 녹빛 기류가 새하얀 기운을 뿜어내는 베어츠의 검과 부딪혔다.
쩌엉-
검과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강력한 기운을 이기지 못한 베아츠가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크윽, 쿨럭!”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며 베아츠가 거친 기침과 함께 붉은 피를 토해냈다.
“이거… 별거 아니군.”
충격에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던 10호가 베아츠를 보며 피식 웃었다. 성기사의 전투력이 오러를 다루는 기사에 비해 떨어진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성녀를 호위하는 성기사의 무력까지 이렇게 약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이… 멍청한, 조심해!”
사하가 10호를 향해 외쳤다. 피를 토하던 베아츠의 신형이 하얀 선을 그리며 10호를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중상을 입은 듯 피를 토하던 자의 것이라곤 전혀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꽈앙-
10호가 빠르게 날아드는 베아츠의 검면을 후려치며 뒤로 황급히 물러났지만, 밀려나던 검이 빠르게 뒤틀리며 10호의 레더 아머를 스쳐 지났다.
“빌어먹을, 이게 얼마짜린데…”
10호가 잘려나간 레더 아머를 보며 버럭 소리치더니 베아츠를 향해 달려들자 베아츠 역시 10호를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하지만 또다시 10호의 주먹에 맞아 뒤로 날아간 베아츠는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 도로 일어나 10호를 향해 달려들며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뭐야!”
10호가 당황한 듯 달려드는 베아츠를 피해 주춤 물러났다. 연달아 강력한 일격이 격중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일어나 달려드는 괴물 같은 베아츠에 그만 당황하고 만 것이다. 더구나 10호의 권격은 응축된 오러를 한순간 뿜어내 상대를 격살하는 기술이 주를 이루고 있어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의 적도 상대할 수 있지만, 그만큼 소모되는 오러의 양도 극심해 지금과 같은 장기전엔 불리했다.
뒤로 물러나자 베아츠는 선기를 잡았단 생각에 곧바로 따라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멍청한… 파이어 볼!”
달려드는 베아츠를 향해 사하가 급히 파이어볼을 날리자 기다렸다는 듯 성녀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실드”
성녀의 지팡이에서 은은한 빛이 전해져 베아츠의 앞에 우윳빛 방패가 만들어지며 검은 불덩이를 막았다.
과앙-
마치 거대한 대종 소리가 울리며 괴성과 함께 두 마법이 함께 사라져 버렸다. 상충 되는 기운으로 인해 소멸해 버린 것이다.
“아… 아가씨!”
10호가 옆으로 다가온 사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멍청한, 저 녀석은 성기사야! 트롤만큼 회복력이 강하단 말이야.”
신성력은 오러보다 약해 비슷한 수준의 성기사와 기사가 전투를 벌이면 일반 기사들이 손쉽게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고 성기사가 약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성기사 역시 중급이상에 오르면 일반적인 기사들보다 비정상적으로 강한 회복력을 보인다. 즉 오러에선 뒤질지 몰라도 트롤만큼 뛰어난 재생력을 가져, 장기전을 벌이면 오히려 성기사가 더 유리하다고 할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10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상대는 성녀를 호위하는 기사다. 성기사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회복력 또한 강할 것이니, 무턱대고 오러를 남발하며 싸울 상대가 아니었다.
“아가씨, 제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엔 절대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틀렸어!”
사하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성기사와 부딪히는 순간 단번에 머릴 부숴버렸다면 손쉽게 성녀를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상대가 10호의 실력을 파악해 버렸다. 더구나 그의 옆엔 성녀가 있었다. 그녀가 성기사를 돕기 시작한다면 쉽지 않은 전투가 벌어질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당신이 당대의 암흑 사제… 아니 마녀인가요?”
성녀 에밀리아가 사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보단 마법사라고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사하가 비록 마왕에게서 힘을 받아 그의 뜻에 따르고 있지만, 신전이나 성녀처럼 마왕을 신으로 믿고 따르지는 않는다. 그저 그렇게 키워졌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순응하고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신성 마법을 쓰는 사제나 성녀와는 달리, 암흑마법사는 마나 대신 마기를 이용할 뿐 기존 마법을 사용했다. 일반 마법사와 큰 차이가 없는 만큼 암흑 사제나 마녀라 부르기보단 암흑 마법사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신은 사악한 마왕의 뜻을 따르며 그를 모시는 사람이 아닌가요? 우린 그런 사람을 사제나 마녀라 부르죠.”
“흥, 난 너희들의 지리한 명분 싸움엔 관심이 없다. 이단 척결을 내세울 생각이라면 쓸데없는 명분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사하가 에밀리아를 바라보며 냉소적으로 외쳤다. 신전이 마왕을 모시는 암흑 마법사를 사제나 마녀라 칭하는 이유는 이단 척결이란 다분히 의식적인 행동에 불과했다. 특히 신전이나 당대의 성녀들도 하지 못한 자기희생으로 대륙을 구한, 암흑 마법사의 희생을 폄하하려는 목적도 다분히 깔려있었다. 다만 신전의 힘이 그리 크지 않아 암흑 사제라 칭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미안하지만, 전 당신과 싸울 생각이 없어요. 그저 당신이 이곳에서 조용히 물러나 주길 바랄 뿐이죠.”
“물러나?”
사하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도 이젠 성녀가 왜 갑자기 자신을 쫓기 시작했는지 알게 된 것이다.
“너… 역시 카일을 쫓아온 건가?”
“그분의 이름이 카일이었군요.”
에밀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상상 속 존재의 이름이 드디어 그녀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칫, 이름도 모르고 쫓아다녔단 말이군.”
사하가 얼굴을 찌푸리며 카일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성기사와 10호의 싸움이 시작되며 모든 관심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달아나 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놓쳤잖아!”
사하가 사납게 외치며 에밀리아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마치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사하를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 에밀리아는 카일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지만, 일부러 모른 척 외면하고 있었다. 먼저 마녀의 곁에서 그를 떨어트려 놓아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절대 암흑 기사와 같은 사악한 존재는 되지 않을 거예요. 성녀인 제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흥, 그거야 더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나 역시 포기할 생각 따위는 없으니 말이야.”
사하가 몸을 돌려 카일이 사라져간 방향으로 황급히 달려나갔다. 어차피 외길이라 그들이 갈 곳은 명확했다.
“우리도 쫓아가요.”
베아츠를 향해 급히 말하며, 에밀리아가 사하의 뒤를 바짝 뒤쫓았다. 그 시각 카일 역시 이젠 어느 정도 부상을 회복했는지 제법 안정된 모습으로 달리고 있었다.
“아시는 분입니까?”
“전혀 모릅니다만 누군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하얀 지팡이와 순백의 기운 모두 농도 짙은 신성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신전과 연관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예상했던 대로 신전에서도 자신의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여깁니다.”
한참을 달려가던 터그와 카일의 앞쪽에서 로딘이 달려 나왔다.
“어서 가시죠. 벨하크 님과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먼저 출발한 게 아닙니까?”
카일이 깜짝 놀라 물었다.
“약간의 문제가 있어 출발이 늦었습니다. 일단 함께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로딘이 급히 카일을 끌고는 길옆 작은 수로 안으로 향했다.
“외부로 통하는 수로라고 합니다. 평소엔 밀수를 위한 통로로 사용된다고 하더군요.”
“밀수?”
“에일 남작가가 이렇게 갑자기 성장한 이유가 단순히 국경경비대에 무기를 납품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설마… 남작가가 직접 밀수에 가담했단 말인가?”
“직접 가담했다는 정황은 없습니다. 다만 은연중 방치했거나 밀수 조직의 정점에 남작가의 인물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로딘이 벨하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제법 상세하게 전했다.
“스승님께선 어떻게 이 사실을 아시는 거지?”
“그야 밀수의 주요 물품이 바로 무기였으니 모를 수가 없지.”
“스승님!”
좁은 수로를 빠져나오자 벨하크와 이엘, 시안느가 카일을 반겼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카일이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휴, 좀 문제가 생겼다. 날 도와주던 녀석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도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그 녀석들이 사라진 것도 알아채지 못했을 거다.”
“혹, 밀수를 하던 사람들입니까?”
“그래, 이곳 역시 밀수를 하던 통로다.”
“누군가 밀수에 가담했던 자들을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아마도 남작이 밀수단은 더 이상 필요 없다 판단한 모양이다.”
“그보단 제국과의 전쟁 전 혹시 모를 분란을 피하려는 것일 겁니다. 어차피 전쟁이 일어나면 한동안 밀수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아마도 곧 스승님께도 암수가 뻗쳤을 겁니다.”
“나야 밀수에 직접 가담한 적도 없다. 그저 대장장이들이 만든 무기들 일부를 모아 넘겼을 뿐이다. 크게 문제가 되겠느냐? 난 왕실에서 작위까지 받았다. 증거도 없이 날 잡을 순 없어.”
벨하크의 말에 이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영주가 직, 간접적으로 밀수에 가담했다면 벨하크 님을 잡을 증거정돈 얼마든지 가지고 있을 거예요. 오히려 남작이 밀수를 포기하고 일을 벌인 건 벨하크 님과 대장장이들을 잡으려는 수작일 수 있어요.”
“나와 대장장이들을? 굳이 이 늙은이와 대장장이들을 잡아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랬다간 오히려 영지의 주 수입원인 무기생산에 차질을 입을 텐데?”
“아니죠. 오히려 영주는 밀수 때보다 더 큰 이득을 볼 거예요.”
이엘의 단호한 말에 벨하크가 굳은 얼굴로 이엘을 돌아보았다.
“무슨… 뜻이냐?”
“밀수는 중죄에요. 발각당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어요. 더구나 적국인 제국과의 밀수라면 말할 것도 없죠.”
“비록 밀수를 했다고는 하지만 제국과 밀수를 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벨하크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부정했다.
“하지만 이곳은 제국과 인접한 영지입니다. 제국이 아니라면 어디와 밀수를 한단 말입니까?”
“여기서 물길을 따라 북으로 보름 정도 올라가면 죽음의 호수가 나온다.”
“아! 투르 공국!”
죽음의 호수는 투르 공국 안에 있는 거대한 담수호였다.
“아니 분명 영주는 벨하크 님과 대장장이들이 제국과 밀수했다고 몰아붙일 거예요. 어쩌면 실제 제국과 밀수한 적도 있을 수 있죠.”
“고작 나와 대장장이들을 잡겠다고 그런 일을 벌인단 말이냐?”
“고작이 아니에요. 실제 에일 영지의 주 수입원은 무기 납품이죠. 하지만 대부분의 수입은 대장장이들에게 돌아갈 뿐 영주가 얻는 건 고작해야 무기판매로 벌어들이는 수입의 3할도 안 되는 세금이죠.”
“그거야 오래전 우리 대장장이들의 정착을 원했던 선대영주가 내어놓은 조건이었다.”
“맞아요. 하지만 이미 오래전 일이죠. 지금의 에일 영주는 그걸 부당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만약 대장장이들이 밀수를 단행했다면 어떨까요.”
“…죽일 생각이 없다면 재산을 몰수한 뒤 모두 노예로 삼겠군.”
카일이 이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카일의 말대로 대장장이들을 모두 노예로 만든다면 에일 영주는 힘 하나 안들이고 막대한 수입을 고스란히 자신의 주머니로 챙길 수 있었다.
“이… 배은망덕한!”
벨하크가 분노한 듯 손을 떨었다.
“하지만 당장은 벨하크 님이나 대장장이들에게 손을 댈 수 없을 거예요.”
“음… 제 생각엔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일을 마무리하려 할 것 같은데요?”
이엘의 말에 카일이 반문했다. 죽어 가던 벨하크의 눈에서 일어난 묘한 기대감이 오히려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걱정 말아요. 에일 영주는 당분간 절대 움직일 수 없어요.”
이엘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