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탈주(6)
“물러나라!”
터그가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카일 님이 계신 곳을 알고 계십니까?”
“조금 전 말하지 않았나요. 카일은 이곳에 있어요.”
“성 내부를 모두 확인했지만, 이곳엔 아무도 없습니다.”
이엘의 말에 실망한 듯, 터그가 고개를 저었다.
“성 내부만 찾으면 당연히 찾을 수 없죠.”
“네?”
“이곳이 방치된 고성이긴 하지만, 이전엔 항상 병력이 상주하며 제국의 침입을 감시하던 곳이에요. 그중 고성 동쪽에 자리한 돌출 성탑은 고성과 연결된 성벽로를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죠.”
“성탑!”
“서둘러야 하지 않나요.”
이엘의 말에 터그가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 몸을 돌렸다.
“형님! 함정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확인은 해야 한다.”
“하지만, 저 두 사람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럼 저희가 앞장서죠.”
이엘이 터그와 형제들을 지나쳐 동쪽 성탑을 향해 달려갔다.
“따라간다.”
터그가 앞서 달려가는 이엘과 시안느의 뒤를 바짝 뒤쫓았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진 마십시오.”
“아니, 당연해요. 어쨌든 저희 가문이 카일을 가둔 건 사실이니까요.”
이엘이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이곳입니다. 지키는 자들이 있을 테니 아가씨는 잠시 여기 계십시오.”
“조심해요.”
시안느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성벽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시안느가 성벽 위로 올라서자 성탑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시안느를 돌아보았다.
“이니엘 아가씨의 호위기사 시안느라 합니다. 아가씨께서 마일론 남작님과 만나길 원하십니다.”
시안느가 성탑을 지키는 기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이곳에 카일이 갇혀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아무리 영애라 하셔도 펠론 자작님의 명이 없다면 이곳을 들어갈 수 없다.”
“물론 잘 알고 있어요. 자작님 허락도 없이 이곳까지 아가씨를 데려 올 수는 없죠.”
“설마… 자작께서 허락을 하셨단 말이냐?”
“물론이죠. 지금 자작님께서는 공작가의 기사단을 맞이하시느라 직접 오실 수 없어 절 먼저 보내셨어요.”
“자작님께서 보내셨다면 분명 증표를 주셨을 것이다.”
“그럼요.”
시안느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자 성탑을 지키던 기사들의 얼굴에서 한순간 긴장감이 사라졌다. 그 순간, 시안느의 몸이 튕겨져 나가며 앞을 막아선 기사의 가슴을 어깨로 강하게 들이받았다.
꽝-
“크억-!”
기습적인 시안느의 공격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기사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자, 그 뒤를 바짝 따라붙은 시안느의 검이 당황한 표정의 기사 목 앞에 멈춰 섰다
“움직이면 죽을 수도 있어요.”
“감히 충성을 맹세한 백작가를 배신하다니… 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기사가 사납게 시안느를 노려보며 외쳤다. 하지만 시안느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담담히 말했다.
“제가 충성할 대상은 가문이 아닌 이니엘 영애님입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마시고 성탑의 문을 열어 주시면 좋겠어요.”
“흥, 가져가라!”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바닥에 던진 기사가 시안느를 향해 비웃듯 말을 이었다.
“남작을 구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이미 그는 예전의 상급 엑스퍼트가 아니다”
“무슨… 뜻이죠?”
“그건 직접 확인해라!”
기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당황한 시안느가 주춤거리는 사이, 돌연 기사가 시안느를 발로 힘껏 밀어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죽어라!”
기사의 검이 곧장 시안느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탕-
“커억-!”
기사가 한차례 피를 토하더니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괜찮으십니까?”
터그가 쓰러진 시안느를 향해 급히 달려왔다. 위급한 순간 터그가 급히 라이플을 쏴 그녀를 구한 것이다. 하지만 터그의 물음에도 시안느는 단단히 잠겨있는 문을 불안한 듯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 기사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예전의 상급 엑스퍼트가 아니다.’
“그럴 리가!”
터그를 밀쳐낸 시안느가 급히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주워 성탑의 문을 열었다.
“카일!”
다급히 안으로 들어선 시안느의 눈에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보였다
“좀… 늦었군요.”
카일이 담담하게 말하며 돌아서서 시안느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요?”
“글쎄요. 몸에 상처가 없으니 괜찮다고 할 수는 있겠군요.”
카일이 고개를 흔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문을 나섰다.
“카일 님!”
터그와 형제들이 급히 카일에게 달려왔다.
“와줘서 고맙습니다.”
“당연히 와야 했습니다.”
터그가 웃으며 등에 메고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필요하실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꼭 필요한 물건이었는데… 감사합니다.”
터그가 카일에게 내민 건 지난번 루퍼트 남작가를 습격하며 사용했던 라이플이었다.
“카일!”
그때 카일의 옆으로 이엘이 다가왔다.
“…이엘도 왔군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이엘의 잘못이 아님을 압니다.”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카일 역시 그녀가 백작에게 이용당했단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엘은 카일의 목소리에 담긴 낯선 차가움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엘 스스로가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그녀의 욕심으로 벌어진 일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돌려드릴게요.”
이엘이 카일에게 목에 걸고 있던 아공간 석과 카일의 검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카일이 아공간 석을 다시 목에 걸었다. 그 사이 터그가 다가왔다.
“가셔야 합니다. 이미 시간을 너무 지체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서두르죠.”
카일의 말에 터그와 형제들이 앞장서서 달려나갔다.
“막혔습니다.”
앞서 성 밖으로 달려나갔던 형제 중 막내인 로딘이 급히 다가와 말했다.
“얼마나 되나?”
“두 개 기사단은 되어 보였습니다.”
로딘의 말에 터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일에게로 향했다. 숫자가 좀 많긴 하지만 상급 엑스퍼트인 카일이 앞에서만 막아 준다면 얼마든지 돌파가 가능한 숫자였다. 하지만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전 지금 오러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네?”
터그가 놀란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일단 제가 상급 엑스퍼트란 사실은 잊으세요.”
“아, 알겠습니다.”
터그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위험 부담은 있지만 연막탄을 터트린 뒤 성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래선 빠져나갈 수 없어요.”
터그의 말에 이엘이 고개를 저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죠. 아마 지금 포위한 기사단을 제외하더라도 최소 두 개 기사단 이상이 더 넓게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을 거예요.”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군요.”
터그가 굳은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 님은 와이번을 불러내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시카니스가 아무리 덩치가 큰 와이번이라도 이곳에 있는 모두를 데려갈 수는 없다.”
“저희 형제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차피 와이번을 불러내면 백작가의 와이번 나이트들과 공중전을 벌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타는 건 오히려 전투에 방해만 될 뿐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날 구하러 온 사람을 버리고 탈출할 수는 없다.”
카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걱장마세요. 이곳을 안전히 빠져나갈 방법이 있으니!”
“기사단을 뚫을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터그의 물음에 이엘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따라오세요.”
이엘이 몸을 돌려 곧장 지하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 성 지하엔 성이 고립될 경우를 대비해 식량과 병력을 지원할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있어요. 그곳을 통하면 곧장 외성으로 들어갈 수 있죠.”
“그러고 보니 두 분이 안개를 뚫고 고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비밀 통로 덕분이군요.”
그제야 터그는 두 사람이 자욱한 안개로 뒤덮인 고성을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비밀 통로는 1층 지하 감옥 안쪽에 만들어진 작고 좁은 통로였다.
“반대편에 적이라도 있으면 꼼짝없이 잡히겠군요.”
터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걱정 마세요. 이곳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럼… 이엘은 이곳을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카일이 이엘을 향해 물었다.
“백작가의 서재엔 오래 전 승리한 전투를 묘사한 그림과 당시의 전투를 상세히 기록한 서책이 있어요. 그때의 기록을 통해 제가 직접 찾아낸 거라 아는 사람이 없죠.”
“그렇군요.”
비밀 통로는 외성 외곽에 자리한 커다란 창고 바닥과 연결되어 있었다.
“제국의 침입에 대비해 밀을 쌓아놓는 비축창고죠.”
이엘의 말대로 창고 안엔 밀 포대가 가득 쌓여있었다.
“이런 창고가 많습니까?”
“외성에만 다섯 곳이 있어요. 그중 이곳이 가장 큰 창고죠.”
이엘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터그를 바라보자 터그가 뒤로 슬쩍 물러나 형제들에게로 다가갔다.
“창고 밖에 마차를 준비해 뒀어요. 서두르면 성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
이엘이 서둘러 창고 밖으로 향했다.
“이엘도… 함께 가려는 겁니까?”
앞서가던 이엘이 멈춰서며 카일을 돌아보았다.
“맞아요. 저와 시안느는 카일을 따라갈 거예요.”
“저와 그린넨 백작 가문은 양립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따라오겠습니까?”
“가문이 절 이용하려 한 순간, 저도 가문을 버렸어요.”
이엘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힘든 여정이 되겠지만, 돌아가고 싶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이엘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터그 형제들이 카일에게로 다가왔다.
“끝났습니다.”
“출발하죠.”
터그와 형제들이 급히 마차를 몰아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꽝-
갑작스런 굉음이 울리며 비축창고에서 커다란 불길이 치솟았다. 터그 형제가 가지고 있던 스크롤을 이용해 창고를 터트린 것이다.
“놀라지 않는군요.”
“이미 이럴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영지를 혼란에 빠트려야 좀 더 쉽게 성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이엘이 불길이 휩싸인 창고를 외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마차는 빠르게 달려 곧장 북쪽 성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멈춰라!”
그때였다. 갑자기 주변으로 일단의 기사단이 다가와 마차를 포위하기 했다. 갑작스런 흑기사의 난입으로 성문이 부서지고 기사들이 공격받자 국경 인근을 지키던 백작가의 기사단 일부가 다급히 영주성으로 달려왔고, 성을 빠져나가려는 카일 일행과 마주치고 만 것이다.
“어디로 가는 자들이냐!”
기사단의 단장으로 보이는 자가 천천히 말을 몰아 마차로 다가와 물었다.
“…왕성으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터그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용병들인가?”
“그렇습니다. 저희는 바일 상단의 의뢰로 백작령에 잠시 들렸을 뿐입니다.”
“바일 상단? 처음 들어보는군.”
“증류한 브랜디를 취급하는 작은 상단입니다. 이곳에 술을 납품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요.”
터그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기사단장이 주변을 돌아보더니 검파에 손을 올린 채 마차로 천천히 다가갔다.
“안에는 누가 있나?”
“단주님의 후계자께서 동행하셨습니다. 이번이 첫 상행이시죠.”
터그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마차로 다가가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주변을 포위한 기사단의 숫자는 무려 30명이 넘었고, 무엇보다 너무 가까웠다. 아무리 라이플이 있다 해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선 오히려 마나를 사용하는 기사가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터그는 조심스럽게 수정구를 말아쥐었다. 여차하면 수정구를 기사단 향해 던질 생각이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터그 본인은 물론 형제들까지 다칠 수 있지만, 지금은 이것만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딸깍-
기사단장이 천천히 마차 문을 열어 내부를 확인하더니 어느 순간 카일과 시선이 마주쳤다.
“당신은….”
카일은 물론 이엘과 시안느까지 깜짝 놀라 문을 연 기사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