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탈주(3)
“왜 그냥 보내신 겁니까?”
멀어져 가는 시안느를 말없이 바라보던 멀린을 향해 코퍼가 다가와 물었다.
“상황만 본다면 두 사람이 배신했을 가능성보단 백작에게 속았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시안느 경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온전히 믿을 수는 없죠. 만약 거짓이라면 우리 모두 위험해질 테니까요. 제가 저들에게 바라는 건 그저 백작가를 흔들어줄 작은 변수정도일 뿐입니다.”
“그럼 오늘 계획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카일 님이 내성에서 옮겨진다면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소가 달라졌으니 어쩔 수 없죠. 그나마 다행이라면 터그 형제들이 내일 저녁쯤이면 백작성에 도착할 겁니다. 그들이 도착하면 좀 더 안전하고 확실하게 구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곳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작가에 적당히 흘려주십시오. 우리가 관여했단 흔적을 남기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코퍼가 고개를 숙이며 술집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그만 가실까요. 시안느 경의 말대로 늦기 전에 성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멀린이 고개를 돌려 차가운 돌벽에 기대어 서 있는 세인을 바라보았다.
“정말… 우리만으로 카일 님을 구할 수 있을까요?”
세인이 불안한 듯 멀리 영주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잊으신 겁니까? 저희에겐 이게 있습니다.”
멀린이 로브 깊숙이 감춰둔 작은 수정 막대를 꺼냈다. 겉보기엔 작고 투명한 수정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표면에 작고 미세한 각인이 빽빽하게 새겨진 마법 수정이었다.
멀린은 수정을 손바닥에 올린 뒤 마력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투명했던 수정이 점차 회색빛으로 물들며 손바닥 위에서 천천히 떠올라 빠르게 회전하더니 갑자기 허공에서 딱 멈춰 섰다. 마치 이곳으로 가야 된다는 듯 수정 막대의 뾰족한 끝부분이 정확히 영주성을 향해 있었다.
“팔에 채워진 팔찌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카일 님이 어디에 계시든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그러니 세인 경도 힘을 내십시오. 그래야 카일 님을 무사히 구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멀린이 수정을 다시 로브 깊숙이 밀어 넣으며 말했다. 수정 막대는 전날 카일이 맡긴 팔찌를 재수정하며 불필요한 마법을 제거하고 대신 연동시켜 놓은 것이었다. 위급시 신호를 보내거나 수정 막대를 통해 팔찌를 추적할 수 있었다. 원 목적은 복잡하고 넓은 전장에서도 쉽게 카일의 위치를 파악하고 위급시 신속히 구원군을 보내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카일이 차를 마시고 쓰러지는 위급한 순간에도 잊지 않고 팔찌를 통해 위급상황을 알린 덕분에 멀린이 카일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 * *
“에몬드입니다.”
“들어오너라!”
팰론 자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사 에몬드가 집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펠론 자작은 에몬드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여전히 책상 위에 높이 쌓여있는 두꺼운 서류들을 읽기에 바빴다.
“무슨 일이지?”
“조금 전 영애와 동행했던 두 사람이 성문을 통해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펠론 자작이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에몬드를 바라보았다.
“성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느냐?”
“특별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에몬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펠론 자작이 잠시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생각에 잠긴 듯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두들겼다. 이엘과 함께 백작성으로 들어온 두 사람 중 한 명은 펠론 자작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킨스 영지에서 란타나 기사단 소속 기사 다수를 꺾을 정도로 놀라운 검술을 선보인 여기사 세인이었다. 당시 그녀의 놀라운 활약 덕분에 펠론 자작도 그녀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를 신경 쓰게 만든 인물은 따로 있었다.
“세인 경과 함께 있던 중년인의 정체는 알아보았느냐?”
“죄송합니다. 여관 안에서도 대부분 방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용하는 말투와 언어, 행동까지 왕실의 정통예법이 드러났습니다.”
“왕실 예법…? 왕실과 관련이 있거나 정통귀족일 가능성이 있단 말이군.”
펠론 자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느 쪽이든 백작가의 입장에선 좋지 않았다. 하지만 펠론 자작의 생각과 달리 멀린은 귀족이 아닌 평민이었다. 다만 오랫동안 왕립 마탑에서 귀족 마법사들의 심부름을 하며 자연스럽게 왕실 예법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뿐이었다.
“이미 떠났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지, 아무 일 없길 바라는 수밖에…”
펠론 자작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일론 남작, 이송 준비는 끝났나?”
“바로 이동할 수 있게 준비해 놓았습니다.”
“좋아, 이왕 시작했으니… 끝을 내야겠지.”
자작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집무실을 벗어나 내성 성문 앞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다수의 기사들에게 철저하게 둘러싸인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펠론 자작이 곧장 마차로 다가가 문을 열자, 그곳엔 카일이 커다란 들것에 몸이 단단히 결박된 상태로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어떤가? 다른 문제는 없었나?”
“명하신 대로 깨어나지 못하도록 계속 약을 사용하고 있어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다행이군.”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문을 닫았다.
“동쪽 고성으로 간다.”
펠론 자작이 말 위에 올라 직접 선두로 나와 내성 성문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향했다.
팰론 자작이 향하는 동쪽 고성은 외성 성벽을 따라 달리면 나오는 작은 고성으로, 예전엔 외성벽 가장 외곽을 지키던 성이었지만 그린넨 백작가의 세력이 넓어지고 새롭게 외성을 확장하면서 아무도 살지 않아 버려진 고성이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고성 외곽으로 새롭게 병력이 배치되고 출입이 통제되기 시작된 비밀스러운 곳이기도 했다.
“펠론 자작이 직접 날 찾아오다니, 이거 영광이군.”
고성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들려온 탁하게 가라진 기괴한 음성에 절로 찌푸려지려는 얼굴을 참아낸 자작이 그늘진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오. 마법사 미로스.”
자작의 말에 어둠 속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자작께서 직접 날 찾아줄 거라곤 정말 생각지도 못했군.”
깊게 눌러쓴 로브를 걷어내자 깡마르고 왜소한 몸에 깊은 주름이 파인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을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오.”
“클클, 그렇겠지, 자작 같은 사람이 나 같은 흑마법사를 좋아할 리가 없지.”
미로스가 웃으며 자작의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저 녀석인가 보군, 지난번 아야기한 녀석이?”
“그렇소.”
“그럼, 어디 얼마나 대단한 녀석을 데려왔는지 한번 볼까?”
미로스가 자작을 지나쳐 죽은 듯 누워있는 카일에게로 다가가 들고 있던 검녹빛 보석이 박힌 지팡이로 덮여있던 천을 밀어냈다.
“덩치만 크지 완전 어린아이군. 이 녀석이 정말 상급 엑스퍼트란 말인가?”
“이미 녀석의 검술은 확인했소.”
펠론 자작의 말에 미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녀석에게 정신계 마법을 쓰겠다니, 백작도 참 멍청한 짓이군.”
“뭐라!”
“이야길 들어보니 이 녀석, 원래는 백작의 딸과 혼인시키려 한 것 아니었나? 무슨 이유인진 모르지만 이만한 나이에 상급 엑스퍼트러면 소드마스터도 어렵지 않을 듯한데, 이런 녀석을 버리려 하다니, 한심해서 그러지. 쯧쯧!”
미로스가 혀를 차며 말하자 펠론 자작이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바닥에 누워 있는 카일을 내려보았다. 소드마스터, 그 엄청난 경지에 대해 백작은 물론 펠론 자작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상급 엑스퍼트에 오를 수 있는 검술만 얻으면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오. 그저 기억 일부만….”
“그게 바로 문제라는 거요.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해선 말이야. 여기 뇌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데… 마법으로 여길 조작한다면, 과연 온전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노릇이지.”
미로스의 말에 펠론 자작이 더없이 굳어진 얼굴로 바닥에 누워있는 카일을 내려보았다. 정말 카일이 소드마스터에 오를 수 있다면, 지금 공작가를 통해 얻게 될 그 어떤 이익보다도 더 큰 이익과 명예를 그린넨 백작 가문이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백작가는 카일과 척을 졌다. 지금 카일을 깨워 다시 인연을 맺으려 해도 자신을 배신하고 이용하려 한 백작가를 선택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소.”
“큭큭, 나야 상관없지, 그저 백작 덕분에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어 도움이 될까 하고 말해준 것뿐이니 말이야. 자! 그럼 녀석을 마법진까지 옮겨 주시게나.”
미로스가 기괴하게 웃으며 앞장서자 그 뒤를 펠론 자작과 들것을 든 기사들이 뒤따랐다.
미로스가 향한 곳은 자신의 실험실이 위치한 지하가 아닌, 고성에서도 가장 높은 망루탑 꼭대기였다.
“녀석을 마법진 위에 올려놓게.”
“마법진을 굳이 첨탑 꼭대기에 그려 놓은 이유가 있는 것이오?”
“정신 마법을 거는 일반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아나?”
“난 마법사가 아니요. 더구나 당신 같은 흑마법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싶지도 않소.”
“큭큭, 하긴 자네 같은 고지식한 귀족주의자들이 잔혹한 흑마법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지.”
미로스가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고문을 하는 거지,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말이야! 하지만 정신력이 강한 자는 오히려 반발심과 복수심만 키워 역효과가 나지, 그런 자들을 상대할 가장 좋은 방법 역시 고문이야! 단 고문 대상은 녀석이 가장 사랑하는 상대나 가족들이지, 아주 잔인하면서도 고통스럽게 말이야! 그럼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가진 자라도 무너지기 마련이거든.”
“이런… 미친!”
“큭, 맞아! 흑마법사란 족속 중 미친 녀석들이 많아! 그중 가장 미친 자들이 정신계 마법을 특기로 하는 놈들이지. 빌어먹게도 아주 잔인한 녀석들이지.”
미로스의 말에 펠론 자작이 참지 못하고 검을 틀어쥐었다. 아무리 백작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흑마법사를 돕고는 있지만, 이런 이야기까지 들으며 참아내긴 힘들었다.
신나게 말을 이어가던 미로스는 갑자기 일어난 싸늘한 살기에 깜짝 놀라 급히 펠론 자작을 향해 손을 저었다.
“아! 오해하지 말라고. 그렇다고 내가 그런 미친 녀석은 아니니 말이야! 난 이 녀석에게 고문 같은 건 할 생각도 마음도 없어.”
미로스가 웃으며 품 안에서 지팡이에 박힌 보석과 비슷한 검녹빛 보석을 꺼냈다. 그리고는 마법진 중앙에 죽은 듯 누워있는 카일을 중심으로 육망성을 이루는 마법진 꼭짓점에 배치했다.
“고문이 아니면 어떻게 정신을 흔들 생각이지?”
“정신을 흔드는 방법이 꼭 육체적인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지, 오히려 정신적인 고통이야말로 더 참기 힘든 고통이라 할 수 있지.”
“정신적인 고통? 환영 마법이라도 사용할 생각인가?”
“큭, 어디서 들어본 것은 있나 보군. 하지만 그런 마법은 상급 엑스퍼트의 강대한 정신을 흔들 수 없지, 그보다 더 강하고, 더 강대한 존재를 불러내야 해!”
“존… 재?”
펠론 자작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미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존재!”
미로스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바닥에 가볍게 내려쳤다.
지팡이 위에 박힌 검녹빛 보석에서 안개 같은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커다란 마법진을 잠식해 들어갔다.
킥킥킥-
킥킥-
순간 음울한 웃음소리가 주변을 맴돌더니 안개 같은 어둠이 마법진에서 피어오르며 공간을 장악했다.
“몽마라는 악마다! 녀석의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기억을 끄집어내 지속적인 고통으로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 거다.”
“설마! 마계의 악마를 끄집어냈단 말이요?”
“걱정 마라! 일이 끝나면 곧 마계로 돌려….”
키아악-
카악-
갑자기 안개 같은 검은 기운이 출렁이며, 조금 전까지 음울하게 웃으며 주변을 맴돌던 악마의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어둠이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구체를 이루더니 더니 곧 거대한 붉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빌어먹을 흑마법사 녀석 같으니라고! 감히 날 방해해!”
눈동자가 분노한 듯 정확히 미로스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마계의 마왕! 당신이 어떻게…!”
그때였다. 카일의 몸에서 일어난 성스러운 순백의 빛이 강하게 일어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젠장, 겨우 막고 있었건만!”
거대한 눈동자가 분노를 터트리더니 거대한 구체에서 일어난 암흑마기가 곧장 미로스를 붙잡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네놈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고통 속에 밀어 넣어주마!”
“사, 살려줘! 안 돼!”
미로스가 비명을 지르며 펠론 자작에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온몸이 단단히 붙잡힌 미로스는 곧 어둠의 구체에 빨려 들어가더니 마왕의 눈동자와 함께 꺼지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게 대체….”
펠론 자작이 당황한 듯 주변을 살폈지만, 마법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에는 여전히 카일만이 죽은 듯 누워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