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탈주(4)
“아!”
며칠째 신상 앞에 엎드려 기도를 올리던 에밀리아가 낮은 탄성을 터트리고 눈을 떴다.
신탁이 내려온 이후 새롭게 성녀의 의식을 치른 뒤 신의 뜻에 따라 빛과 어둠을 간직한 기사를 찾아 떠나야 하지만,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줄 신은 벌써 한 달이 지나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어 모두를 답답하게 했다.
그중 가장 힘든 사람은 새롭게 성녀가 되어 신의 뜻을 쫓아야하는 에밀리아였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이 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 여기며 작은 기도실에서 몇 날 며칠을 기도를 올렸고, 오늘 드디어 새로운 신탁을 받았다.
“동부로 가야 해요.”
기도실을 뛰쳐나온 에밀리아가 곧장 대주교 바헤른에게 달려가 소리쳤다.
“성녀님! 드디어 신탁이 내려온 겁니까?”
“네! 신께서 사방을 가로막는 어둠을 뚫고 그분이 계신 곳을 알려주셨어요.”
“오! 드디어, 당장 기사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바헤른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성을 다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황급히 밖으로 달려 나가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한편으론 성녀가 편히 긴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작해, 하루도 되지 않아 대신전 앞에 커다란 마차와 함께 열 명의 성기사들이 질서 있게 모여들게 되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성녀님.”
“걱정 마세요. 여신께서 저희를 보호해 주실 거예요.”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여신의 밝은 빛을 가로막는 어둠 또한 무섭고 위험한 법이랍니다. 부디 빛의 기사와 함께 안전히 돌아오십시오.”
에밀리아가 불안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바헤른에게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에밀리아가 대신전을 벗어나 동부로 향하던 그때, 천공탑을 되찾기 위해 고심하는 사하의 주변으로 깊은 어둠이 흘러나와 공간을 장악했다. 사방이 암흑으로 물들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여전히 생각에 빠져있었다.
“뭘 그리 생각하느냐?”
차갑고 짙은 어둠이 하나의 형상을 이루며 살며시 사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허억!”
마치 커다란 뱀이 다가와 온몸을 몸을 휘감듯, 발끝에서부터 소름끼치는 차가움이 느껴졌다. 사하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온몸을 꽉 조여오는 느낌에 움직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나의 종이여. 무엇을 그리 생각하느냐?”
“마, 마왕… 커헉!”
“큭큭, 넌 아직 내 손안에 있다. 벌써 잊은 것이냐? 잊지 마라! 아직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나의 종이여!”
“커억-”
귓가를 맴도는 마왕의 목소리에 사하가 놀란 듯 고개를 저었다. 숨통을 조여오는 소름 끼치는 차가운 기운보다 마왕의 이 한 마디가 그녀의 심장을 강하게 조여왔다.
그렇다. 그녀의 모든 것은 마왕의 것이다. 그녀는 마왕의 제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마왕의 제물로 죽어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몇 달 전 이 끔찍한 운명에서 벗어날 방법이 생겼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동안 소유라는 것을 몰랐던 그녀가 무엇인가를 소유하려 한다.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꿈꾸며 잃어버린 천공탑을 되찾으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곳은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행복한 기억이 깃든 공간이기에 지금까지 일부러 외면해 오던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 운명이 변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아니다. 자신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변할 수 있는 작은 기회만 찾아왔을 뿐이었다.
“이, 잊지 않았습니다. 잊지 않았어요.”
사하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이곳은 따뜻하고 아늑한 서재 안이었다.
“휴….”
사하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머리 위로 흐르는 차가운 땀을 닦아냈다.
꽝-
그때였다. 단단히 잠겨있던 문이 박살 나며 가면을 쓴 사내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휴…. 전혀 괜찮지 않아요. 방금 어떤 못된 녀석이 제방에 난입했거든요.”
“어떤 빌어먹을 녀석이 감히! 당장 녀석을 잡아 오겠습니다.”
“정말요?”
사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가면 쓴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 추적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말입니다.”
“십호의 추적술이야 저도 잘 알죠. 하지만 녀석을 정말 끌고 올 수 있겠어요? 쉽지 않을 텐데.”
“걱정 마십시오. 팔다리를 부러트려 아가씨 앞에 끌고 오겠습니다.”
“십호의 말을 들으니 정말 기대되는군요. 그럼 부탁드리죠.”
“인상착의를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시면 당장 찾아오겠습니다.”
사하가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는 십호를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일단 키가 크군요. 하얀 셔츠 위에 갈색 조끼, 그 위에 검은 가죽 코트를 입었어요. 물론 검은 복면도 했군요.”
“흠…. 가면을 쓴 것만 제외하면 평범하군요. 혹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습니까?”
“아! 이제 보니 가면에 금실로 자수를 놓아 아주 화려하군요.”
“금실로…?”
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주 악독하게도 방문을 부수고 난입한 녀석이니 십호가 반드시 잡이주세요.”
“…문을.”
사하가 눈짓으로 부서진 문짝을 가리키며 십호를 올려다보았다.
“제게 데려올 때 반.드.시! 팔다리 부러트리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아셨죠?”
“허억….”
십호는 그제야 사하가 말한 못된 녀석이 자신임을 알았다.
“왜요. 못하겠나요?”
“그게… 자, 잘못했습니다. 아가씨.”
“십호! 제발 행동하기 전 생각 좀 하세요. 그렇게 생각 없이 행동하다가 죽을뻔한 걸 벌써 잊었나요?”
“그것이…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에… 죄송합니다.”
“하아! 어쩔 수 없죠. 어차피 잠을 자긴 어려울 것 같으니 할 수 없죠.”
사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로브를 입고 붉은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손에 들었다.
“떠날 준비를 하세요.”
“지금 말입니까?”
“왜요? 문제 있나요.”
“아! 아닙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목적지는…?”
십호가 사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가 갈 곳은 동부…. 그린넨 백작가에요.”
“아!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죠.”
십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곧… 다시 보겠군요. 카일!”
* * *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펠론 자작이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상황이지만 결국 미라스가 사라진 건 마왕이 소환되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사실이 조금이라도 외부에 알려진다면, 왕실은 물론 마탑의 마법사들이 백작가를 가만히 두진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백작가와 동맹을 맺은 트라발트 공작과 가신가들이 앞장서서 백작가를 공격하고 말 것이다. 물론 증거는 남지 않았다. 마법사는 마계로 끌려갔고, 마법진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더불어 당시 함께했던 기사들에겐 침묵의 맹세를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굳이 백작에게까지 이 사실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
“하아!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냐! 미라스가 사라졌으니 이제 어떻게 녀석에게서 검술을 얻을 수 있단 말이냐!”
백작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카일을 납치하고 그에게서 검술을 빼앗으려 한 것은 전적으로 미라스라는 흑마법사의 정신 마법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흑마법사가 사라져 버렸으니, 상급 검술을 빼내겠다는 백작의 생각도 모두 실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흑마법사가 사라진 이상 이미 실패한 계획입니다. 그만 미련을 버리시지요.”
“눈앞에 상급 검술이 있는대도 포기하란 말이냐!”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설마 이제 와 공작가와의 혼인동맹을 포기하고 이엘과 혼인을 시키실 겁니까?”
“그럴 수야 없지, 그랬다간 공작가에 빌미만 제공할 뿐이야!”
백작이 고개를 숙인 채 고심을 하더니, 책장 안쪽 깊은 곳에서 우윳빛 액체가 든 작은 병을 꺼냈다.
“니프럼이란 꽃에서 추출한 독을 고농도로 농축해 만든 것이다.”
“독…. 설마! 마일론 남작을 죽이시려는 겁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것만은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펠론 자작이 백작에게 강하게 말했다. 카일의 죽음까지 동의한다면, 지난번 시안느가 했던 말처럼 백작의 명이란 명분으로 쉽게 신념을 저버리는 위선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잊으신 겁니까? 제가 이번 일에 동의한 건 마일론 남작의 안전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다. 나 역시 남작을 죽일 생각은 없다. 굳이 죽일 생각이라면 복잡하게 독을 먹일 이유가 있겠느냐? 날카로운 칼 하나면 족한 것을….”
백작이 아쉬운 듯 유리병을 내려다보더니 펠론 자작에게 내밀었다.
“사람을 죽이는 독이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
“네?”
“이건 사람이 아닌 오러를 동결시키는 독이다. 아무리 강대한 오러라도 절대 사용할 수 없다.”
“그런 독은 처음 들어봅니다.”
“오래전 트라발트 공작을 대적하기 위해 어렵게 구한 물건이다. 하지만 이미 공작가와는 동맹을 맺었으니… 이걸 남작에게 사용해야겠다.”
“설마… 평생 오러를 사용할 수 없은 겁니까?”
“맞다. 이걸 사용하면 더 이상 오러는 사용할 수 없다.”
“그런… 말도 안 됩니다. 지금 남작을 폐인으로 만들겠단 말입니까?”
“녀석을 풀어줄 수도, 죽일 수도 없다면 이것이 최선이다.”
“그런다고 녀석이 순순히 검술을 내어줄 것 같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설마 고문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펠론 자작의 말에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이 녀석에게 독을 썼지만,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검술은 녀석이 가지고 있다. 녀석과 더 이상 악연을 이어갈 수는 없지.”
“그럼 어쩌실 생각입니까?”
“그저 방법만 달라졌을 뿐 계획은 같다. 녀석을 가문의 여인과 혼인시켜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으면 녀석도 자식에겐 검술을 전할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모두 가문을 위한 길이다. 너 또한 이것이 최선임을 알지 않느냐! 그저 방법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오러만 동결시킬 뿐 녀석에 대한 처우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부디 이번이… 남작에게 마지막 시련이 되었으면 합니다.”
백작의 말에 펠론 자작도 이것이 유일한 방법임을 부인할 수 없는지 힘겹게 병을 집어 들고는 집무실을 벗어났다.
* * *
“…아가씨.”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던 이엘이 천천히 눈을 뜨곤 탁자 앞에 놓여있는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군요. 내성을 폭파시키라니…”
“역시 이번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에요. 카일을 구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다만 제가 놀란 건 멀린 마법사가 왜 이런 부탁을 했냐는 것이죠.”
“내성에 폭발이 일어나면 당연히 사람들이….”
“아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정작 중요한 건 카일이 있을 만한 곳을 신속히 파악하고 그를 구해내는 거죠. 그런 건 지도만 확인해선 불가능해요. 그러니 길을 잘 아는 길잡이가 필요하죠.”
“그럼 아가씨께서 지도를 그려 보내신 게…?”
“제가 직접 그들을 안내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도 내성에서 수정구를 터트려 달라는 건…….”
“설마… 카일을 구할 생각이 없는 걸까요?”
“아니, 그 반대겠죠. 그들은 이미 카일이 있는 곳을 정확히 알고 있단 말이에요. 그것도 짧은 시간 그를 구해 달아날 정도로 말이죠.”
“그럼… 저희는 어쩌죠?”
“어쩌긴요. 그들의 부탁을 들어줘야죠.”
이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정구가 든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