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탈주(7)
“토랜…!”
“하하! 아직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군요.”
토랜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토랜은 카일이 모트 자작을 피해 아킨스 자작령을 탈출하던 때 도움을 줬던 기사였다. 당시 초급 엑스퍼트에 정체되어있던 그에게 카일이 약간의 도움과 조언을 주었다.
“카일 님의 도움으로 얼마 전 중급에 올라 새롭게 국경 경비기사단의 단장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야 중급에 오를 수 있는 가느다란 실 하나를 연결해 드린 것뿐, 가는 실을 꼬아 굵고 질긴 밧줄로 만든 건 온전히 토랜 님의 노력이죠.”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가야 할 정확한 목표를 알지 못했다면 전 아직도 초급 엑스퍼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카일에게는 작고 단순한 조언에 불과했지만, 토랜에겐 오랫동안 정체되었던 경지를 넘고 실전되었던 가문의 검술을 복원할 수 있게 단초를 만들어준 소중한 조언이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카일이 말에 고개를 숙인 토랜이 카일을 보며 물었다.
“왕성으로 가신다지요.”
“그렇습니다.”
“흠… 이거 곤란하게 되었군요.”
“네?”
“두 개의 기사단이 북문의 통행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 역시 허락받지 않은 자나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자는 성 밖을 빠져서 나갈 수가 없을 겁니다.”
“성 전체의 통행이 차단되었단 말입니까?”
카일은 물론 이엘과 시안느까지 놀란 얼굴로 토랜을 바라보았다. 설마 벌써 카일의 탈출을 알아채고 통행까지 막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성 이곳저곳에서 일어난 폭발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북문을 단신으로 파괴한 침입자 때문입니다.”
“성문을 단신으로 파괴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검은 금속 재질의 전신 갑주를 입은 자인데 대단한 강자라고 하더군요.”
“전신 갑주라고 하셨습니까?”
금속제 갑주에 성문을 파괴할 정도의 강자라면 암흑마법사인 사하를 지근거리에서 보호하던 흑기사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절대 사하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혹, 그자에게 동행은 없다고 합니까?”
“동행…? 아! 있습니다. 성문을 지키다 살아남은 병사 중 하나가 피스트 워리어를 봤다고 했습니다. 주막만으로 성문을 지키던 기사단을 전멸시켰다고 하더군요.”
“피스트… 워리어?”
“그렇습니다. 죽은 기사들 사인 대부분이 베이거나 찔린 상처가 아닌 강한 외부의 타격 때문이니, 아마도 잘못된 보고는 아닐 겁니다. 그런데… 혹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 아닙니다. 그저 단신으로 성을 돌파했다는 말에 놀라 물어본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토랜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급하게 성을 나가야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급히 왕성으로 가야 해서….”
“흠, 그럼 북문을 통하는 것이 가장 빠르겠군요.”
“네, 그렇기는 합니다만….”
“잘됐군요. 아마도 제가 카일 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랜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부관!”
“예! 단장님.”
“자네가 이분들을 안전하게 호위해 북문 밖으로 안내해 주게.”
“아시는 분입니까?”
“내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지.”
토랜의 말에 부관이 카일에게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단장님의 은인이시면 곧 기사단 전체의 은인이시죠. 제가 안전히 북문 밖으로 호위해드리겠습니다.”
부관이 카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성문이 막히긴 했지만 부관과 함께 가시면 통과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토랜 경.”
“아닙니다. 생각 같아선 직접 카일 님을 호송해 드리고 싶지만 저 역시 임무를 맡은 기사단의 단장이라 자리를 비우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이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토랜 님의 도움,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
토랜이 마차의 선두에선 부관을 향해 작은 동패를 내밀었다.
“성을 완전히 빠져나가면 통행 패를 전해드리게, 이동은 최대한 동쪽 국경지대를 이용하라고 말씀드리고.”
“걱정 마십시오. 안전한 곳까지 무사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자네만 믿겠네!”
토랜의 말에 부관이 고개를 숙인 뒤 마차를 이끌고 북문으로 향했다. 마차가 북문과 가까워질수록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과 함께 주변을 에워싼 영지병과 기사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났다. 터그 형제는 물론 이엘과 사안느까지 불안한 표정으로 밖을 살폈지만 의외로 카일은 담담하게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카일은 불안하지 않나요?”
“불안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엘의 물음에 오히려 카일이 되물었다.
“영지병과 기사단의 숫자만 해도 수백은 넘어요. 함정이라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거예요.”
“저 하나 잡자고 이 많은 병력을 움직였을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군요. 카일을 잡기 위해서라면 가문에선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에요. 더구나 카일은 상급 엑스퍼트잖아요. 제 생각엔 이 정도 병력도 부족하다 생각해요.”
이엘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틀렸습니다.”
“제 말이 틀렸단 말인가요?”
“아니, 전제 자체가 틀렸다는 뜻입니다. 제가 상급 엑스퍼트라면 이곳에 있는 병력으로도 절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전 이제 상급 엑스퍼트가 아닙니다.”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습관처럼 주먹을 말아 쥐었다가 다시 폈다. 언제나 강인하게만 느껴지던 오러의 기운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상급 엑스퍼트가 아니라니, 무슨… 뜻이죠?”
시안느가 흔들리는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얼마 전 성탑을 지키던 기사도 카일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몸 안에 있는 오러를 전혀 사용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제가 기절해 있는 동안 펠론 자작이 독을 먹였더군요.”
“독!”
이엘은 물론 시안느도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카일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십시오. 생명엔 전혀 지장이 없는 독입니다. 그저 오러만 사용할 수 없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설마… 평생 사용할 수 없단 말인가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제가 깨어나자 펠론 자작이 찾아와 직접 말해주며 사과를 하더군요. 평생 보상을 하겠다며 말이죠.”
“그럴수가! 말도 안 돼…. 검사에게서 평생을 수련한 오러를 빼앗으면 그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그걸 어떻게 보상할 수 있단 말인가요.”
시안느가 더 이상 참지 못하며 소리쳤다. 납치와 감금을 넘어 정신 마법까지 사용하더니 이젠 독까지 먹여 카일이 오러마저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무리 자신이 몸담았던 가문이라지만 백작가의 행태는 시안느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태였다.
“미안해요…. 전… 정말 몰랐어요. 카일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대할 줄은….”
“괜찮습니다. 앞서 말했듯 이엘의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문을 등지면서까지 절 구하러 와줘서 고맙습니다.”
“카일은 제가 밉지 않나요? 모든 것이 저 때문에 일어났어요. 제가 카일의 인생을 망쳤잖아요.”
“오러가 사라졌다고 제 인생이 망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러는 제가 가진 많은 것들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이엘을 위로했다.
“그리고 오러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독이 있다면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해독제도 반드시 있을 겁니다. 더불어 오러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얻은 것도 있죠.”
카일이 다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가 피며 말했다.
“얻은 것이 있단 말인가요?”
“독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러를 외부로 방출할 수 없게 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오러가 몸 안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죠.”
“그럼…?”
“외부로 발출할 수 없다면 반대로 내부 깊숙이 오러를 밀어 넣어야죠.”
카일이 웃으며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섰다. 세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마차는 외성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성을 벗어나는 동안 단 한 번의 제지도 없었던 것이다.
“놀라셨습니까?”
“이렇게 쉽게 성을 빠져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카일이 놀란 목소리로 답했다
“북문을 지키던 기사단이 무너지는 바람에 토랜 님께서 경비기사단을 이끌고 임시로 북문 수비의 책임을 맡으셨으니, 누가 마차를 가로막겠습니까?”
부관이 웃으며 품 안에서 동패를 꺼내 건넸다.
“전 이곳까지입니다. 이 동패를 가지고 곧장 국경을 따라 북상하셨다가 왕성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럼 추적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토랜 님은 펠론 자작님을 수행하던 기사 중 한 분이셨습니다. 영애의 얼굴을 모를 수가 없죠.”
부관이 빙그레 웃으며 이니엘 영애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미처 예를 취하지 못한 점 용서하십시오.”
“아니, 오히려 감사해요. 덕분에 무사히 성을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아닙니다. 사실 이번 공작가와의 혼인 동맹에 대해 기사단에서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카일 님께서 직접 영애를 모시러 오셨으니 저희들이 도와드리는 건 당연한 노릇이지요.”
부관이 웃으며 말했다. 카일이 백작가에 납치되어 감금된 것은 백작과 펠론 자작, 그리고 가문을 호위하는 호위기사단만 아는 사실이었다. 일반 평기사나 경비기사단처럼 외부에서 영입한 기사단에게는 철저하게 비밀로 붙여졌다. 그러나 공작이 백작가와 혼인 동맹을 하려는 이유가 하급 기사들을 지원받기 위해서란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 대상인 하급 기사들 사이에선 상당한 불만이 쌓여있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카일과 이엘이 함께 성을 빠져나가려 하자 사태를 오해한 토랜이 은혜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하급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카일을 탈출시킨 것이다.
물론 카일은 이들의 오해를 직접 해명할 생각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라니요. 오히려 아가씨께서 카일 님 같은 분을 만나 저희 기사들로서는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하하!”
부관이 웃으며 말했다. 이엘과 카일이 혼인만 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상급 엑스퍼트인 카일이 백작가의 기사단을 이끌고 그 역시 가문의 혈통이 아닌 실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 토랜 역시 중급 엑스퍼트에 올랐지만 내성이나 외성을 맡는 대신 국경경비기사단의 단장이 되며 내성 기사에서 사실상 좌천되어버렸다. 그가 정통 기사 가문 출신이 아닌 아닌 용병 출신 기사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백작가를 떠나가셔야 하지만, 다음에 다시 백작가로 돌아오실 때에는 가문의 기사들이 카일 님의 힘이 되어드릴 겁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듯하자 부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한 카일의 반응에 실망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가문의 영애를 납치하듯 데려가는 카일의 입장에선 다시 백작 가문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백작가는 물론 혼인 동맹의 당사자인 공작가와도 적지 않은 마찰을 견뎌야 하기에 지금 카일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 부관이 카일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작해야 평기사에 불과하지만,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많은 평기사들이 있습니다. 비록 이들 개개인의 힘은 작지만 이들이 모여 주군께 말씀드리면 쉽게 뿌리치지는 못하실 겁니다. 그러니 다시 카일 님을 만나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카일이 잠시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부관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길 고대하겠습니다.”
부관을 향해 묘한 여운을 남긴 카일의 마차가 천천히 멀어져 갔지만, 그는 여전히 멀어져가는 마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