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추격대(7)
“오러… 블레이드.”
도문트가 창백하게 굳어진 얼굴로 주춤 물러났지만, 흑기사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서며 검을 치켜들었다.
“죽어라!”
흑기사의 검이 도문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꽈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흑기사가 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하늘 위를 올려보았다.
쉬익-
하늘 위에서 선회하던 와이번 한 마리가 날개를 급격히 접어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흑기사를 향해 들고 있던 스피어를 던졌다.
꽈앙-
가속력까지 붙어 떨어지는 스피어를 향해 흑기사가 오러블레이드를 휘두르자 또다시 엄청난 폭음과 함께 흑기사의 신형이 또다시 주춤 물러났다.
“왜… 날 도와주는 것이지?”
도문트가 펠론 자작을 돌아보며 물었다.
“듣지 못했나? 놈은 너뿐 아니라 여기 있는 우리 모두를 죽일 거다.”
펠론 자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멀어져 가는 사하와 10호를 바라보았다. 당장 저 둘을 쫓고는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도문트와 그의 부하들의 죽음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도, 당장 도문트의 도움 없이는 흑기사를 상대할 수 없는 자작의 입장에선 그들의 위기를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흑기사를 상대할 동안은 당신들을 공격하지 않겠다.”
“큭, 잠시만 휴전이란 건가? 우린가 그냥 도망치면 어쩌려는 거지?”
“하늘에 세 마리의 와이번이 있다. 흑기사를 공격하는 와이번은 둘, 남은 한 마리는 뭘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나?”
펠론 자작의 말에 도문트의 얼굴이 찌푸려 졌다. 자작이 말해주지 않아도 도문트는 어렵지 않게 펠론 자작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와이번이 감시하고 있다면 더더욱 도망갈 길이 없다. 굳이 너희를 도울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죽을 거라면 동행이 많을수록 좋고 말이지.”
도문트가 여유롭게 답하자 펠론 자작 역시 도문트의 말에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아니, 너흰 반드시 제안을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적어도 흑기사를 상대하는 동안엔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역시, 백작가의 머리인 펠론 자작이군, 좋아, 제안을 받아들이지. 어차피 당신 역시 우릴 반드시 잡으려 할 테니… 결국 이건 머리싸움이군.”
“일단 흑기사를 상대하며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군. 참고로 말하지, 여긴 백작가의 영역이다. 절대 빠져나가진 못할 거다.”
“과연 그럴까?”
도문트가 천천히 펠론 자작과 멀어지며 로소와 파트에게로 다가갔다.
“부상자들을 최대한 치료해라!”
“네?”
“흑기사를 상대할 동안 잠시 휴전하기로 했다.”
“강력한 공동의 적부터 상대하잔 말이군요.”
“그래, 일단 흑기사를 상대하는 동안 달아날 방법을 생각해 봐. 난 흑기사를 상대해야 하니 모든 건 너에게 맡기겠다.”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 내겠습니다.”
로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문트가 호위기사단과 와이번 나이트의 공격을 여유롭게 받아 내며 오히려 역공을 취하는 흑기사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도문트가 막 달려드는 순간, 갑자기 하늘 위로 뛰어오른 흑기사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향해 강렬한 일검을 내리그었다.
“홀리 월!”
흑기사의 검에 공간이 찢어져나가자 어디선가 다급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은은하고 성스러운 우윳빛 기운의 장벽이 나타나 흑기사의 검을 막았다.
꽈아앙-
마치 빛과 어둠이 힘을 겨루듯 엄청난 기운이 일어나더니, 흑기사의 몸이 주르륵 밀려나며 검은 암흑기운이 수증기처럼 흩어졌다.
“휴… 조용히 지나가려 했는데.”
애밀리아가 아쉬운 듯 사하가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았다.
“쫓아… 갈 수 없다.”
펠론 자작은 흑기사의 말에서 마법사가 지칭한 꼬리의 존재가 바로 저들임을 알 수 있었다.
“성기사단!”
대신전에서 성녀를 보호해야 할 성기사단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뿐이었다.
“대지와 풍요의 여신, 레아의 대리자께서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펠론 자작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신에 대한 믿음이 점점 퇴색되어, 성녀는 더 이상 존중의 대상이 아니었다. 맹목적으로 신의 뜻을 좇는 이들이기에,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와 귀족의 입장에선 오히려 배척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더구나 성녀는 신탁이 내려오지 않는 이상 대신전 밖을 나서지 않는다. 즉 지금 성녀의 외유는 신탁이 내려왔다는 뜻과 같았기에 펠론 자작으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어요.”
“영지와 관련된 일이라면 동부를 관장하는 그린넨 백작가의 입장에서 모른 척할 수가 없군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입니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불신에 가득한 펠론 자작의 말에 성녀 에밀리아의 얼굴 위로 착잡한 표정이 어렸다. 언제부터인가 신의 대리자인 성녀의 말까지 믿지 않을 정도로 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레아의 이름을 걸고 제 말엔 어떠한 거짓도 없어요.”
신의 이름을 걸고 말한 이상 펠론 자작도 더 이상은 성녀의 앞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비록 신에 대한 믿음이 쇠퇴하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신전을 예우하는 귀족가의 전통이 남아, 그들의 행보를 막지 않는 것이 관례로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성녀의 말을 믿겠습니다.”
“그럼 이만 저희는 물러가겠습니다.”
에밀리아가 펠론 자작에게 고개를 숙인 뒤 기사단장인 헤딩턴을 돌아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흑기사를 바라보는 헤딩턴의 눈엔 이미 새파란 살기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성녀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흑기사의 목에 검을 들이밀 것만 같았다.
“헤딩턴 님, 잊지 마세요. 저흰 지금 신의 뜻을 쫓고 있어요.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헤딩턴이 애써 살기를 지우며 사하가 사라져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앞을 흑기사가 다시 막아섰다.
“물러나라! 악의 종자!”
헤딩턴의 흑기사를 노려보며 검을 뽑았다.
“이거 상황이 재밌어지는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문트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변수가 늘어날수록 이곳을 빠져나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펠론 자작 역시 성기사와 성녀의 도움을 받아 흑기사를 처리할 수 있다면 오히려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다만 에밀리아만이 한발 앞서 사라진 암흑 사제를 걱정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헤딩턴 님.”
에밀리아가 헤딩턴을 재촉했지만, 앞을 막아선 흑기사로 인해 헤딩턴 역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럴 것이 아니라 저희를 도와 흑기사를 먼저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펠론 자작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멈춰선 에일리아를 보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가가 물었다.
“그건….”
“성녀, 어차피 녀석을 처리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시잖아요.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다간 자칫 신의 뜻을 완수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에밀리아의 말에 헤딩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사악한 암흑 사제,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베아츠!”
헤딩턴의 부름에 뒤에 서 있던 젊은 성기사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성녀를 모시고 먼저 출발해라!”
“네?”
“지금으로선 이 방법뿐이다.”
헤딩턴이 당황한 표정의 베아츠를 뒤로하고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흑기사를 처리하고 곧장 합류하겠습니다.”
“휴… 어쩔 수 없군요. 무디 무사히 돌아오세요.”
“죄송합니다. 성녀”
헤딩턴이 깊이 고개를 숙이더니 베아츠를 바라보았다.
“성녀를 목숨으로 지켜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은 필요 없다. 반드시 시켜라!”
헤딩턴이 다시 한번 강조하자 베아츠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키겠습니다. 절 넘기 전엔 누구도 성녀의 곁으로 다가갈 수 없을 겁니다.”
“좋다.”
헤딩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십시오.”
헤딩턴이 성기사들과 독특한 형상의 검진을 구성하며 천천히 흑기사에게 다가가자, 힘겹게 흑기사의 앞을 막아서고 있던 도문트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검진의 한쪽을 맡아줄 수 있겠소?”
“꼭 마법진 같은 구성이군.”
“정확히 보았소. 잠시 몸을 구속하는 결계를 검진으로 구성한 거요. 진의 한 축만 맡아주면 녀석을 묶어둘 수 있을 거요.”
“해보죠.”
도문트가 비어있는 결계의 한자리를 차지하자 흑기사를 둘러싼 성기사들의 몸에서 희미한 신성력이 흘러나와 흑기사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꼭 잡으십시오.”
흑기사의 움직임이 주춤하자 베아츠가 급히 말을 몰아 암흑 사제가 사라진 동북쪽으로 달려나갔다.
* * *
“헉헉….”
카일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춰섰다.
도문트의 검과 부딪치는 순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큰 충격과 고통을 받았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바닥을 기어 건물 잔해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주변에서 기다리던 터그가 달려와 준 덕분에 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터그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안심하십시요.”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터그에게 말한 대로 정말 많이 좋아졌다. 굳어있던 마나 플라워가 도문트와의 검격으로 금이 가며 오러가 새어 나오자, 카일의 오러를 매개로 하던 신성력과 마기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도문트와의 충돌로 입은 내상이 서서히 치료되고 있었다. 물론 상급 엑스퍼트와의 검격을 이 정도로 쉽게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오랫동안 수련한 혼원장으로 내부 깊숙이까지 스며든 오러가 몸을 보호한 것도 있지만, 충돌이 일어나던 순간 오랫동안 익힌 태극권의 원리에 따라 본능적으로 도문트의 검격을 흘려보낸 것 역시 큰 도움이 되었다.
“다시 출발하죠.”
카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 터그의 부축을 받아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던 카일이 이젠 스스로 일어날 만큼 회복된 것이다.
“잠깐, 거기까지.”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카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하!”
“오랜만이군요, 카일.”
깊게 눌러쓴 로브를 걷어내며 사하가 카일을 향해 아름답게 웃었다.
“날 쫓아온 건가?”
“물론이죠. 당신은 이제부터 저와 함께 가야 해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카일의 앞을 막아선 터그가 사하를 향해 라이플을 겨누었다.
“터그, 옛 주인을 벌써 잊었나 보군요.”
“제 주인은 애초부터 사하 님이 아니었습니다. 이젠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흥, 난 아직 믿지 않아요. 분명 모종의 방법으로 천공탑을 빼앗은 것이 분명해요.”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합니까? 천공탑에 대해선 저보다 사하가 더 잘 알 거라 생각합니다.”
“그건… 아직 확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것 역시 당신과 함께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 말이에요.”
“쉽지 않을 겁니다.”
“당신 몸 상태는 이미 정상이 아니에요. 과연 날 막을 수 있을까요?”
“제가 아니라도 당신을 막을 방법은 얼마든지 있죠.”
카일의 말이 터그를 돌아보았다.
피익-
터긔의 입에서 날카로운 새소리가 울렸다.
타앙-
낮은 폭음소리와 함께 사하의 발치에 탄환이 박혔다.
“아가씨!”
10호가 급히 사하의 앞을 막아섰다.
“이놈! 죽고 싶은 것이냐?”
카일이 가면을 쓴 10호를 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10호? 설마 사하가 암흑 상단과 연관이 있는 줄은 몰랐군.”
“당신… 날 아나?”
10호가 카일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만난 듯했지만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 얼굴은 처음 보겠군.”
카일이 피식 웃으며 품 안에서 동패 하나를 꺼내 던졌다.
“아! 조세츠 자작!”
동패를 보던 10호가 그제야 카일을 기억해 냈다.
“이렇게 만나서 아쉽군.”
“나야말로.”
“아가씨께선 좋은 분이시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난 누구의 밑에 들어갈 체질이 아니라서 말이야.”
카일이 터그와 함께 뒤로 물러나며 말을 이었다.
“날 따라오면 부득이한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는 없어. 그러니 쫓아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따위 마법으로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글쌔? 단순한 마법이 아니라면 어떨까?”
“아직도 암흑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군요.”
사하가 지팡이를 바닥에 꽂았다. 순간 검붉은 기운이 사하를 중심으로 넓게 퍼지며 기묘한 마법진이 카일과 터그를 덮쳤다.
“마법으로 라이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얼마 전 도문트의 부단장인 고프 역시 마법진을 이용해 탄환을 막으려 했지만, 그것으로는 순수한 물리력을 이용한 탄환을 막아내지 못했다.
“글쎄? 라이플이란 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볼까?”
사하가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타앙-
이번에도 짧은 폭음이 일더니, 날아온 총탄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 마법진은 마법뿐 아니라 능력도 막아주죠. 어때요. 이번엔 제가 이긴 것 같지 않나요.”
사하가 밝게 웃으며 10호와 함께 또다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갑자기 강렬한 기운이 다가와 마법진과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홀리필드!”
신성력을 이용해 일정한 구역을 정화하는 신성 마법으로, 마기를 주축으로 하는 암흑 마법진과는 상극이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