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탈주(2)
“남작을 구할 생각이 정녕 없는 것이냐?”
“제가 그를 구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아니면 그를 구할 수 있게 도와주실 건가요?”
이엘이 오히려 되묻자 말문이 막힌 펠론 자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이엘의 시선을 외면했다.
“알아요. 가문에 절 도울 사람이 없음을…. 그러니 지금 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제 의지를 두 분께 알려드리는 거예요. 그럼 적어도 절 이렇게 만든 사람이, 가문을 망하게 한 원흉이 두 분이란 걸 평생 자책하며 살게 할 순 있잖아요.”
“…음.”
“이 정도로 과감하게 행동을 하셨다면 이미 공작가와 혼인동맹이 체결되었겠죠? 어쩌면 절 호위하기 위해 공작가의 기사단이 방문했을 수도 있겠군요.”
이엘의 말에 펠론 자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엘이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내일이면 기사단이 당도할 거다.”
“잘됐군요.”
이엘이 차갑게 웃으며 돌아서 걸어가 버렸다.
“아, 아가씨… 왜 그런…?”
“어쩔 수 없어요. 지금은 아버님께 제 결심이 어떤지를 명확히 알리고, 카일에 미련이 없음을 보여줘야 해요. 그리고, 거짓을 말한 것도 아니에요. 만약 정말 그를 구할 수 없다면… 제 손으로 반드시 가문을 몰락시키고 말 거예요. 반드시!”
“아, 아가씨…?”
“걱정 말아요. 실패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이엘을 씁쓸히 웃으며 무거운 다릴 이끌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엘이 그렇게 시안느와 함께 돌아가 버리자 펠론 자작은 당황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이엘을 바라볼 수밖에는 없었다.
“돌아… 갔느냐?”
“…네”
“다른 말은 없었고?”
“마일론 남작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역시, 녀석을 풀어달라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저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고….”
“그것뿐이냐? 다른 말은 없었고?”
“…알아달랍니다. 가문이 몰락한다면 그건 모두 저와 형님 탓이라고 말입니다.”
탕-
와장창-
분을 참지 못한 백작의 행동에 탁자가 부서져 나가며 찻잔이 사방으로 부서져 흩어졌다.
“고얀 것 같으니라고, 이 모든 것이 저와 가문을 위한 것임을 진정 모른단 말이냐!”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이엘이 저리 강하게 나온다면… 이 혼담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문과 가문의 약속이다. 더구나 상대는 트라발트 공작이다. 절대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야! 이엘도 그걸 알기에 저리 강하게 나오는 거야. …빌어먹을.”
“그럼 차라리 마일론 남작을 풀어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럼 이엘도 원망을 내려놓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녀석은 상급 엑스퍼트다. 이대로 풀어준다고 순순히 물러날 것 같으냐?”
백작이 머릴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계획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그를 기쁘게 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이엘의 선전포고가 머릿속을 혼란스럽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엘의 선언이 단순히 선언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마일론 남작을 풀어달라거나 혼인을 거부했다면 강압적인 방법으로라도 쉽게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은 가문에 대한 복수를 천명하며 이엘이 더 강하게 혼인을 원하고 있느니, 백작이 그녀를 통제할 방법이 어디에도 없었다.
“할 수 없지. 이럴 때 어미라도 살아있으면 좋았을 것을… 하엘과 아엘을 불러오너라! 그 둘이라면 이엘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 거다.”
하엘과 아엘은 모두 정략혼을 통해 일찍 집을 떠난 이엘의 두 언니로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은 이엘에게 두 사람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하! 알겠습니다. 내일 사람을 보내 놓겠습니다. 그럼 마일론 남작은 어찌하실 겁니까?”
“오늘 저녁 은밀하게 동쪽 고성으로 옮기게.”
“알겠습니다.”
* * *
“아마도 오늘 안에 카일을 내성 빼낼 거예요.”
“마법사가 내성으로 들어와 있을 수도 있어요.”
“아버지는 의심이 많은 분이에요. 그런 분이 흑마법사를 내성 안에 숨겨둘 리가 없죠. 분명 내성은 아니지만 언제든 확인할 수 있는 곳에 마법사의 거처가 있을 거예요.”
이엘이 하얀 천을 꺼내 기억을 더듬어 그려나가더니 곧 영주성 전체가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를 만들어 내었다. 그녀가 몇몇 곳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곳에 카일이 있을까요?”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이에요.”
“당장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니, 안 돼요.”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안느를 이엘이 붙잡았다.
“저와 시안느는 움직일 수 없어요. 모르긴 해도 우리 두 사람을 감시하는 눈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럼… 어쩌죠?”
“내부에 사람이 없다면 외부에서 불러와야죠.”
이엘이 서신을 적어 지도와 함께 시안느에게 내밀었다.
“멀린 마법사님께 전해주세요. 그리고 오늘 안에 꼭 세인 경과 성을 떠나달란 말도 잊지 마시고요.”
“성을 떠나다니요? 두 사람이 떠나면….”
“우리가 영주성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감시자들이 붙었을 거예요. 멀린 마법사나 세인 경도 우리와 함께 움직였으니 아직 감시하는 자들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 두 사람도 위험해요.”
“아니, 서둘러서는 안 돼요. 내성을 벗어나면 미행이 붙을 수 있어요. 그러니 조심해야 해요.”
“걱정 마세요, 아가씨.”
시안느가 지도와 서신을 품 안에 밀어 넣고는 곧장 내성을 빠져나와 외곽에 자리한 작은 주택으로 향했다. 그녀가 영애의 호위 기사로 정식서임을 받으면서 백작가로부터 받은 작은 주택이었다. 이곳은 마음 편히 검술 수련을 할 수 있도록 건물 중앙에 마당을 둔 중정형 주택으로,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외부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었다. 시안느는 일단 눈에 띄는 기사단의 정복을 벗고 평범한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옆집 뒷문을 통해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복잡한 골목을 돌아 미행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멀린과 세인이 머무는 여관으로 향했다.
“멈춰!”
주변을 맴돌며 감시자들의 시선을 피해 여관으로 들어갈 기회를 엿보던 시안느의 귓가로 차갑고 싸늘하지만 너무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와 급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목에 차갑고 날카로운 검날이 닿았다.
“…세인 경!”
시안느가 당황한 듯 세인을 불렀지만, 그녀는 오히려 더욱더 차갑고도 깊은 살기를 뿌리며 검날을 위협적으로 내밀 뿐이었다.
“카일은 어디에 있지!”
“당신이… 그걸 어떻게!”
“말해! 카일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도대체 카일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세인이 시안느에게 바짝 다가서며 당장이라도 죽일 듯 소리쳤다.
“그건… 일단 멀린 님을 만나게 해 다오. 이후에 모든 것을 설명하겠다.”
“빌어먹을, 당장 말하란 말이야!”
세인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붉게 충혈된 눈으로 시안느를 노려보았다.
“세인 경의 마음은 알지만 이럴 시간이 없어요. 카일을 위해서라도 제발, 멀린 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분노한 세인을 달래며 시안느가 사정하듯 말했다.
“세인 경, 뒤로 물러나세요.”
그때였다. 골목 안쪽 어두운 그늘 안에서 멀린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세인 경의 분노나 풀 때가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건 카일 님을 구할 작은 단서와 방법입니다. 알겠습니까?.”
언제나 온화하던 멀린이 강하게 말하며 세인의 검을 밀어내고 시안느의 앞에 섰다.
“일단 이야기는 들어보죠. 따라오십시오.”
멀린이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시안느가 그 뒤를 재빨리 따라붙었다. 멀린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허름하고 낡은 작은 술집 안으로 거리낌 없이 밀고 들어갔다.
“여긴… 어디죠?”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부서진 집기와 부러진 검, 그리고 혈흔들이 이곳에서 제법 치열한 전투가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려주었다.
“멀린님! 일단 처리는… 헉!”
건물 안쪽 지하에서 올라오던 브린이 깜짝 놀라 검을 반쯤 뽑았지만 멀린이 손을 들어 막았다.
“괜찮습니다. 물러나세요.”
“하지만… 우릴 배신했습니다.”
“아니! 저와 아가씬 배신하지 않았어요.”
시안느가 화가 난 듯 버럭 소릴 질렀지만 브린은 여전히 시안느를 노려보며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그만, 여기서 말싸움이나 한다고 카일 님을 구할 수는 없어요.”
시안느와 브린의 사이에 끼어든 멀린이 두 사람을 노려보자, 브린이 살며시 검에서 손을 놓으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시안느는 오히려 멀린에게 다가서며 추궁하듯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설마 평민을 공격한 건가요?”
“그전에 먼저 하실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먼저 대답을 들어야겠어요. 평민을 공격한 겁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긴 했지만, 걱정 마십시오. 영지의 평민들은 아닙니다. 오히려 백작가에서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일단 이 정도만 말씀드리죠. 더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정말 믿어도 되나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들은 영지의 평민들이 아닙니다.”
멀린이 부서지고 망가진 의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의자를 가져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앉으시죠.”
“고마워요.”
시안느가 의자에 앉을 무렵, 이미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코퍼와 용병들도 주변으로 몰려와 하나둘씩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세히 보면 모두 시안느가 빠져나갈 퇴로를 막아선 형상이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시죠?”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여관을 감시하던 자들이 있었다는 것과 그들이 영주가 보낸 기사들이란 것, 마지막으로 카일 님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 정도입니다.”
“설마… 기사들과 전투를 벌인 건가요?”
시안느가 다시금 술집 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쩌면 영지민이 아닌, 감시하던 기사들과 전투가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세인과 코퍼 용병대라면 하급 기사 정도는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리 무모해 보이는 건가?”
벽에 기댄 채 이야기를 듣던 세인이 차갑게 말했다.
“그럼… 여긴?”
“알 것 없다. 어서 카일 님이 있는 곳이나 말해라.”
“…그건 저도 잘 몰라요.”
“뭐!”
세인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 살기 어린 눈으로 시안느를 노려보았다.
“그럼 왜 이곳에 온 겁니까?”
“아가씨께서 여기 계신 분들도 위험할 거라며 절 보내셨어요.”
시안느가 지도와 서신을 꺼내 멀린에게 내밀었다.
“아가씨의 서신과 내외 성의 지도에요. 아마도 오늘 저녁쯤엔 카일을 내성에서 외부로 옮길 거라며 여러분께 도움을 청하셨어요.”
시안느의 말에 멀린이 이엘의 서신을 차분히 읽어 내려가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정신계 마법… 이번 일에 흑마법사까지 관여했단 말입니까?”
“저도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어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아가씨를 펠론자작께서 안고 오셨으니까요.”
“이번 일에 대해 전혀 몰랐단 말입니까?”
“맞아요. 아가씨께선 카일을 해칠 분이 아니에요. 만약 이 사실을 아셨다면 절대 카일과 함께 백작가로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시안느의 말에 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기밀이라 할 수 있는 내외성의 지도와 구조까지 그려줄 정도라면 이엘과 시안느가 이번 일에 관여되었다고 보긴 어려웠다. 물론 아직까진 짐작일뿐 확신은 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믿어 들이죠. 대신 시안느 경과 이니엘 아가씨께서 해 주실 일이 있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최대한 돕겠어요.”
“카일 님을 구하려면 백작가의 전력을 분산시켜야 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되죠?”
멀린이 가죽 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수정구를 꺼내 시안느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스크롤과 비슷한 마법 물품입니다. 안정성을 위해 특정한 각인이 추가되어야 활성화가 되지만… 이건 수정을 파괴하면 마법이 발동되도록 만든 겁니다.”
“이걸… 왜?”
시안느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내성 안에서 터트려 주십시오.”
“네에!?”
“백작가를 혼란시킬 가장 확실하면서도 완벽한 방법입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멀린이 시안느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 이 수정구는 터그 형제들이나 코퍼 용병대가 사용한 것보다 더 강한 마나석과 마법을 사용해 만든 수정구로, 내성에서 폭발한다면 백작가로서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는 없을 것이었다.
“그건….”
“저흰 카일 님을 구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두 분께서 도움을 안 주셔도 얼마든지 혼란을 야기할 수 있지만, 그럼 그만큼 많은 영지민들이 다치게 될 겁니다.”
멀린이 수정구를 다시 가죽 주머니에 넣어 시안느에게 내밀었다.
“부탁드립니다.”
“휴… 알겠어요. 아가씨께 말씀드려보겠어요.”
멀린이 내민 주머니를 힘겹게 받아든 시안느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