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 탈주(1)
“카, 카일이… 왜?”
“얼마 전 트라발트 공작이 혼인동맹을 제안해왔다.”
“가주께서 제안을 받아들였단 말입니까?”
“상대가 공작가의 후계자다. 여기에 거부하기 힘든 제안까지…. 가문에도, 이엘에게도 나쁜 선택이 아니다.”
“…왜 아가씨께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죠? 얼마든지 전달해 주실 수 있었잖아요.”
왕성에는 그린넨 백작가의 사람들이 머물 대 저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덕분에 왕성을 떠나기 며칠 전까지도 서로 통신을 주고받았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마일론 남작이 왜 갇힌 겁니까? 그는 아가씨를 구해주고 직접 가문까지 안전히 데려와 준 은인입니다. 보답은 못 할망정… 가두다니요!”
시안느의 말에 펠론 자작이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이엘을 바라보았다.
“맞다. 마일론 남작은 가문의 은인이다. 그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 부끄럽게도 가주께선… 마일론 남작의 검술을 원한다.”
“마, 말도 안 됩니다. 동부의 맹주인 대 그린넨 백작가가 가문의 은인을 상대로 어떻게 그런… 이는 강도질이자, 강탈입니다.”
시안느의 원색적인 비난에 펠론 자작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지만,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휴… 그래, 맞는 말이다. 정통 순혈 귀족으로 높은 명예와 긍지를 가진 백작 가문이 할 일이 아니겠지. 하지만 가주께선 이미 마음을 굳히셨다. 더 이상 어떤 반론도 용납하지 않으실 거다.”
펠론 자작이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는 길게 한숨을 쉬며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선택받은 정통 순혈 귀족만이 고귀한 귀족으로서 특권을 누려야 한다는 전형적인 순혈 귀족주의자로, 누구보다 귀족의 명예와 긍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펠론 자작에게 가문의 은인을 상대로 강탈을 자행하는 백작의 행위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될 비겁한 행위였다. 때문에 그는 이번 백작의 계획을 가장 극렬히 반대한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가문의 최종결정은 결국 가주가 내리며, 가문의 사람들은 그 결정에 따라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카일은 귀족원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은 정통귀족입니다. 그런 귀족을 납치 감금해 검술을 강탈하려 하다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왕실은 물론 모든 귀족들이 백작가를 비난할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펠론 자작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사실은 가문에서도 극비다. 그런데도 너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건 이엘 때문이다. 힘들어할 녀석을 잘 다독여 달라고 해주는 말이다. 부디 다른 마음을 먹지 않게 잘 달래 주거라!”
“하지만….”
“가문을 위한 일이다. 이미 가주께서 결정 내린 이상 가문에 소속된 사람은 절대 명을 거역할 수 없다. 그건 백작가에 충성을 맹세한 나 역시 마찬가지다. 너 또한 그리넨 백작가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라는 걸 잊지 말거라!”
펠론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에 놓인 검을 응시했다.
“남작의 검이다. 가문을 위한 혼인동맹이지만 녀석에게 차마 남작을 잊으라고는 하지 못하겠구나. 녀석이 이 검을 간직하고 싶어 한다면 말리진 않겠다고 전해 다오.”
“카일… 남작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천재 검사를 죽일 수는 없지. 기억 일부를 지우고 조작해 적당한 신분을 만들어 준 다음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검술을 전수하게 할 것이다.”
“정신 마법!”
“녀석이 깨어나면 알려주어라. 남작은 가문의 일원으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평생을 걱정 없이 살아갈 것이다.”
“…그걸 과연 아가씨께서 믿으시겠습니까? 가문이 어려움에 처하면 가장 먼저 희생될 사람은 카일이 될 겁니다.”
“그건 내가 결사적으로 막을 것이다.”
“한 번 신념을 꺾었으니 두 번이 어렵겠습니까? 가주의 명이란 명분이 있으니 좀 더 쉽게 신념을 꺾을 겁니다. 지금처럼”
시안느의 말에 펠론 자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인 시안느를 잠시 노려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방을 벗어났다.
“하!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시안느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굳게 닫혀버린 문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결심을 굳혔는지 입술을 깨물고 검집을 말아쥐었다.
“쓸데없는 짓이야!”
“아가씨!”
갑자기 들려온 냉정한 말에 시안느가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혼자선 카일을 구할 수 없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아… 가씨,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요. 당장….”
시안느가 당장 눈물을 떨어뜨릴 듯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이엘을 돌아보았다.
“아니! 카일을 구하려면 좀 더 냉정해져야 해. 지금은 카일이 어디에 갇혀있는지 알아내는 게 먼저야!”
“하지만… 자작님의 말론 카일의 기억을 지우려….”
“걱정 마!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어. 카일은 와이번과 맹약을 맺었어. 아무리 강력한 정신계 마법이라도 카일에겐 통하지 않아!”
“아! 맞아요.”
그제야 시안느가 다소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와이번과 맹약을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정신적 교감까지 이루었기에, 기억을 조작하려면 와이번과 맹약자의 정신을 동시에 제압해야만 했다. 하지만 정신 마법을 걸어 상대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상의 정신을 가장 피폐하게 만들어 약해진 정신을 제압해야 하지만, 맹약자인 경우 와이번의 정신까지 제압해야 하기에 사실상 정신 마법을 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 좀 일으켜 주겠어?”
“어쩌시려고요.”
“가문이 내게 전쟁을 선포했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아가씨…!”
“이젠 왕성에서 세운 계획을 실현할 수밖에는 없을 것 같아.”
이엘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목에 걸린 블랙 사파이어를 살며시 말아 쥐었다.
“카일… 조금만 기다려줘요. 반드시 당신을 구하겠어요.”
이엘이 다짐을 하듯 중얼거리다가 시안느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침상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버님께 가겠어요.”
이엘이 시안느의 부축을 받으며 불완전한 몸을 이끌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가씨!”
백작의 집무실로 다가서자 호위기사들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왔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백작님께선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드려주세요.”
“아가씨… 죄송합니다.”
호위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좋아요. 그럼 트라발트 공작의 이름으로 백작께 만남을 청하죠, 이것도 거절한다면 제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절대 공작과의 혼담은 이루어질 수 없을 거예요. 그대로 전해주세요.”
이엘의 단호한 말에 호위기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공작가의 혼담을 받아들인 이상 혼인만 하지 않았을 뿐 이미 이엘은 공작가의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다.
“들어오너라!”
집무실 안에서 백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들어가도 되나요.”
“무, 물론입니다. 영애”
이엘이 허리를 펴고 고개를 세우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었다. 백작이 집무실 의자에 앉아 이채를 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바탕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찾아올 거란 생각을 완전히 뒤집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으냐?”
백작과 함께 참전 시 병력구성을 의논하고 있던 펠론 자작이 다가왔지만, 이엘이 싸늘하게 손을 들어 막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어요.”
“분명 말하마. 마일론 남작을 풀어줄 수는 없다.”
백작이 이엘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세요.”
“뭐?”
백작은 물론 펠론자작과 시안느까지 당황한 얼굴로 이엘을 바라보았다.
“정말이냐?”
“물론이에요. 마음대로 하세요. 단, 한 가지만 확인해 주세요.”
“흠… 좋다. 말해 보거라!”
“카일을 가문으로 데려온 건 저예요. 인정하시나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대답해주세요.”
이엘이 무심한 눈으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중요한가?”
“맞아요. 아주 중요해요. 그러니 말해주세요.”
“좋다. 말해주마. 녀석을 데려온 건 이엘 네가 맞다. 이 말을 듣고 싶어 온 것이냐?”
백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이엘을 바라보았다.
“분명 인정하셨으니, 잊지 마세요. 전 이제 더 이상 가문에 어떠한 빚도 없어요.”
“고작 그런 말을 하러 온 것이냐? 가문의 빚? 무엇을 해도 나와 가문이 지금의 널 만들었다는 걸 잊지 말아라! 아무리 공작가와 혼담을 거부한다 해도 넌 반드시 공작가의….”
“그럴 리가요. 전 반드시 공작가로 시집갈 거예요. 가문이 아닌 제 의지로 말이에요.”
“응?”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이엘의 선언에 백작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울고 불며 카일을 살려달라 애원해도 모자랄 판에 순순히 공작가로 시집을 가겠다고 하니, 오히려 백작과 펠론 자작이 불안한 표정이었다. 백작이 그동안 데릴사위를 들이려 했던 것도 이엘의 과감성과 예상치 못한 획기적인 생각들 때문이었다.
“백작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전 그린넨 백작가에 어떠한 빚도 없어요. 그럼 이제 제게 남은 가문의 의미는 단 하나뿐이죠.”
이엘이 백작과 펠론 자작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절 배신한 가문!”
“설마 복수라도 하겠단 말이냐?”
“제가 못할 것 같나요?”
“넌 그린넨 백작 가문의 피를 이었다. 어떻게 그런…!”
“그렇죠, 비겁하게 딸과 조카를 이용해 검술을 빼앗으려 한 비열한 가문의 피를 이었죠.”
이엘의 말에 백작과 펠론 자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이엘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실 거예요. 전 한 번 결심하면 목표를 이룰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지금은 그저 한없어 이렇게 당하고만 있지만, 기억해 주세요. 백작께서 스스로 지금의 절 만드셨다는 것을 말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알고 있는 가문의 비밀도 제법 많군요.”
이엘이 당황하고 있는 백작과 펠론 자작을 뒤로하고 힘겹게 비틀거리며 집무실을 벗어났다.
“아가씨!”
충격적인 이엘의 선언에 잠시 멍하게 서 있던 시안느가 급히 이엘을 부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엘!”
펠론 자작이 달려 나와 이엘을 붙잡았다.
“하실 말씀이 있나요?”
“하… 아무리 마음이 상했다고 해도 가문에 복수를 하겠다니… 어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으냐! 이곳은 널 태어나고 자라게 해준 곳이다. 부모와 형제자매가 살고 있는 곳이란 말이다.”
펠론 자작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저 단순히 혼인을 거부하거나 마일론 남작을 풀어달라고 매달리지 않고, 적극적인 복수를 천명했다. 더욱 큰 문제는 이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가 혼인할 상대는 그저 그런 가문의 후계자가 아닌 차기 공작가의 후계자다. 다시 말해 이엘이 트라발트 공작가의 차기 안주인으로 막강한 권력을 거머쥘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백작이 혼인동맹을 승낙한 것도 비단 거래뿐만 아니라 그녀가 차기 공작부인이 되어 얻게 될 권력과 이후 낳을 후계자까지 염두에 두고 계산한 것이었다. 헌데 이엘이 모든 권력을 이용해 백작가를 무너트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만약 이엘이 정말 가문을 적으로 돌린다면, 백작가가 받게 될 타격은 엄청날 것이다.
“잊으셨나요? 전 이제 가문에 어떠한 빚도 없어요. 오히려 남은 건 가문의 배신으로 인해 잃게 된 것들뿐이죠. 그리고 가문이 망한다고 형제자매가 죽지는 않아요. 작위와 영토, 그리고 카일에게서 빼앗은 검술만 되찾으면 되니까요. 비록 그를 다시 만나긴 힘들겠지만, 이렇게라도 그에 대한 빚을 갚고 싶을 뿐이에요.”
“…아무리 공작부인이 된다 해도 백작가를 쉽게 무너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너 역시 공작가에서 입지를 다지려면 가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절 너무 쉽게 보진 마세요. 그 정돈 제 힘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이엘이 차갑게 웃으며 경고했다.
“항상 고귀한 순혈 귀족에 대해 말씀하시던 분께서 지금 저와 이런 대화를 나누다니…. 이런 게 정통 순혈 귀족의 행동인가요?”
“그건….”
“두 분이 살아가는 이유가 가문의 영광이라면, 이제 가문의 몰락이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될 거예요. 다만… 부탁이 하나 있어요.”
이엘이 잠시 망설이다 슬픈 눈으로 펠론 자작을 바라보았다.
“카일을… 한 번만 만나게 해줄 수 있나요? 그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요. 한 번이에요. 이후 다신 그를 찾지 않을 거예요.”
“…그럴 순 없다.”
“그에 대한 마지막 작별인사예요. 이 정도도 들어주지 못하나요? 어쩜 이 작은 배려가 가문에 대한 제 복수심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단 생각은 하지 않나요.”
이엘의 부탁은 펠론 자작을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녀가 카일을 구하려는 의지를 조금이라도 드러냈다면, 자작은 그녀의 말과 행동을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엘은 마일론 남작에 대한 구명 대신 카일에 대한 미안함과 복수라는 확고한 의지를 더욱 강하게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