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추격대(6)
”빌어먹을! 모두 피해!”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도문트가 급히 외치며 밖으로 달려나가자 주변의 용병들과 신분을 위장한 검은 여우들이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꽈아앙-
순간 엄청난 폭발과 함께 커다란 돌을 쌓아 만든 3층짜리 프림로즈 건물이 폭삭 무너져 내리며 사방으로 뿌연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비, 빌어먹을!”
폭발의 여파로 바닥을 뒹군 도문트가 아직도 충격을 이기지 못했는지 고개를 흔들며 바닥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크악-!”
그때였다. 갑자기 들려온 비명에 도문트가 급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이런 개자식!”
뿌연 먼지 사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용병의 머리 위로 대검이 스치며 지나갔다. 먼저 건물을 빠져나온 카일이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용병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도문트가 급히 검을 뽑아 들고 카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 죽여버리겠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도문트의 검이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상급 엑스퍼트를 상징하는 강렬한 오러 소드였다.
“기다리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용병의 목을 쳐낸 카일이 달려오는 도문트를 향해 뛰어오르며 일거에 산을 갈라버릴 듯 대검을 내려쳤다.
꽈앙-
카일과 도문트의 검이 부딪히는 순간, 카일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날아가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 처박혔다.
“크윽-!”
도문트가 검을 든 손을 내려다보았다.
카일의 검과 부딪히는 순간 일어난 강렬한 충격파를 견디지 못하고 손바닥이 찢어져 버린 것이다.
“젠장!”
도문트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털어내며 카일이 처박힌 잔해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싸늘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하급용병대의 대장이 상급 엑스퍼트였다니…!”
“펠론 자작…!”
도문트가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한 기사단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상황이군.”
갑작스럽게 일어난 강력한 폭발에 프림로즈 안에 있던 용병들 대부분이 폭사 당하고, 창문을 통해 겨우 탈출한 용병들 역시 태반이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백작가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들만 모였다는 호위 기사단 입니다.”
로소가 다친 팔을 부여잡고 도문트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폭발을 피해 창문을 뚫고 무사히 건물을 빠져나왔지만, 건물이 폭발하며 날아든 파편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호위기사단까지 동원했다면 이미 우리의 정체가 탄로 났다는 말이군.”
파트가 걸어와 로소의 다친 팔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괜찮냐?”
“죽을 정돈 아니다. 그러는 넌, 피난다.”
로소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파트는 대수롭지 않은 듯 팔을 툭툭 털어버렸다.
“그냥 좀 스쳤다.”
“하긴 어련하시겠어?”
로소가 고개를 저었다.
“돌파해야 합니다.”
“따라올 수 있겠느냐?”
도문트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엑스퍼트를 넘어선 강자들이지만 대부분이 폭발이나 무너진 잔해로 심각한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저희들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뒤따라 가겠습니다.”
로소가 검이 빠지지 않게 가죽끈으로 단단히 동여맸다.
“나… 혼자 빠져나가란 말이냐?”
“아직 경비대에 남은 부하들은 잡히지 않았을 겁니다. 서둘러 구해내려면 대장이 먼저 가셔야 합니다. 여기서 지체했다간 녀석들까지 무사하진 못할 겁니다.”
파트 역시 도문트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지금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상급 엑스퍼트인 도문트가 유일했다.
“항상 말씀하신 대로 냉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십시오.”
로소 역시 파트의 옆에 서자 부상을 당해 쓰러져 있던 부하들이 하나 둘 로소와 파트의 뒤에 늘어섰다.
“지겨운 자식, 마지막 순간까지 옆에 있는군.”
“큭, 멍청한 녀석, 그걸 이제야 알았냐?”
로소가 웃으며 파트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 펠론 자작을 비롯한 호위 기사들 역시 단단한 포위망을 형성하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녀석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부관이 다가와 펠론 자작에게 말했다.
“쐐기 진형이군.”
용병들의 진형을 보며 펠론 자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단순한 진형이지만 실력만 받쳐 준다면 가장 확실한 돌파진형이기도 했다. 더구나 놈들이 뿜어내는 기세 또한 하급용병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큰일 날 뻔 했군.”
곧 있으면 전쟁이다. 도문트 용병대는 오랫동안 백작가와 계약을 맺고 국경을 수비해 오면서 상당한 신뢰를 쌓은 몇 안 되는 용병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사실은 몇 년 동안 하급용병 행세를 하며 철저하게 힘을 감추고 있었다니. 만약 이들이 전쟁 중 기습이라도 했다면 백작가로서는 정말 끔찍한 상황에 처할 수밖엔 없었을 것이다.
“저들을 절대 살려 보내선 안 돼.”
“걱정 마십시오. 에일 남작가에도 지원 요청을 해놓았으니 살아서 성을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겁니다.”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펠론 자작의 얼굴은 전혀 밝지가 않았다. 펠론 자작이 이곳에 온 이유는 카일과 이엘을 찾기 위해서였고, 조금 전엔 머물렀던 여관까지 확인한 뒤였다. 그런 그를 충격에 빠트린 건 후계자를 상징하는 인장 반지와 함께 새롭게 내세운 신분이었다.
‘스파더 가의 후계자.’
스파더 가문이 왕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중요가문 중 하나란 것은 몇몇 고위 귀족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가문의 후계자를 그린넨 백작의 명으로 자신이 직접 독을 먹여 폐인으로 만들었다. 만약 이 사실을 왕실에서까지 알게 된다면 백작가로서도 대단히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도문트 용병대를 놓아두고 남작과 이엘을 찾을 수는 없었다. 전쟁을 앞둔 백작가로선 내부에 암약하는 세력 또한 반드시 척결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더불어 조금 전 도문트와 대결을 벌인 사람은 분명 마일론 남작이었다. 두 사람이 충돌하는 순간 무너진 건물 잔해로 날아가 버려 생사를 알 수는 없지만 그를 찾기 위해서라도 도문트 용병대와의 전투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항복하라! 항복하면…!”
“항복, 어림도 없는 소리. 우리 제국 기사들이 쉽게…!”
퍼억-
파트가 펠론 자작을 향해 버럭 소릴 지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대검이 펠론 자작을 스치듯 지나 파트의 발치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헉-!”
파트가 거대한 대검에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지만, 장작 대검의 등장에 가장 놀란 사람들은 바로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호위 기사들이었다.
“흑기사다.”
대검을 알아본 호위 기사의 외침에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기사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철컹철컹-
특유의 금속음과 함께 멀리서 검은 금속 갑주를 입은 흑기사가 걸어오자 도문트 용병대를 포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당황한 듯 주춤 물러나며 곧 옆으로 비켜섰다. 이미 백작 성에서 흑기사의 위력을 실감한 호위 기사들이 감히 덤벼들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도문트 용병대에겐 지금이야말로 이곳을 빠져나갈 가장 완벽한 기회였다.
“가자!”
로소가 파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소 위압적인 기세를 뿜어내며 포위망을 넘어 유유히 걸어 들어오는 흑기사로 인해, 정면을 포위하던 기사들의 포위망이 흐트러졌기 때문이었다.
“선두는 나다.”
로소의 말에 파트가 검을 뽑아 들곤 가장 먼저 흑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흑기사는 이미 대검을 날려 양손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대단한 검사라고는 해도, 무기가 손에 쥐어져 있지 않다면 피스트 워리어가 아닌 이상 맨손으론 제대로 오러를 발현하기 힘들다. 파트는 흑기사를 쓰러트릴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죽어라!”
높게 뛰어오른 파트의 검이 흑기사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순간 흑기사가 비어있는 손을 들어 떨어져 내리는 검을 향해 뻗었다.
꽈드득-
“헉-!”
파트가 경악한 얼굴로 흑기사를 바라보았다. 푸른 빛 오러로 물든 검을 흑기사가 맨손으로 가볍게 잡아내더니 오히려 파트를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멍청아! 검을 놔!”
로소가 흑기사에게 끌려가는 파트를 향해 급히 소리쳤다. 곧 로소는 흑기사의 측면으로 돌아가며 검을 찔러 넣었다. 파트의 몸에 가려진 사각지대를 노린 절묘한 한 수였다. 하지만 흑기사는 그의 움직임을 짐작이라도 한 듯 파트를 가볍게 밀어 로소의 공격을 막아낸 뒤 두 사람을 스쳐 지나며 바닥에 박힌 대검을 뽑아 가볍게 휘둘렀다.
촤악-
채찍 소리와 같은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흑기사를 향해 달려 들던 용병 하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양분되며 바닥에 처박혔다. 아무런 기운도 담겨있지 않은 단순하고 평범한 검격에 당했다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보통 놈이 아니다.”
가장 먼저 흑기사의 실력을 알아본 도문트가 굳은 얼굴로 흑기사의 앞을 막아섰다.
“대장!”
“아무래도 여길 빠져나가긴 쉽지 않을 것 같구나!”
도문트의 말에 로소와 파트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졌다. 수년을 함께 해오면서 지금처럼 긴장된 도문트의 얼굴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흑기사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흑기사는 앞을 막아선 도문트에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그를 아랑곳 않고 똑바로 걸어갔다. 도문트가 주춤 물러섰다. 저도 모르게 흑기사의 기세에 밀려난 것이다.
“빌어먹을!”
기세에 밀렸다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린 도문트가 흑기사를 향해 오히려 한 걸음 다가서며 오러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강렬한 오러가 검신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며 위축되었던 도문트의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자신을 향해 걸어오던 흑기사가 걸음을 멈추자 그는 얼굴 위로 승기를 잡았단 자신감까지 피워 올랐다. 하지만 그런 도문트의 생각과는 달리, 흑기사의 시선은 처음부터 도문트나 용병들이 아닌 무너진 건물의 잔해, 정확히는 도문트와 검격을 겨루던 카일이 처박혔던 곳으로 향해 있었다.
“사라… 졌다.”
흑기사가 고개를 돌려 멀리 성벽 위를 바라보며 어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꽝-
그때였다. 갑자기 날아든 도문트의 검격에 흑기사가 뒤로 주춤 물러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딜 보고 있는 것이냐?”
도문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흑기사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오던 흑기사가 이제는 주변을 포위한 용병들은 물론 자신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녀석들”
그때였다. 흑기사가 서 있던 하늘 위로 검은 기류들이 뭉치더니 그 속에서 두 사람이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바로 사하와 10호였다.
“마법사!”
도문트의 외침에 용병들이 주춤 물러났다. 전투에 직접 나서는 전투 마법사들이 극히 희박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특히 강력한 가드와 함께 있는 마법사는 더욱더 위험했다.
“없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하가 곧장 건물 잔해로 뛰어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주변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 역시도 무너진 잔해에 처박히던 카일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기에 흑기사를 보낸 것이었다.
“여길 보십시오.”
사하의 옆으로 다가온 10호가 주변을 살피더니 한곳을 가리켰다.
“바닥이 쓸린 자국입니다. 아마도 녀석이 바닥을 기어 잔해 속을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추적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추적술에서 절 따라올 자는 없습니다.”
10호의 말에 사하의 얼굴이 밝아졌다. 맞다. 10호는 추적술 하니만큼은 따를 자가 없다.
“좋아! 빨리 찾아.”
사하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10호가 급히 흔적을 추적하며 걸음을 옮기자, 사하 역시 그를 쫓아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춰 도문트를 한차례 노려보더니, 흑기사에게 말했다.
“아무도 쫓아오지 못하게 쓸어버려! 꼬리 달고 다니기도 이젠 귀찮아!”
사하는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보더니 고개를 돌려 흔적을 쫓고 있는 10호를 향해 달려갔다.
“모두… 죽인다.”
사라져가는 사하를 뒤로 하고 흑기사가 검을 들어 올리자 검은 불길이 대검을 휘감더니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