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추격대(3)
땅-
따앙-
“지독한 놈!”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힘껏 망치질하는 사내를 노려보며, 노인이 낮게 중얼거렸다. 어제저녁 무렵 갑자기 찾아와 대장간을 차지한 녀석이 무려 하룻밤 동안 쉬지 않고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숙련된 대장장이라도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망치질을 할 수는 없었다. 단단한 금속을 내려치는 순간 밀려오는 반탄력이 쌓여 자칫 근육이 찢어지는 큰 부상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처음 그대로의 일정한 속도와 강도를 유지하며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즉 사내는 아직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타고난 대장장이야. 불을 다루는 기술하며 신들린 망치질까지, 어디서 저런 자가 나왔을까.”
대장간 구석에 앉아 사내를 바라보는 대장장이들의 낮은 목소리가 소리가 노인의 귓가에 들려왔다.
‘멍청한 녀석들, 망치질이나 불을 다루는 기술은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바로 끈기과 집중력이다. 저런 건 타고나야 해.’
노인은 대장장이들의 말소리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들의 대화에는 관심이 가는지 점점 더 귀를 기울였다.
“검을 다룬다고 들었는데, 누구에게 저런 걸 배웠을까?”
“지난번 찾아온 용병에게 들었는데, 간혹 자기가 쓸 검을 직접 만드는 괴짜 녀석들이 있다던데. 저 녀석도 그렇게 배웠겠지.”
“아무튼 누구에게 배웠는진 몰라도 스승이란 사람도 분명 대단한 자일 거다.”
대장장이들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노인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했다.
그는 평생 불과 싸우며 각종 무구를 만들었고 제법 명검이라 할 수 있는 검들을 만들어내며 이곳 대장장이 골목에서 수장질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가족은 오래전 모두 죽었고 키우던 제자들도 한 달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면서 평생 쌓아온 기술과 비전들이 자신과 함께 모두 사라질 운명에 처하고 만 것이다.
저기 구석에 앉아 멋모르고 떠드는 대장장이들도 모두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데 말이다.
“대단한 자든 아니든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뭔 소리야?”
“명검을 만들고 이름을 남기는 것보단 저런 제자 하나 키우는 게 더 중요하단 소리지. 자고로 스승은 제자로 인해 빛나는 법 아니겠나?”
“허긴, 그렇긴 하지. 검 하나 만들어 이름을 남긴들 얼마나 가겠나? 자신의 뒤를 이어줄 제자 하나 없으면 끝이지.”
대장장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자신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노인은 모른 척 사내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맞는 말이군.”
대장장이들의 속닥거림에 노인 스스로도 동의했다.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모두 맞는 말이니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눈앞에 그 증거가 명확하게 서 있지 않은가?
-스승은 제자로 인해 더 빛난다.-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다. 도망친 제자들을 보며 생각했었다. 저런 녀석들은 필요 없다. 내가 가진 기술과 비전은 능력이 되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니다. 제자는 키우는 것이다. 숯을 자르고 불을 피우는 기초에서부터 하나하나 가르쳐 나가는 것이다. 인내와 끈기가 다소 부족하다 해도, 스승으로서 자신의 뒤를 이어줄 제자들을 소중히 생각해야만 했다.
“하지만 난 이미 틀렸다.”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그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지금부터 어린제자를 찾아 키우기엔 너무 늦었다.
“저 녀석을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 것을”
노인이 아쉬운 듯 웃통을 벗어 던지며 힘차게 망치질하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노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힘껏 내려치는 카일의 눈동자에 작은 희열이 어렸다.
단지 검을 수리하기 위해 시작한 망치질이었다. 이미 카일에겐 드워프 족장에게서 건네받은 한 쌍의 명검이 있었다. 가벼울 뿐 아니라 날카롭고, 오러 소드에도 잘리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단단했다. 빠름을 추구하는 카일에겐 더없이 훌륭한 검이었다. 하지만 이제 카일은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니, 그에겐 가벼운 검보단 제 힘을 온전히 실을 수 있는 단단한 중검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선 고프의 브로드 소드가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망치를 들어 쇳덩이를 내려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망치에서 전해진 충격이 굳어 있던 마나 플라워에 전해졌다. 단순히 미세한 자극에 불과했다.
따앙-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내려치자 거친 불똥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아름다운 꽃을 피웠고, 망치에서부터 시작된 충격이 굳어 있던 마나 플라워를 두드렸다. 순간 닫혀 있던 마나 플라워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이건!’
아주 미세한, 작은 떨림에 불과했지만, 지금껏 수 없는 노력에도 꿈쩍하지 않던 마나 플라워가 움직였다는 것은 카일에겐 더없이 희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커다란 쇳덩이를 쉬지 않고 두들긴 것이!
그리고 드디어 카일에게 작은 결실이 찾아왔다.
꽈앙-
한차례 폭음이 일며 쇳덩이를 힘껏 내려친 카일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무슨일이야!”
“왜 갑자기 폭발이?”
“다친 거 아냐?”
구석에서 카일의 망치질을 구경하던 대장장이 둘이 소란스럽게 호들갑을 떨었다.
“시끄럽다.”
놀란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던 노인이 대장장이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만들 돌아가 잠이라도 자!”
“하지만!”
대장장이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썩 물러가지 못해!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대장장이들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전 괜찮습니다.”
충격을 받은 듯 팔을 이리저리 돌리던 카일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자네가 괘, 괜찮다면….”
“우린… 그만 가보겠네.”
대장장이들이 노인의 눈치를 살피며 아쉬운 듯 몸을 돌려 노인의 대장간을 빠져나갔다.
“저 녀석들이 지금껏 이곳에 있었던 건 네 녀석이 가진 비전의 일부를 볼 수 있을까 해서였다.”
노인이 사라져 가는 대장장이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도 가만있었던 것이냐?”
“멀리서 본다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녀석들이야 모르겠지만 난 다르다. 거리도 훨씬 가까웠다.”
“알고 있습니다.”
“일부러 보여준 것이냐?”
“그저 대장간을 빌려주신 대가라 생각하십시오.”
“대가? 이제 곧 죽을 다 늙은 노인이 그런 건 알아서 뭐 하겠느냐? 필요 없다.”
“제자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카일의 말에 노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 같은 고집 센 늙은이의 화를 받아줄 제자가 있을 것 같으냐? 설령 있다고 해도 허락도 없이 비전을 공개하는 것은 스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스승요?”
“기술을 전수해준 스승이 있을 것 아니냐?”
“그런 것 없습니다.”
“뭐…!”
카일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모루 위에 올려놓은 쇳덩이를 다듬기 시작했다.
“스승이 없다는… 말이냐?”
“어릴 적 마을 대장간에서 기초적인 기술은 배웠지만 고작해야 3년 정도입니다. 그 후에는 독학으로 배웠죠.”
“세상에… 그럼 철을 제련한 기법도….”
“…제가 발견한 겁니다.”
카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강철을 제련하는 기술은 드워프도 몰랐던 것이니 카일이 처음 발견하고 개발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카일의 말을 들은 노인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고작해야 20살도 되지 않아 보이는 어린 녀석이 대륙을 깜짝 놀라게 할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했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제게 기초를 가르쳐준 분도 영지에선 제법 유명했죠. 상당한 합금기술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제겐 합금법을 알려주지는 않으셨습니다. 합금법은 가문의 비전이라 자식에게만 물려줘야 한다면서 말이죠.”
“그럼… 설마 합금법에 대해선 전혀 모른단 말이냐?”
천부적인 대장장이라 생각했던 카일에게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노인도 전혀 생각지 못했다.
“모릅니다. 강철을 만들어낸 것도 합금법을 모르기 때문이죠.”
“아!”
노인이 탄성을 터트렸다. 합금을 모르니 자연스럽게 철에 더 집중할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땅땅땅-
작은 망치로 모양을 잡아가는 카일의 모습에 노인의 눈동자에 작은 빛이 어렸다.
“이름이 뭐냐?”
“네?”
“이름이 뭐냔 말이다. 하룻밤을 꼬박 함께 있었는데도 이름을 모르지 않느냐?”
“아! 정말 그렇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을 행해 고개를 숙였다.
“제 이름은 카일입니다.”
“카일.”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베하크라 한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베하크 님.”
카일이 고개를 숙이자 노인이 잠시 카일을 바라보다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상한 녀석이구나?”
“네?”
“겉으로 봐선 기사로 보이는 데 말하는 것은 용병 같기도 하고, 그러다 망치를 들면 훌륭한 대장장이로 변하니 말이다. 더구나 오러까지 뿜어내는 걸 보니 엑스퍼트인 것 같은데?”
“보셨습니까?”
“눈이 달려있으니 볼 수밖에.”
노인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긴 했지만, 그도 망치를 내려치기 직전 카일에게 희미하게 어린 오러를 보곤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검술을 익혔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엑스퍼트일 줄은 미처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카일의 오러가 다시 돌아온 건 아니었다. 단지 망치질로 인해 마나 플라워에서 떨어져 나온 오러의 파편이 팔찌로 스며들며 쇼크 웨이브 마법이 발동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카일의 표정은 더없이 밝아졌다. 쇼크 웨이브가 내외부에 일으킨 충격으로 마나 플라워에서 더욱더 많은 오러가 떨어져 나와 팔찌로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으론 엑스퍼트가 될 수는 없다고 들었다.”
벨 하크의 말에 카일이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 작업에 열중했다. 운이 좋았다는 말은 오러를 다시 찾을 방법이 생겼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그나저나 저걸 뭘 하려 만든 것이냐? 브로드 소드를 수리하려 한 것이 아니었느냐?”
벨라크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카일이 밤새 쇳덩이를 두들겨 만든 것은 세 뼘 정도 길이의 쇠봉이었다.
“처음엔 검만 수리하려 했습니다만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라 좀 변형시켜 봤습니다.”
카일이 쇠봉을 들어 브로드 소드의 뒷부분에 돌려 끼우자, ‘철컥’ 소리와 함께 한 자루 독특한 형태의 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기는 검보다는 창에 가까워 보였다.
“그걸 전투에서 쓰겠단 말이냐?”
벨하크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카일이 가져온 브로드 소드는 처음부터 일반적인 검보다는 폭이 넓고 두꺼워 중병기에 속하는 검이었다. 여기에 쇳덩이를 두들겨 검 자루까지 늘렸으니 이미 전투에서 쓰기엔 버거운 무게의 검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일은 오히려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가 만족스러운지 벨하크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딱 제가 원하던 무게입니다.”
“…이제 보니 완전 괴물 같은 놈이구나!”
벨하크가 고개를 저으며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카일에게 던졌다.
“검집이다. 대충 손을 봤으니 그런대로 쓸만할 거다.”
“감사합니다.”
카일이 받아든 검집은 기존에 사용하던 낡은 검집에 가죽을 덧대 새롭게 마감한 것으로 제법 정성을 들여 만든 것 같아 보였다. 카일은 능숙하게 검과 쇠막대를 분리한 후 등 뒤로 비끄러맸다.
“이제 가려는 것이냐?”
“일이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같이 온 일행들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카일의 말에 벨하크가 잠시 망설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잠시… 기다려 보거라! 줄 것이 있다.”
벨 하크가 카일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안쪽으로 사라지더니 손때 묻은 작은 책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이걸 가져가거라!”
벨하크가 카일에게 들고 있던 책자를 던졌다.
“이게 뭡니까?”
무관심하게 책자를 넘기던 카일을 보며 벨하크 역시 대수롭지 않은 듯 툭 던지듯 말했다.
“…평생 대장간을 운용하며 얻은 것들을 적어놓은 것이다.”
“평생…!”
책자를 넘기던 카일의 손이 뚝 멈췄다.
“그래, 내 평생 익혀온 기술들이 모두 적혀있다. 이 벨 하크만이 익혀오고 발전시킨 합금법까지 말이다.”
“이건… 노인장이 가진 모든 것 아닙니까? 받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죽으면 가져가지도 못할 물건이다. 더구나 글로만 적은 것이라 다른 녀석들은 제대로 이해도 못 할 물건이야. 그럴 바에야 네가 가져가는 것이 좋을 거다.”
“…하지만 저와 노인장이 만난 건 고작해야 하룻밤에 불과합니다. 절 어떻게 믿고 이런 걸 맡기시는 겁니까?”
“평생을 금속을 두들기며 살아왔다. 망치질 하나만 봐도 네 녀석이 어떤 녀석인진 충분히 알았다. 다만… 부탁이 하나 있구나.”
벨하크가 주름진 눈을 들어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이… 합금법을 사용할 때만이라도 날 스승으로 생각해 줄 수 있겠느냐?”
벨하크가 간절한 눈빛을 띠었다.
“계신가?”
그때였다. 카일이 막 노인을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대장간 안으로 건장한 체구의 용병 서너 명이 들어섰다.
“오랜만이요, 영감.”
“빌어먹을 도문트. 또 왔느냐?”
“말하지 않았소. 검을 만들어 줄 때까지 찾아올 거라고.”
“돌아가라! 네놈처럼 음흉한 놈에겐 만들어 줄 검도 없지만, 만들고 싶어도 손을 다쳐 그럴 수 없다.”
벨하크가 고개를 돌려버리지 도문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벨하크의 손으로 행했다.
“흠… 이상하군. 분명 조금 전까지 망치질 소릴 들었는데 말이야.”
도문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벨하크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