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추격대(5)
“얼마 전 야영을 하던 중 도문트 용병대로부터 습격을 당했습니다.”
“설마 네가 판 검들이?”
“녀석들 처리하고 얻은 것들입니다.”
“그럼 설마 가지고 있던 브로드 소드가 부단장의 검이냐?”
“그걸… 어떻게?”
“도문트란 녀석이 검을 만들려는 이유가 바로 그 부단장이란 녀석 때문이다. 실력은 떨어지지만 가지고 있는 검이 대단한 명검이라 쉽게 녀석을 상대할 수 없어 검을 만들려는 것이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둘 사이가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펠론 자작이 곧 이곳으로 들이닥칠 겁니다. 일단 여길 피해 가는 것이 좋겠군요.”
카일이 고개를 돌려 벨하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곧 펠론 자작이 찾아와 저희를 찾을 겁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해 주십시오. 그럼 스승님께선 무사하실 겁니다.”
“나더러 제자를 팔아먹으란 말이냐?”
“팔아먹다니요. 그저 사실을 말씀하시면 됩니다.”
카일의 말에 벨하크가 고개를 저으며 잠시 고민을 하더니 카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성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외성 전체가 포위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포위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곳이 있다.”
“아! 그곳이 있었군요.”
벨하크의 말을 곧장 알아들은 이엘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어린 처자가 그곳을 알다니 의외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제국으로부터 동부를 지켜주는 든든한 천연의 방벽인걸요. 하지만 그곳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다고 알고 있어요. 일전에도 제국의 수 많은 병사들도 그곳에서 떼죽음을 당했잖아요.”
“그야 대규모 병력이 들어 왔을 때고, 소수 인원이 당분간 숨어 있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지.”
“흠… 그렇긴 하군요.”
벨하크의 말에 이엘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곳이라면 당분간 숨어 있기에 알맞은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규모 인원으론 침입할 수 있는 곳이라 병사들이 상주하고 있어.”
“잠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군요.”
벨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이걸 쓰면 될 거예요.”
이엘이 카일에게 주머니를 내밀었다. 멀린 마법사가 건네준 다섯 개의 수정구 중 남은 세 개의 수정구였다. 잠시 수정구를 바라보던 카일의 눈가에 희미한 빛이 어렸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카일이 수정구 하나를 집어 들며 벨하크를 돌아보았다.
“여기 두 사람을 그곳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널 두고 어딜 간단 말이냐? 그럴 순 없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안전하게 돌아가겠습니다. 더구나 여기 두 사람은 제게도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스승님께서 지켜주십시오.”
의아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는 이엘과 시안느에 벨하크의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둘이라… 그렇다면 이 늙은 스승이 제자를 힘껏 도와야겠지. 그럼 넌 어쩔 생각이냐?”
“펠론 자작에게 절 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시킬 생각입니다.”
카일이 등 뒤로 매고 있던 브로드 소드와 단봉을 꺼내 들어 능숙하게 조립했다. 만든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검을 실험할 시간이 온 것이다.
* * *
“저곳, 확실해? 며칠 전 같이 실수하면 이번엔 정말 가만있지 않을 거야!”
사하가 요사스런 붉은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10호를 노려보았다. 며칠 전 잘못된 정보를 물어온 10호 덕분에 사하와 흑기사가 이틀 밤낮을 달려 왕성으로 가다 다시 돌아온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합니다. 팰론 자작이 직접 기사들을 이끌고 바삐 달려왔으니 분명 저곳에 그 녀석이 있을 겁니다.”
확신에 찬 10호의 말에 사하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번 더 믿어보겠어!”
사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10호의 눈동자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저곳에 있을 겁니다.”
사하가 몸을 일으켜 언덕을 내려가자 10호와 흑기사가 그녀의 뒤를 따라 에일 남작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팰론 자작의 뒤를 쫓아 에일 영지까지 찾아온 사하도 누군가 자신들의 뒤를 쫓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단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암흑마법사. 역시 그들도 그분을 쫓고 있었군요.”
투명한 장막이 걷히고 순백의 여인과 그녀를 둘러싼 기사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명만 내려주신다면 마왕의 종자들을 일거에 섬멸하겠나이다.”
한쪽 무릎을 꿇은 중년의 기사 헤딘턴이 에밀리아 성녀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신을 부정하고 악에 물든 암흑 사제를 정화하는 건 성기사로서 당연한 의무이지 책무였다.
“그녀의 곁엔 강대한 어둠을 간직한 기사가 함께하고 있어요. 그를 상대할 수 있나요?”
“모든 성기사는 신의 뜻에 따라 영예로운 성전에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기사단을 이끄는 헤딘턴의 말에 에밀리아가 아파오는 머리를 눌렀다. 이 고지식한 성기사가 암흑 사제와 흑기사를 보는 순간 섬멸해야 할 강대한 적을 만난 듯 검을 뽑아 달려들려는 것을 달래 겨우 여기까지 왔지만, 이젠 에밀리아도 서서히 인내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당신의 행동은 옳지 않아요.”
“무슨 말씀입니까? 악을 멸하는 일이 어찌 옳은 행동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지금 그대의 사명은 신탁에 따라 세상을 구원할 성기사를 찾는 일이지 본분을 망각하고 암흑 사제와 암흑기사들을 쫓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악한 것을 정화하는 것 역시 우리 성기사들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신탁보다 우선할 수 없어요.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암흑 사제보다 먼저 그분을 찾는 거예요.”
에밀리아의 단호한 말투에 헤딩턴이 깊게 고개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성녀. 모든 것은 그분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입니다.”
“단장님만 믿겠어요.”
에밀리아가 부드럽게 헤딩턴을 달래듯 말했지만, 사실 그녀는 그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 자제심을 잃고 암흑 사제를 향해 돌진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 * *
“대장, 왜 그냥 오신 겁니까? 이번이 아니면 더 이상 벨허크의 검을 얻기는 힘들 겁니다.”
부관인 로소의 말에 도문트의 얼굴엔 오히려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저 고집불통 영감을 제어할 수단이 생겼는데 굳이 먼 길을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네?”
“지금껏 내가 벨하크에게 집착한 것은 그의 검이 그만큼 특별하기 때문이었다. 전쟁만 아니라면 더한 공을 들여서라도 그가 만든 검을 얻고 싶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영감과 담판을 짓기 위해 가신 것 아니었습니까?”
“맞다. 강압적인 방법으로라도 그 영감에게서 검을 얻어내려 했지. 하지만 그건 약점 하나 없는 벨하크를 상대할 때나 써먹을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도문트가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아! 벨하크의 제자를 이용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녀석만 손에 넣는다면 벨하크도 꼼짝없이 내 말을 들을 수밖에는 없을 거다.”
도문트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술잔을 들어 올렸지만, 이어진 퍼트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제가 가서 당장 놈을 잡아 오겠습니다.”
“놈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아직 대장장이 골목에 있지 않겠습니까?”
“하… 그래서 놈을 어떻게 데려올 생각이지? 놈이 순순히 따라온다면 몰라도, 거부할 수도 있지 않나?”
“걱정 마십시오. 적당히 두들기면 순순히 따라올 겁니다.”
퍼트가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듯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문트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 졌다.
“무식한 녀석!”
“뭐! 로소, 죽고 싶냐!”
퍼트가 로소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로소는 퍼트의 위협에도 전혀 겁을 먹지 않은 듯 오히려 한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대낮에, 그것도 용병들이 득실거리는 대장장이 거리에서 용병을 납치하겠다고? 제정신이냐? 아예 우리가 범인이다 길드에 가서 자백하지 그러냐?”
“그건….”
퍼트가 로소의 힐난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에일 영지는 도문트 용병대가 자주 찾는 국경 인근 영지로 이곳에서만큼은 도문트 용병대를 모르는 용병들이 드물었다. 더구나 대장장이 골목은 좋은 검을 찾거나 수리를 맡기려는 용병들로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맞다. 로소의 말대로 여기서 함부로 놈을 납치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놈이 아이언 용병대 소속인 것이 마음에 걸려.”
“하지만 녀석의 나이는 많아야 20대 초반입니다. 용병대에서의 위치라곤 고작해야 말단용병일 텐데 녀석이 사라진다고 문제 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급용병들이 엄격한 규율을 버티지 못하고 용병대에서 도망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리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네?”
“아이언 용병대의 주축은 마라스 용병대의 전역 병사들이다. 실력이 좀 떨어져도 그들 사이의 유대가 무척이나 끈끈하지. 그러니 녀석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일단 녀석과 함께 온 일행부터 찾아보는 것이 먼저다.”
“그렇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것 있겠습니까? 아이언 용병대는 숫자만 많을 뿐 우리의 상대가 아닙니다.”
파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의 입장에선 고작해야 전역병이 주축인 아이언 용병대를 겁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 머리가 있으면 생각 좀 하고 말하는 게 어때?”
로소가 한심하게 파트를 바라보았다.
“뭐야!”
“아이언 용병대는 3백에 가까운 대형 용병이다. 잊은 거냐?”
“숫자만 많을 뿐 차 한 잔 마실 시간이면 충분히 전멸시킬 수 있다.”
“멍청하긴, 그걸 대장이 몰라서 고민하는 것 같냐?”
“그럼….”
“우린 하급 용병대다. 대외에 알려진 우리의 실력과 숫자론 아이언 용병대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이기는 순간 그린넨 백작가는 우릴 의심하기 시작할 거다.”
도문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도문트 용병대가 지금껏 신분을 감추고 백작가와 장기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건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하급용병들로 이루어진 용병대이기 때문이었다. 영지병보단 강하지만 기사들보단 실력이 떨어져 분란이 생기거나 급박한 전투상황에 놓이더라도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도문트 역시 이런 백작가의 성향을 파악해 지금껏 큰 분쟁 없이 계약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영지의 분란 거리 역시 최대한 피하거나 기사들에게 양보해 왔기에, 지금은 백작가도 도문트의 용병대를 제법 신뢰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놈이 성을 빠져나가는 순간, 최소한의 인원만 동원해 잡는다.”
“일단 녀석의 뒤에 부하들을 붙여 놓겠습니다.”
로소의 말에 도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을 제외한 다른 녀석들은 필요 없다.”
“걱정 마십시오. 최대한 은밀하게 놈을 생포해 국경경비초소로 끌고 가겠습니다. 설령 아이언 용병대에서 우릴 의심한다고 해도 국경초소까진 뒤지지 못할 겁니다.”
국경은 그린넨 백작가의 통행 패를 가진 사람만이 지날 수 있었다. 아이언 용병대가 아무리 3왕자파와 인연이 있다고 해도 백작 관할의 국경초소까지 뒤질 수는 없을 것이다.
“좋은 생각이군. 이번 일은 로소 너에게 맡기겠다.”
도문트의 말에 로소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마십시오.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로소가 환하게 웃으며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파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런 로소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꽝-
굉음과 함께 단단히 닫혀있던 문짝이 터져 나가며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안으로 난입했다.
“넌!”
가장 먼저 사내의 정체를 알아본 로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보는군.”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도문트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도문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하하, 이거 미안하게 됐군. 나도 의뢰를 받은 처지라 어쩔 수 없어서 말이야.”
“의뢰?”
“이곳에 수상한 자들이 몰려있다고 하더군.”
“그럴 리가? 이곳 프림로즈는 우리 도문트 용병대가 모두 빌린 곳이다. 설마 그 수상한 자가 우릴 뜻하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카일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도문트 용병대는 그린넨 백작가와 장기 계약을 맺고 국경을 수비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제법 알려진 용병대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군.”
“착오라니? 그럴 리가 없다.”
“무슨 뜻이냐?”
“이곳이 여우굴이란 사실을 알고 왔다는 말이지.”
카일의 말에 프림로즈 안에 있던 사람들의 동작이 일순 멈췄다.
“여우… 굴”
여우굴은 검은 여우들이 거점을 부르는 은어였다.
“…이미 알고 왔다는 뜻이군.”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어떻게 알았지? 수년을 이곳 동부에서 보냈지만, 의심을 살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도문트의 말에 카일이 검을 들어 도문트를 가리켰다.
“아무리 완벽한 조직에도 배신자는 있기 마련이지.”
“고프의 검… 설마 백작가에서 벌어진 일들이…!”
“백작 성에서 암약하던 검은 여우들은 모조리 소탕했다. 이젠 감춰진 타격대를 처리할 시간이지.”
“우리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군. 설마 아이언 용병대가 붉은 거미 소속이었나?”
“거미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그대 정도면 알고 있지 않나?”
“위장 신분이란 말이군, 하지만… 벨하크는 어떨까? 그도 위장한 스승인가?”
도문트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지만, 곧 냉정을 찾은 듯 차갑게 돌아왔다.
“널 죽여야 할 이유가 늘었군.”
카일이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피익-
“드디어 왔군.”
굳어있던 카일이 갑자기 씨익 웃으며 품 안에서 수정구 하나를 꺼냈다. 그는 곧 그걸 바닥에 힘껏 던지더니, 부서진 문을 통해 황급히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