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벨로시 자작
꽝-
흑기사를 향해 용감히 달려들었던 기사가 거대한 방패에 얻어맞아 뒤로 날아가며 커다란 굉음과 함께 바닥에 처박히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흑기사의 엄청난 힘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기사들의 실력이 떨어지는군.”
내성벽 위에서 흑기사와 기사들의 전투를 지켜보던 벨로시 자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벌써 수십 명의 기사가 흑기사의 방패에 맞아 처참하게 죽었지만 여전히 그를 막아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작은 백작가의 기사들이야 얼마가 죽어 나가든 큰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큰 피해 없이 흑기사를 막아내고 이를 통해 백작가로부터 더 많은 기사단과 물자를 뜯어내는 것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흑기사의 정확한 검술과 약점을 파악해야만 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공격에 나가떨어지는 백작가의 기사들을 통해 흑기사의 약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급 기사의 부재를 숫자로 메우려다 보니 실력이 떨어지는 용병이나 몰락한 하급기사들을 대거 받아들여서일 겁니다. 그들 중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힌 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실망스럽군. 이렇게 실력이 떨어져서야 제국기사단을 상대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어.”
“어차피 백작가의 기사단이야 숫자만 채우려는 것뿐이니 너무 실망치 마십시오.”
“어쩔 수 없지. 이미 공작께서 결정한 사항이니…”
벨로시 자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지켜본다고 해도 얻을 건 없을 것 같군. 백작가의 눈도 있으니 이만 내려가지.”
“기사단을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러게. 이번 기회에 공작가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물론입니다.”
부관이 고개를 숙이며 성벽 아래로 곧장 달려갔다. 이미 벨로시 자작의 기사단이 성벽 아래 모여 자작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전이다.”
부관의 말에 기사단의 눈빛에서 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트라발트 공작이 1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대외활동을 접고 장기 칩거에 들어가며 영지발전에만 몰두한 탓에, 오랫동안 공작가의 무력을 상징했던 기사단보단 영지의 행정과 경제를 담당하는 문관들이 크게 성장했다. 그만큼 기사들의 권한이 축소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일어난 제국의 기습에 드디어 공작이 장기간의 칩거를 깨고 전면적인 보복 전쟁을 선언하면서, 공작의 기사들에겐 다시 자신들의 무력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 첫 기회가 벨로시 자작과 그 휘하 기사들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번 전투의 의미를 모두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벨로시 자작이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 기사들을 돌아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들 모두 그가 직접 발탁하고 훈련 시킨 기사들이었다.
“긴말은 하지 않겠다. 나가 싸워 이겨라! 백작가의 모든 기사들에게 우리의 힘을 확실히 보여주자!”
“확실히 보여드리겠습니다.”
부관의 말에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벨로시 자작을 선두로 30명의 기사들이 내성을 벗어났다.
“백작가의 기사들은 물러나라! 우리가 상대한다.”
벨로시 자작이 흑기사를 포위한 백작가의 기사들에게 큰소리로 외치며 포위당한 흑기사를 향해 다가섰다.
“백작께서 이번 전투를 나에게 일임하셨다. 모두 물러나라!”
벨로시 자작의 말에 백작가의 기사들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미 스스로가 흑기사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존심 강한 몇몇 기사들이 반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이미 백작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백작가의 기사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넓히며 뒤로 물러나자 벨로시 자작 휘하의 기사들이 흑기사를 중심으로 새롭게 포위망을 형성했다.
“금속제 전신 갑주라, 천 년 전 드레곤과의 전투에서 사용했단 기록은 보았다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군. 네놈 정체가 뭐냐?”
“….”
벨로시 자작이 공작가의 기사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서 있는 흑기사에게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벨로시 자작을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무거운 금속제 갑옷과 방패를 들고 아직도 전투를 벌이다니 놀라운 체력과 힘은 인정하마. 하지만 지금껏 상대했던 기사들과 우리는 급이 다른 존재들이다. 어떤가?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백작과 상의해 관대한 처분을 약속하지.”
벨로시 자작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수십의 기사들을 죽이고도 멀쩡하게 전투를 벌이는 흑기사라면 백작가의 기사단보다 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흑기사는 줄곧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자작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내성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마치 벨로시 자작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행동이었다.
“감히… 나 벨로시 자작을 무시하는 것이냐!”
자작이 분노한 듯 검을 뽑아 휘둘렀다.
스악-
순간 강렬한 푸른 기운이 검에서 빠져나와 흑기사에게로 날아들었다. 상급 엑스퍼트 이상의 실력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오러샷이었다. 흑기사가 자신에게 빠르게 날아드는 오러샷을 향해 방패를 내밀었다.
꽝-
커다란 폭음과 함께 흑기사가 걸음을 멈췄다. 생각보다 강렬한 충격에 놀란 듯 보였다.
“오러샷을 막아내다니 보통 방패가 아니구나!”
벨로시 자작이 자신의 오러샷을 막아낸 검은 방패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러샷이 비록 상급 엑스퍼트의 오러 소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아무런 기운도 담기지 않은 방패에 막힐 만한 공격은 아니었다. 이토록 대단한 갑옷과 방패라면 공작가의 기사들도 쉽게 상처를 입히긴 힘들어 보였다.
“녀석이 입고 있는 갑옷의 사이사이 틈과 눈을 공격해라!”
“알겠습니다.”
자작에게서 공격명령이 떨어지지 공작가의 기사들이 흑기사를 향해 과감하게 검을 휘두르며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백작가 기사의 포위 전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유기적인 움직임이었다. 몇몇 기사들은 실제로 흑기사의 갑옷을 직접 타격하며 그들이 백작가의 기사들보다 월등한 실력과 검술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교하고 빠른 움직임, 역시 트라발트 공작가의 기사단답군.”
“여러 인원이 유기적으로 움직여 흑기사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어, 역시 대단해.”
“저런 고급검술을 기사단 전체가 익히고 있다니….”
공작가의 기사단이 외곽을 포위하고 펼치는 다양한 공격과 검술을 연신 감탄을 터트리며 지켜보다가, 백작가 기사들의 마음에 흑기사를 막아낼 수 있다는 안도감과 자신들보다 월등히 강한 공작가의 기사들에 대한 위축감, 자괴감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폭음에 금방 씻겨 사라졌다.
꽈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외성 동쪽의 커다란 창고가 폭발하며 엄청난 불길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비축창고다!”
누구가의 외침이 아니라도 이곳에 모여있는 백작가의 기사들이라면 창고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작스런 폭발에 기사들은 물론 멀리서 지켜보던 영지민들까지 동요하기 시작했다. 요 하루 이틀 몇 차례 작은 폭발이 있기는 했지만, 비축창고의 폭발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동요하지 마라! 불은 병사들과 영지민들이 끌 것이다. 너희들은 흑기사를 포위하는 데 집중해라!”
언제 달려 나왔는지 펠론 자작이 기사들을 안정시키고 병사들과 영지민들을 급히 불이 난 비축창고로 보냈다.
“자작님!”
“어떻게 되었나?”
“사라졌습니다. 고성 내부를 모두 뒤졌지만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성탑을 지키던 기사의 말을 종합하면 이번 일에 영애께서 관여하신 것 같습니다.”
“…이엘이 살아있단 말이냐!”
펠론 자작이 깜짝 놀라 물었다. 내성이 안쪽이 폭발하면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이엘의 흔적이 갑자기 성탑에서 발견된 것이다.
“영애의 호위기사인 시안느 경이 성탑을 호위하던 기사를 기습 공격해 쓰러트렸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시안느의 실력으론 기습을 한다고 해도 호위기사 둘을 상대할 수 없다.”
“아닙니다. 분명 실력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강력한 차지와 빠른 검격이었다고 했습니다.”
“설마… 실전된 하린의 검술을 복원한 것인가?”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겁니다. 그녀의 곁엔 상급 엑스퍼트인 마일론 남작이 있었지 않습니까? 몇 달을 함께 보냈으니 검술을 다듬어 준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닐 겁니다.”
“하린의 검술과 방패술을 복원하려면 자신만의 비전 또한 내어 놓아야 하네. 아무리 함께한 시간이 길다 해도 가족이 아닌 자에게 자신만의 비전을 전수할 수…!”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요. 더구나 검술을 복원하는 일입니다. 시안느 경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녀석도 알고 있었겠지?”
“아마도… 어쩌면 이번 탈주도 아가씨께서 적극적으로 주도하셨을 겁니다. 시안느 경은 이렇게 치밀하게 죽음을 위장하면서까지 움직이기보단 검을 뽑아 남작을 직접 구하려 했을 겁니다.”
“그럼 결국 이 모든 것이 남작을 구하려는 이엘의 계획이었단 말인가?”
펠론 자작이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비축창고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엘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라 생각했겠지만, 백작과 펠론 자작 역시 비축창고와 연결된 비밀통로에 대해선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이미 고성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그 존재마저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중삼중으로 포위된 고성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탈출할 방법은 오직 비밀통로뿐이었다. 이와 연결된 비축창고가 폭발하는 바람에 더욱 확실하게 이엘의 생존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엘이 살아있음을 확신한 이상 이대로 보내 줄 수는 없다.”
“추적대를 구성하겠습니다.”
“호위기사단을 주축으로 추적대를 구성하고, 동부 영지들에 긴급으로 영애가 납치되었음을 알리게. 반드시 무사히 데려와야 해! 영주께는 내가 직접 말씀드리지.”
“알겠습니다.”
“백작가를 위해 공작의 기사들이 피를 흘린 이상 이번 혼담은 반드시 성사되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꽝-
커다란 굉음과 함께 포위망에서 튕겨져 나온 기사가 펠론 자작의 앞에 떨어졌다. 공작가의 기사 역시 흑기사의 방패에 담긴 강력한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온몸이 기괴하게 꺾여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괴물 같은 놈!”
벨로시 자작이 힘겹게 일어나며 여전히 방패를 휘둘러 기사들을 압살하는 흑기사를 노려보았다. 폭발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흑기사를 압도하던 기사들이었지만, 갑작스런 폭발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려졌다. 흑기사가 휘두르는 방패의 속도와 위력이 완전히 달라지더니, 공작가의 기사들이 뛰어난 조직력과 화려하고 위력적인 검술에도 이전 백작가의 기사들처럼 흑기사가 휘두르는 방패에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벨로시 자작을 더욱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상급 엑스퍼트라 자부하던 그 역시 아무런 기운도 담겨있지 않은 흑기사의 방패를 뚫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래 전 소드마스터인 공작을 상대하며 느꼈던 공포마저 그의 가슴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너 따위가 감히…!”
벨로시 자작이 가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공포를 떨치려는 듯 몸 안에 남아있던 오러를 쥐어짜 검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다, 단장님!”
“모두 물러나라!”
부관이 급히 자작을 말리려 했지만, 오히려 벨로시 자작이 앞을 막아선 부관을 밀쳐내며 흑기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흑기사가 돌연 들고 있던 방패를 풀어냈다.
쿵-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듯, 방패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큭큭, 역시 너도 역시 검의 명예를 아는 녀석이구나!”
흑기사가 등 뒤로 비끄러맨 커다란 대검을 뽑아 들자 벨로시 자작의 눈동자에 더욱 깊은 자신감이 맺혔다. 자작이 곧장 흑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검에 끝내주마!”
자작이 마치 검과 한 몸이 된 듯 흑기사의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방어를 도외시한 일점 찌르기였다.
무거운 대검으로는 자신의 속도를 따라올 수 없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공격이었다.
“끝이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흑기사의 모습에 승리를 확신한 벨로시 자작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져가던 순간, 드디어 흑기사의 검이 움직였다.
스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