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탈주(5)
철컹청컹-
해가 저물어가는 늦은 저녁, 성문을 닫기 위해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온 거친 쇳소리에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 밖으로 향했다.
“저기다.”
성벽 위에 올라있던 병사가 손을 들어 온몸을 검은 금속제 갑주로 뒤덮은 괴사내를 가리켰다. 그러자 병사는 물론 성문을 지키던 기사들까지 달려와 성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괴사내를 바라보았다.
“성문을 닫아라! 녀석을 절대 성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
본능적이었을까? 불안함을 느낀 기사가 병사들을 다그치며 소리치자 사내를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 황급히 성문에 달라붙었다.
끼이익-
수십 명의 병사들이 재빨리 달려들자, 성문이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성벽 위에 올라있던 기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아무리 빨리 달려와도 성문이 닫히기 전 도착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멈춰선 검은 갑주의 사내가 등 뒤에서 거대한 라운드 실드를 꺼내 어깨에 단단히 밀착시킨 뒤 당장이라도 튕겨 나갈 듯 자세를 한껏 낮췄다.
“저… 녀석, 설마!”
기사가 깜짝 놀라 성문을 닫고있는 병사들을 다그쳤다.
“서둘러라! 어서 성문을 닫아!”
“궁수를 불러라!”
“적이다!”
기사들이 덩달아 고함을 치며 병사들을 닦달하는 사이 이미 자세를 완벽히 잡은 흑기사의 몸에서 칠흑 같은 검은 마기가 흘러나와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팡-
공기가 한순간 폭발하며 터져나가듯, 한줄기 검은 줄이 그어지며 흑기사의 몸이 성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꽈앙-
반쯤 닫혀가던 거대한 성문과 수십의 병사들이 엄청난 폭음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빌어먹을! 엄청난 자다!”
성벽 위에 올라있던 기사들이 입술을 깨물며 서로를 돌아보더니 검을 뽑아 들곤 아래로 뛰어내렸다.
“모두 공격하라!”
“놈을 막아라!”
기사들이 일제히 흑기사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퍽-
가장 먼저 흑기사의 등을 향해 검을 꽂아 넣으려던 기사가 어디선가 날아든 주먹에 맞아 바닥을 뒹굴며 쓰러졌다.
“누… 구냐!”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을 공격하는 검은 가면을 쓴 사내에게 깜짝 놀란 기사들이 주춤 뒤로 물러나 소리쳤다.
“응, 적이야!”
검은 가면의 사내, 십호가 깔끔하게 자신을 소개하며 기사들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자자! 시간 없다. 저분을 따라가려면 서둘러야 하니까 어서 덤비도록!”
십호가 멀어져 가는 흑기사를 돌아보며 말했지만, 두 주먹 위로 선명하게 자리잡은 피스트 오러를 두려운 듯 바라볼 뿐 덤벼드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먼저 갈 테니 십호는 천천히 정리하고 따라오세요.”
부서진 성문을 통해 이번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이 십호를 스치듯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 빌어먹을. 오지 않겠다면 내가 가지!”
십호가 화가 난 듯 곧장 기사들 사이로 뛰어들며 맹렬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같은 시각, 평범한 용병 차림의 사내가 작은 상점 앞에 걸음을 멈추곤 물건을 살피기 시작했다.
“손님. 필요하신 것이 있습니까?”
“그렇소.”
“오! 잘 오셨습니다. 보기엔 작아 보여도 싸고 질이 좋은 물건들이 많이 있답니다.”
“알고 있소. 그래서 이곳에 찾아온 거요.”
“아! 소개를 받으신 겁니까?”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밀리의 술집에서 여길 알려주더군.”
“…밀리!”
용병의 말에 사내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밀리의 술집은 그도 잘 아는 곳이다. 아니, 잘 아는 정도가 아닌 서로가 같은 조직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대외적으론 서로가 서로를 알아서도, 아는 척을 해서도 안 되는 사이였다. 그런데 밀리의 술집에서 자신의 상점을 알려줬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 하하! 밀리라? 처음 듣는 분이군요.”
“이상하군? 그자는 자넬 잘 알고 있던데.”
“네?”
“여기도 검은 여우들이 운영하는 곳이라던데, 아닌가?”
“당신…!”
“미안해, 원한은 없어, 일이라서 말이야.”
사내, 버크가 씩 웃으며 들고 있던 수정구를 안으로 집어 던지곤 바람처럼 상점을 빠져나왔다.
꽝-
곧 엄청난 폭음과 함께 상점이 날아가 버리며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폭발이다!”
“사람 살려!”
순식간에 주변이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리자 시방에서 치안대가 달려왔지만 이미 버크는 혼란 틈타 그곳을 유유히 빠져나와 다음 장소로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 * *
“무슨 일이냐!”
갑작스러운 폭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백작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알아보겠습니다.”
펠론 자작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기사 하나가 달려 들어왔다.
“헉헉! 주군, 적이 나타났습니다.”
“적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냐!”
“검은 금속제 전신갑옷을 입은 기사 하나가 성문을 돌파해 영주성으로 곧장 달려오고 있습니다.”
“고작 한 명 때문에 이 소란이란 말이냐!”
백작이 분노한 둣 소리쳤다.
“검은 오러를 마구 뿜어내며 거대한 방패를 마치 무기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엄청난 강자입니다.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방패를… 사용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기사의 말에 백작이 굳은 얼굴로 펠론 자작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녀석일 리 없습니다. 녀석은 이미 오래전 죽었습니다.”
펠론 자작이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또 한 명의 기사가 달려 들어왔다.
“큰일났습니다. 흑기사가 내성 앞까지 도착했습니다!”
“뭐라!”
“상대가 너무 강합니다. 기사단장들이 모두 달려들어 겨우 막고는 있지만,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습니다.”
“단장들까지…!”
백작은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숙인 기사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린넨 백작가는 상급 기사가 없는 대신 변경백이란 신분을 적극 활용해 기사단의 숫자를 최대한 늘려 대영지중 가장 많은 중급 엑스퍼트와 기사단을 보유한 곳이었다. 트라발트 공작이 많은 양보를 하면서까지 그린넨 백작가와 혼인동맹을 맺으려 한 것도 부족한 기사단의 숫자를 그린넨 백작가를 통해 메우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저희가 나서는 것이 좋을 듯하군요.”
“벨로시 자작!”
펠론 자작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벨로시 자작은 트라발트 공작이 백작가와의 협상과 더불어 이니엘 영애의 보호를 위해 보낸 호위기사단의 단장이었다. 만약 여기서 벨로시 자작의 도움을 받게 되면 공작은 백작가에 더 많은 기사와 병력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어려워 마십시오. 이미 백작가는 트라발트 공작가와 한 몸이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백작가의 적은 곧 공작가의 적이나 다름이 없으니, 저희가 도움을 준다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벨로시 자작이 여유 있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기서 다수의 기사를 잃게 되면 공작가로서도 상당히 곤란해서 말입니다. 백작님.”
벨로시 자작의 말에 백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도 여기서 도움을 받는다면 더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이미 내성 코앞까지 온 강대한 적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자작의 도움이 필요했다.
“으음….”
“시간을 끌면 더 많은 희생이 따르게 될 겁니다.”
“이미 비상을 걸었으니 외곽을 경계하던 기사들도 곧 당도할 겁니다. 그러니….”
“그땐 이미 늦다.”
백작이 고개를 저으며 벨로시 자작을 돌아보았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럼 협상은 적을 처리한 뒤에 하도록 하지요.”
“부탁드리지요.”
백작의 정중한 부탁에 기분이 좋아진 벨로시 자작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곧장 집무실을 벗어났다.
“형님!”
“여기서 다수의 기사를 잃을 수는 없다. 기사단장은 더더욱 안 돼!”
백작은 얼굴을 찌푸리며 가죽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이마를 짚었다.
“급보입니다.”
“또 무슨 일이냐!”
“외성 일대에서 누군가 무차별적인 폭발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외성에 자리한 다섯 곳의 상점과 술집이 폭사 당했습니다.”
“폭발…?”
꽝-
순간 엄청난 폭음과 함께 영주성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렸다.
“이게 무슨!”
“내성! 내성 안쪽에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이니엘!”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히 내성 안쪽으로 달려갔다.
“아, 안됩니다. 위험합니다.”
기사들이 다급히 백작을 말렸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백작은 기사들을 뿌리치고는 내성 안쪽으로 다급히 달려갔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엘의 방은 철저하게 무너져 더 이상 안으로 진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안 돼!”
백작이 절규하듯 달려가 무너진 잔해를 헤집었다.
“안 됩니다. 형님!”
펠론 자작이 급히 백작을 붙잡으며 급히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뭘 보고만 있느냐! 어서 잔해를 치워라!”
“아, 알겠습니다.”
펠론 자작의 외침에 주변에 몰려있던 하인들과 하녀들이 달려들어 무너진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두 인영이 혼란한 틈에 내성 밖으로 서둘러 달려 나갔다.
“괜찮으세요?”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네요.”
이엘이 위험을 무릅쓰고 무너진 잔해를 향해 달려들던 백작의 모습을 떠올리며 떨어지려는 눈물을 겨우 참아냈다.
“아가씨”
“…다른 건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카일을 구하는 게 먼저예요. 다른 곳이 비어 있었다면 남은 곳은 동쪽 고성뿐이에요. 분명 멀린 마법사님도 그곳으로 움직였을 거예요.”
“하지만 확실하지 않아요.”
“어차피 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이엘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급히 내성을 빠져나왔다. 그때 이엘의 예상대로 동쪽 고성을 향해 일단의 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오늘 아침 일찍 성안으로 들어온 터그 형제였다. 이들은 아침부터 동쪽 고성 일대를 살피며 성안으로 진입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시간이 더 있다면 모르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역시 정면 돌파인가?”
터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 돌파로 고성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터그로서도 어렵지 않았다. 이미 기사들 일부가 빠져나갔고, 병사들 정도야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카일을 구한다고 해도 그땐 이미 성 주변으로 단단한 포위망이 구축된 뒤일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코퍼 용병대가 최대한 혼란을 일으켜주길 바랄 뿐.”
형제는 급히 고글을 쓰고 연막탄을 사방으로 던졌다.
펑-
펑-
희뿌연 안개가 사방으로 퍼지며 고성 일대는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웬 안개야?”
퍽-
고성을 지키던 병사가 사방에서 몰려드는 안개에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이 병사를 관통했다.
곧이어 터그 형제들이 병사들을 스쳐 지나며 고성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내부 확인!”
터그의 형제들이 재빨리 고성 안으로 집입해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없습니다.”
“이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도….”
형제들이 하나둘씩 1층으로 모여들며 보고했지만, 역시 내부 어디에도 카일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여기가… 아니란 말인가?”
터그가 낮은 탄식을 터트리며 말했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수정 막대는 이곳에 카일이 있음을 정확히 알려주었다.
“아니! 여기가 확실해요.”
그때였다. 낮은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로브를 깊게 눌러 쓴 여인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냐!”
터그 형제들이 재빨리 두 여인을 포위하며 소총을 겨누었다.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절 잊은 건가요? 섭섭하군요.”
낮은 탄성을 터트린 여인이 깊게 눌러쓴 로브를 걷어 올렸다.
“시안느 경, 이… 니엘 영애”
“맞아요.”
이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형제들이 사납게 이엘과 시안느를 노려보며 총구를 바짝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