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 배신
”카일!”
여관 안쪽에서 이엘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엘?”
카일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이엘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보아온 이엘과는 전혀 다른 여인이 카일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분홍빛 드레스에 긴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땋아 부드럽고 길게 늘어트린 소소하면서도 단정한 모습이었다. 여기에 아름답게 세공된 블랙 사파이어 목걸이를 걸어 화려함을 더했다.
“어때요?”
이엘이 수줍게 물었다.
“아름답군요.”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카일도 오늘은 다른 때와 달라요.”
이엘이 눈을 빛내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제저녁까지 입고 있던 낡고 오래된 레더아머를 벗어버리고 새하얀 셔츠에 검은 조끼 차림이었다. 허리에는 드워프가 만든 두 자루의 검을 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꽃문양이 섬세하게 수 놓인 검은 코트를 입었다. 여기에 멀린이 새로 만든 황금빛 팔찌를 차고 있었다. 여느 귀족들의 화려한 옷차림보다야 소소했지만, 고급스런 원단이나 섬세한 자수만 보아도 그리 뒤떨어지는 복장은 아니었다.
“귀족 가문의 초대에 낡은 아머를 입고 갈 수는 없어 준비했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충분히 멋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가실까요, 영애?”
카일이 웃으며 마차 문을 열었다.
“고마워요, 마일론 남작님!”
“이니엘 영애를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카일이 절도있게 고개를 숙이자 이엘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 올랐다. 곧 그린넨 백작가의 기사 정복을 입은 시안느를 선두로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일과 이엘이 머물던 고급여관은 영주성과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어서, 두 사람이 탄 마차는 얼마 안 있어 영주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영애께서 돌아오셨다. 성문을 열어라!”
성벽의 수문장이 큰소리로 외치자 닫혀있던 내성의 문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뒤이어 수십 명의 기사들이 질서 정연하게 달려 나와 마차를 호위하며 성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너라!”
“작은 아버님.”
마차 문이 열리고, 펠론 자작이 가장 먼저 반갑게 이엘과 카일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펠론 자작님.”
“어서 오게. 그래, 잘 있었나?”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 그런가? 자, 이렇게 서 있을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지.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네.”
“감사합니다.”
펠론 자작이 앞장서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부유한 상인 가문답게, 그린넨 백작가의 내성엔 고급스런 붉은 나무와 다양하고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카일은 그린넨 백작가의 부유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이네!”
펠론 자작이 안내한 곳은 그린넨 백작의 집무실로 4명의 기사가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수준은 중급 엑스퍼트를 갓 넘었군.’
카일이 찬찬이 호위 가사들의 실력을 가늠하고 있을 때, 문 앞을 지키던 호위 기사가 카일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만 무장을 하고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호위 기사의 시선이 카일의 허리에 매인 검으로 향하자 카일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검은 검사에겐 생명과 같은 존재다. 그런 검을 내어달라니.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상대적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기사들로 영주와 성을 지키려면 무기에 대한 통제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 카일은 마지 못해 검집 채 뽑아 호위 기사에게 건넸다.
“잘 보관해 주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호위 기사가 검을 받아 뒤로 물러나자 펠론 자작이 밝게 웃으며 문 앞에 섰다.
“형님! 조카가 돌아왔습니다.”
“들어오너라!”
집무실 안쪽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게.”
이엘과 카일이 펠론 자작을 따라 문을 넘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중년의 신사가 창밖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아버님!”
이엘이 떨리는 음성으로 백작을 불렀다.
“돌아… 왔느냐?”
중년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엘을 바라보았다.
“수고했다.”
“죄송해요. 하명 하신 일을 완수하지 못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백작이 고개를 흔들며 이엘의 옆에 서 있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마일론 남작인가?”
“카일이라 합니다.”
카일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딸아이를 무사히 데려다줘서.”
“아닙니다.”
“일단 앉지.”
백작이 한쪽에 놓여있는 고풍스런 의자를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전,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제가 하겠어요.”
이엘이 펠론 자작을 대신해 일어나려 했지만 자작이 손을 흔들었다.
“앉아 있어라! 손님이 계시지 않느냐.”
펠론 자작이 이엘을 밀어내며 직접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곧 집무실 안으로 향긋한 차향이 퍼져나갔다.
“모트 자작을 이겼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상급 엑스퍼트인 모트 자작을 이겼으니 최소한 같은 경지에는 올랐다는 말인데, 운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겸손한 것 아닌가?”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모트 자작과 결투를 하기 며칠 전에야 경우 상급 엑스퍼트에 올랐습니다. 만약 조금 더 일찍 자작을 만났더라면 이길 수 없었을 겁니다.”
“하하, 며칠 전이라니…! 모트 자작은 이미 오래전 상급에 진입한 뛰어난 검사야. 며칠 전 상급에 오른 실력으로 완숙한 실력자를 이겼다니 정말 믿기 힘든 말을 하는군.”
“제가 익힌 마나 연공검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 가능했을 뿐입니다.”
“문제가 있은 검술로 모트 자작을 이겼다니 더 궁금하군, 혹 말해줄 수 있겠나?”
“어렵진 않습니다. 제가 익힌 마나 연공검은 오러가 너무 강맹합니다.”
“강력한 오러라면 더 좋은 것 아닌가?”
“오러가 강하면 상대를 압도할 수는 있으나, 자칫 잘못하면 신체가 오히려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내릴 수 있죠.”
“하지만 자넨 익히지 않았나?”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저희 가문 사람들은 대대로 저처럼 강인한 신체를 타고 나 별문제 없이 익혔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렵죠.”
“허허, 강맹한 오러를 견디지 못한다면 검술을 익히지는 못한단 말인가?”
“그래서 후세를 위해 새롭게 검술을 개량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강인한 신체를 가진 후손만을 바랄 수는 없으니까요.”
“검술을… 개량한다? 그게 가능한가?”
그린넨 백작의 눈에 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글쎄요?”
카일이 가만히 웃으며 입을 다물었지만 백작은 카일의 표정에서 이미 그가 상당한 성과를 얻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손님을 앉혀 놓고 계속 질문만 던졌군.”
그린넨 백작이 미소를 지으며 펠론 자작을 돌아보자 자작이 찻잔을 들고 다가왔다.
“실브렌이란 차라네. 죽음의 호수 아래에서만 자생하는 귀한 수초를 가공해 맛과 향이 독특하고, 장복하면 백독을 막아준다는 신비의 차라네.”
“그렇습니까?”
카일이 찻잔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은은하면서도 알싸한, 독특하면서도 기분 좋은 향이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향이 좋군요.”
“이 차는 향보단 맛이 좋다네.”
백작의 말에 이엘이 먼저 조심스럽게 찻잔을 기울였다.
“정말 좋아요.”
이엘이 환하게 웃으며 천천히 차를 즐겼다. 그 모습에 카일 역시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
카일이 짧은 탄성을 터트렸다. 향긋하고 알싸한 향기가 몸 전체로 퍼져나가며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줬다.
“이런 차는 처음입니다.”
“물론 그럴 거야!”
그린넨 백작이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찻잔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혹, 그린넨 백작 가문에 대해서 들어보았나?”
“상인 가문이란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맞아! 그래서인지 대영주들 가운데 가장 약한 세력으로 알려져 있다네. 상급 엑스퍼트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 때문에 오래전부터 우리 백작가는 상급 엑스퍼트를 영입하려 노력해 왔지, 물론 대부분 실패를 했지만…. 헌데 이니엘이 자네를 데릴사위로 들이겠다고 하더군. 이제 갓 성인이 된 천재 검사를 말이야.”
쨍-
그때였다. 갑자기 찻잔을 떨어트린 이엘이 의자에서 기절한 듯 쓰러져 버렸다.
“…이엘!”
“걱정 말게. 그저 약에 취한 것뿐이니 말이야.”
백작의 말에 카일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서부터 점차 마비가 일어나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짓입니까?”
카일이 소리쳤지만, 백작은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말을 이었다.
“자넬 가문으로 받아들인다면 가문의 오랜 숙원을 이룰 기회이니, 백작가로서는 마다할 까닭이 없었지…. 헌데 얼마 전 트라발트 공작께서 거부할 수 없는 제안과 함께 혼인 동맹을 제안했네, 이엘을 자신의 후계자와 혼인을 시키겠다고 하더군.”
“그게 제게 약을 쓴 이유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오랜 가문의 숙원을 풀어줄 자네 역시 포기할 수 없어서 말이야!”
“…절 어쩌실 생각입니까?”
“나와 친분이 있는 흑마법사가 하나 있다네, 아마도 다시 깨어났을 땐 그린넨 백작가의 충실한 기사가 되어 있을 걸세.”
“이 사실이 알려지면… 대륙의 마법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걱정 말게.”
그린넨 백작이 불길한 미소를 띄웠다.
“빌어먹을!”
카일이 필사적으로 신성력을 움직여 마비를 풀어보려 했지만,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상급 엑스퍼트가 대단하긴 하군!”
백작이 천천히 일어나 쓰러져 있는 이엘에게 다가가더니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다. 모두 너와 가문을 위한 선택이란다.”
백작의 말에 이엘이 부릅뜬 눈으로 백작을 바라보다가 결국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펠론!”
“형님!”
“이엘을 처소로 옮기게. 그리고 녀석을 지하에 가두어 놓게.”
“형님… 꼭 이렇게 하셔야겠습니까?”
꽝!
“펠론! 이미 끝난 이야기다. 또다시 너와 논쟁을 해야 한단 말이냐!”
백작이 화가 난 얼굴로 펠론 자작을 노려 보았다.
“휴… 아닙니다.”
펠론 자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끌어내라!”
“알겠습니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들이 쓰러져 있는 카일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물러가겠습니다.”
펠론 자작이 이엘을 안아 올리며 말했다.
“모두 가문을 위한 일이야! 그걸 잊지 마라.”
“잊지 않겠습니다.”
“나가봐라!”
펠론 자작이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을 벗어났다.
“자작님.”
호위 기사가 펠론 자작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이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위 기사가 카일의 검을 내밀었다. 펠론 자작은 잠시 검을 바라보다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이엘을 바라보며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따라오게.”
“알겠습니다.”
펠론 자작이 이엘을 안고서 곧장 내성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엘의 처소로 들어섰다.
“아가씨!”
펠론 자작에게 안겨 오는 이엘의 모습에 깜짝 놀란 시안느가 급히 다가왔다.
“넌 그만 검을 내려놓고 돌아가거라!”
“알겠습니다.”
호위 기사가 검을 탁자에 내려놓고 돌아가자 펠론 자작이 이엘을 침상에 눕히곤 시안느를 바라보았다.
“…이 검의 주인은 지금 갇혀있다.”
“네에?”
펠론 자작의 말에 시안느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