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추격대(1)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네?”
“마차를 탄 이후 줄곧 검만 들여다보며 웃고 있잖아요.”
이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일의 무릎에 놓인 검으로 향했다. 롱소드 두세 개를 나란히 붙여 놓은 것처럼 넓은 검폭이 독특해 보였지만, 투박한 붉은 빛의 검날과 낡고 해진 검집, 손잡이만 보아서는 하급 용병들이나 들고 다니는 싸구려 합금 검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좋은 검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검사로서 당연히 기쁜 일이죠.”
카일이 웃으며 검을 쓰다듬었다.
“제 눈엔 그저 평범한 검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정말 좋은 검이란 말인가요?”
이엘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솔직히 그녀가 보기엔 볼품없는 싸구려 검에 지나지 않았다.
“네, 보기 드물게 잘 만든 검입니다. 검날의 재질은 물론 무게와 길이까지 모두 상당히 공을 들여 만든 검입니다. 검을 만든 대장장이 역시 상당한 실력자가 분명합니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볼품없이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단 말인가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도문트 용병대는 하급 용병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장도 이제 막 중급에 올랐다고 하죠. 그런 용병대에 대단한 명검이 있다고 소문이라도 나 보십시오. 분명 분란이 일어날 겁니다.”
카일의 말에 이엘이 고개를 저었다.
“카일은 잘 모르겠지만… 국경 경비대는 규율이 엄격한 편이라 누구도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을 수 없어요.”
“용병들도 말입니까?”
“누구든 예외는 없어요. 그들에게 높은 보수를 지급하는 것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규칙이기 때문이에요.”
이엘이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스스로 가문을 떠났다고 해도 그녀가 그린넨 백작가의 사람임은 변하지 않았다.
“대단하군요. 용병에게까지 경비대에 준하는 규율을 적용하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란은 일어났을 거라 생각합니다.”
단호한 카일의 말에 이엘의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나보다 힘없고 약한 자가 보물을 가졌다 생각하면 빼앗고 싶어 하는 자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건… 그렇군요.”
이엘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 코퍼 용병대가 카일의 검을 노렸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똑똑-
“카일 님, 에일 영지입니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터그가 작은 창을 두드리며 말했다. 북동부에 위치한 작고 가난한 에일 남작령은 5대 에일 남작이 대장간과 가죽공방을 세우고 국경 경비기사들과 용병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며 차츰 부를 쌓은 곳이다. 그들은 죽은 도문트 용병들에게서 걷어 들인 무기를 팔기 위해 이엘의 제안으로 이곳을 찾았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군요.”
이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문트 용병대를 상대한 이후, 카일과 일행들은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자 밤에 이동하고 낮엔 인적이 드문 숲에서 잠을 청했다. 모두들 제법 지쳐있는 상태였기에, 에일 영지에서만큼은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떠나기로 한 것이다.
“정지!”
마차가 천천히 남작 성에 다가가자 병사 둘이 손을 들어 마차를 세웠다.
“수고하십니다.”
터그가 병사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용병들인가?”
“크레센트 용병대를 이끄는 터그라고 합니다.”
“크레센트 용병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남부에서 올라왔느니 당연히 모를 겁니다.”
“남부? 상당히 먼 길을 왔군, 이곳은 어떻게 온 건가?”
병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터그와 형제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용병들이야 당연히 의뢰를 받고 움직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의뢰? 보아하니 상단은 아닌 것 같은데. 마차엔 누가 타고 있나?”
“서북부 귀족가의 자제분이 타고 계십니다.”
“서북부? 조금 전 남부에서 올라왔다고 하지 않았나?”
“공자께서는 상단과 함께 남부로 내려오셨다가 저희 크레센트 용병대에 의뢰를 넣고 동부 국경 일대를 둘러보고자 오신 겁니다.”
“국경?”
병사들이 경계하며 터그와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그저 참전하시기 전에 국경을 한번 둘러보시려는 것뿐입니다.”
“참전… 아!”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면 제국원정대가 이곳 국경으로 몰려올 것이다. 그전에 참전을 결정한 귀족가의 공자가 국경을 직접 보기 위해 찾아왔다는 말이었다.
“대단하군. 귀족가의 공자께서 직접 위험한 전쟁에 참전을 결정하다니 말이야!”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로 다가갔다.
“잠시 검문을 해야 하니, 마차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병사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마차 안에서 앳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딸깍-
잠겨있던 마차 문이 열리며 단정한 회색빛 시녀복을 입은 소녀와 고급스러운 붉은빛 레더아머의 기사가 나와 마차 옆에 섰다.
“서북부 스파더 남작가의 시안 님이시다.”
커다란 덩치에 대검을 비끄러맨 사내가 마차에서 내려선 미소년을 가리키기 말했다.
“시안 님이시군요. 죄송하지만 신분을 확인할 인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병사의 말에 시안이 당연하다는 듯 가늘고 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밀었다. 커다란 꽃 위에 붉은 거미가 새겨진, 계승 귀족가의 정식 후계자를 나타내는 인장 반지였다.
“아! 가문의 후계자셨군요.”
병사가 더욱 깊이 고개를 숙이며 급히 옆에 있는 병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후계자를 상징하는 인장 반지는 귀족원에 등록된 정식 후계자를 뜻한다. 가문의 후계자는 타 영지에 방문 시 남작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조용히 국경 일대만 살펴보고 돌아가겠네, 남작님껜 봄이 되면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 전해주겠나.”
시안이 병사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시안 님. 남작님께 전해 올리겠습니다.”
“부탁하지.”
시안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귀족 특유의 도도함과 고귀함을 드러내고 다시 마차에 오르자, 시녀와 거구의 기사가 뒤를 따랐다.
“신분을 확인했으니 통과해도 좋네! 묵을 곳은…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벽면을 붉게 칠한 고급여관이 나온다네.”
“감사합니다.”
터그가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마차를 몰아 성안으로 들어섰다.
“훌륭했습니다, 시안 님!”
카일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시안느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카일, 놀리지 말아요. ”
“놀리다니요. 큰일 날 말씀입니다. 호위 기사인 제가 어찌 스파더 가문의 후계자이신 시안 님을 놀릴 수 있단 말입니까? 당치도 않으십니다.”
카일이 두 손을 흔들며 연신 고개를 숙였지만,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 모습에 화가 났는지 시안느가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자, 이엘이 카일을 나무라는 척 말을 걸었다.
“카일 경, 그만 놀리세요. 공자께서 무안해하시잖아요.”
“아, 아가씨….”
“아가씨라니, 그런 말씀 마세요. 공자, 전 그저 공자님의 수발을 드는 시녀일 뿐이랍니다.”
이엘이 고개를 깊숙이 조아리며 말하자 결국 시안느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아가씨가 더 미워요.”
시안느가 더 이상 대꾸하기도 싫은지 눈을 감아 버리자 카일과 이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호호”
두 사람의 웃음소리에 시안느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시안느 경, 놀려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영지에 있는 동안만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실수해선 안 됩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지금처럼 남작가의 후계자로 지내야 할 겁니다.”
“맞아요. 대충 핑계를 대긴 했지만 남작가에서도 시안느 경을 주시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행동이나 언행도 주의해야 해요.”
카일과 이엘이 제법 심각한 얼굴로 말하자 눈을 감고 있던 시안느도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럼 영지에 있는 동안은 계속 남작가의 후계자 역할을 해야 한단 말이군요.”
“맞아요.”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 그럼, 최대한 외부 출입은 자제해야 할 것 같군요.”
시안느가 한숨을 깊게 내쉬고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에 끼워준 반지를 바라보았다. 활짝 핀 꽃 안의 붉은 거미. 분명 정통귀족을 상징하는 인장 반지로 카일이 시안느에게 잠시 빌려준 반지였다. 즉 힐튼 남작에게서 받은 인장 반지가 아니더라도 이미 그는 작위를 물려받을 귀족가의 후계자란 뜻이었다.
“스파더가는 어떤 곳이죠?”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지고 있던 시안느가 돌연 카일을 바라보며 물렀다.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갑작스런 시안느의 질문에 카일이 난처한 듯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도 카일 역시 스파더 가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인장 반지 역시 그저 귀족원에서 만난 빌리어스 공작에게 받았을 뿐이었다.
* * *
“흔적을 찾았습니다.”
집무실로 뛰어 들어온 부관의 말에 펠론 자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냐!”
“북문 동쪽 가문비나무숲 안쪽입니다.”
“북문? 남문이나 서문이 아닌 북문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대규모 전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투라니!”
펠론 자작이 깜짝 놀라 물었다. 서문이나 남문이 아닌 북문을 통해 탈출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지만 숲 안에서 전투가 벌어졌단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설마… 누가 그들을 쫓고 있단 말이냐?”
“정확힌 알 수 없습니다.”
“음… 안 되겠다. 직접 가봐야겠다.”
펠론 자작이 곧장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 흔적이 발견된 가문비나무숲으로 향했다.
“시신들을 바위 밑에 모아두고 이끼로 두텁게 덮어두었다고 합니다. 워낙 교묘하게 감춰져 있어 공중 정찰에도 발견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누가 찾아낸 것이냐?”
“사냥꾼들입니다. 덫을 놓으려다 발견한 모양입니다. 시신은 대략 서른 구 정도 됩니다만, 그중 십여 구는 신체의 훼손이 심합니다.”
“훼손?”
“뜯겨나간 흔적으로 보아 강력한 폭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관이 제법 크게 패여 있는 땅을 가리켰다.
“이곳이 폭발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곳 주변으로 모닥불을 피운 흔적이 있습니다.”
“좁은 간격으로 외곽을 둘렀다면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알아냈나?”
“놈들이 사용한 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덕분에 이곳에 놈들이 머물렀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원거리 아티팩트 말인가?”
펠론 자작의 물음에 부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지런히 놓여있는 시신을 가리켰다.
“지난번 고성을 지키다 죽은 병사들과 기사들에 남은 상처와 일치합니다. 놈들이 이자들을 모닥불가로 끌어들여 원거리 공격으로 전멸시킨 것 같습니다.”
“어떤 아티팩트를 사용했는지 알아냈나?”
“죄송합니다. 여기저기 알아보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부관의 말에 펠론 자작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린넨 백작가는 오랫동안 상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상인이나 상단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접해왔다. 그중 가장 빠르고 정확한 정보가 필요한 것이 바로 마법 물품이었는데, 지금 상계에도 알려지지 않은 강력한 마법 물품으로 무장한 병력이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엘이 그들과 함께 있을 거라 확실시되어, 그녀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단 것이었다.
“녀석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냈나?”
“이미 사흘이나 지난 뒤라 마차 바퀴 자국도 거의 사라졌을 겁니다.”
“그럼 쫓을 방법이 없단 말인가?”
“대신 한가지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흔적?”
“여기 죽은 자들을 보십시오. 혹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이상한 점?”
펠론 자작이 사체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고 보니… 모두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군.”
“그렇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이들은 갑작스런 탈출로 충분한 여비를 챙기지 못했을 겁니다.”
“그럼 무기를 회수해 여비를 만들 거란 말이군.”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럼 녀석들이 갈 곳은 한곳 뿐이군.”
펠론 자작이 북쪽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검회색빛 먹구름을 바라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추격대를 준비해라! 에일 영지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