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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244화 (244/404)

244. 그린넨 백작가(2)

”카일, 저와 잠시…!”

“카일 님!”

멀린이 카일에게 다가왔다.

“이제 도착하신 겁니까?”

“네.”

카일이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서자 멀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런! 다치셨습니까?”

루퍼트가에서 급히 달려오느라 찢어지고 갈라져 넝마가 된 레더아머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멀린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 다치다니요?”

멀린의 외침에 벤치에 앉아 있던 이엘이 황급히 다가왔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일이 좀 있어, 엉망이긴 하지만 다친 곳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일이 이엘을 안심시킨 뒤 고개를 돌려 멀린을 바라보았다.

“마침 잘 되었군요. 이걸 한번 봐주십시오.”

카일이 급히 화제를 돌리며 멀린을 향해 정교하게 세공된 팔찌를 내밀었다.

“이건?”

멀린이 건네받은 팔찌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세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아요?”

“걱정 마십시오.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애써 웃음으로 이엘을 안심시키면서도, 그의 관심은 온통 멀린의 손에 들린 팔찌로 향해 있었다.

“대단한 팔찌군요. 어디서 나신 겁니까?”

“대충 선물 받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카일이 슬쩍 이엘을 바라보자 곧 카일의 뜻을 이해한 멀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바로 착용하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하신 생각입니다.”

“혹시 문제가 있습니까?”

“일종의 보호 마법과 인식마법이 걸려있습니다. 주인이 아닌 자가 착용하면 반발이 일어나죠. 이런 방식은 고위 마법일수록 반발이 심합니다. 만약 그대로 착용했다면 신체 내부에서 충격파가 일어나 심각한 내상을 입었을 겁니다.

“…역시!”

팔찌를 건네던 노인의 말을 떠올리며, 카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만약 망설임 없이 팔찌를 찼다면 큰 곤욕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이 정도는 얼마든지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잘됐군요. 아! 그리고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덕분에 안전하고 빠르게 백작령으로 올 수가 있었습니다.

카일이 품 안에서 제법 큰 수정구를 꺼내 내밀었다. 동부 하늘 탑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멀린이 만든 수정구였다.

“잘 쓰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이걸 잠시만 맡아 주십시오.”

카일이 목에서 커다란 블랙 사파이어가 정교하게 세공된 아름답고 화려한 목걸이를 풀어 멀린에게 내밀었다. 시카니스가 그간 쭉 수정으로 만든 무속성 아공간석에 머물고 있었기에, 파르트의 도움으로 새롭게 만든 아공간석이었다. 파르트는 카일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정교한 세공술과 장식을 더해 목에 걸고 다니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목걸이를 만들어 버렸다.

“카일 님은 이제 남작이란 작위를 가진 귀족이십니다.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보석 목걸이 정도에 부담을 가지셔서야 되겠습니까?”

“하하, 아직은 좀….”

“그래도 익숙해지셔야죠. 시카니스가 잠들어 있는 아공간석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블랙 사파이어 아공간석을 목에 걸었다.

“못 보던 목걸이군요.”

갑작스런 목소리에 카일이 고개를 돌렸다. 멀린과의 대화에 빠져 이엘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새로 만든 아공간석 입니다.”

“잠시 볼 수 있나요?”

이엘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카일은 잠시 망설이다 목에 걸고 있던 블랙 사파이어 목걸이를 내밀었다.

“아! 너무 아름다워요. 도대체 누가 이걸 만들었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침울하게 굳어있던 이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미소를 지으며 연신 탄성을 터트렸다. 그녀는 동부 일대의 대영주인 그린넨 백작가의 영애로서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많은 파티나 무도회는 물론 고위 귀족가의 영애나 귀부인들이 주최하는 여러 모임에 참가했으며, 자연스레 수없이 많은 귀금속과 보석을 섭렵했다. 그만큼 보석과 귀금속을 보는 그녀의 안목은 여느 전문가보다 뛰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지금껏 카일의 아공간석 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목걸이는 본 적이 없었다.

“우, 우연히 좋은 세공사를 만났습니다.”

“대단한 세공사가 틀림없어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블랙 사파이어를 이렇게 화려하게 만들어 놓다니, 정말 대단해요.”

이엘의 말에 카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트는 커다란 블랙 사파이어의 표면에 정교하게 마법진을 새긴 다음, 그 위에 백금을 정교하게 상감, 기하학적인 마법진의 문양을 자연스럽게 부각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얇게 뽑아낸 가느다란 미스릴을 여러 번 꼬아 줄을 만들었다.

“카일, 이 아공간석 내일 하루만 제가 지니고 있으면 안 될까요?”

“네?”

“멀린 마법사님께 맡기려던 거잖아요. 절 믿고 하루만 부탁드려요.”

“그건….”

갑작스런 이엘의 부탁에 카일이 잠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간절한 표정으로 사정하는 이엘에 카일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 습니다. 내일 하루만 맡아 주십시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루입니다.”

“알겠어요. 갑작스런 부탁에 당황했을 텐데… 고마워요.”

“아닙니다. 다음엔 제가 좋은 목걸이를 하나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어머! 정말이죠?”

“물론입니다.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킵니다.”

“기대하고 있겠어요.”

카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좋아요. 그럼… 전 이만 숙소로 돌아가 보겠어요. 내일 백작가로 돌아가려면 아무래도 준비할 게 많을 것 같거든요.”

이엘이 환하게 웃더니 총총거리며 뛰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본 멀린이 입을 열었다.

“파르트 님이 한 번 더 고생을 하셔야겠군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죠?”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웃음기를 지웠다.

“내일, 아니면 모레쯤이면 터그 형제들이 백작령으로 들어설겁니다. 그럼 코퍼 용병대와 함께 말씀드린 곳을 살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멀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내일 백작가에는 혼자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빠르면 하루, 늦어도 이틀 정도는 백작가에 머무는 것이 초대해준 귀족에 대한 예의라고 하더군요.”

“그럼 세인 경은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예, 그럴 리야 없겠지만… 급하게 천공 탑이나 용병대와 연락을 하거나 부득이하게 돌아가야 할 땐 세인 경이 도와줄 겁니다.”

“알겠습니다.”

멀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카일 님과 여행을 가게 되다니… 생각만 해도 좋은 것 같습니다.”

“…여행이라기보단 전쟁을 위한 원정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한동안은 이곳에 함께 온 인원들만 따로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행으로 생각해도 무방하죠.”

멀린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멀린 님까지 전쟁터에 나서게 되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절 믿고 불러주셔서 오히려 기분이 좋았는걸요.”

멀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코퍼 용병대는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이곳에서의 일만 마무리하고 떠날 것 같습니다.”

“결국 거절이군요. 생각보다 정이 들었는데….”

“아무리 좋은 대우를 약속한다 해도 코퍼 대장으로선 다른 용병대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겠죠. 그럼 앞으론 어디로 간다고 합니까?”

“주 활동무대가 남부이긴 하지만… 어쩌면 다른 곳으로 떠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얼핏 서부로 옮기려는 생각도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럼 앞으론 다시 보기 어려울 수도 있겠군요.”

멀린의 말에 카일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죠.”

* * *

“휴… 드디어 돌아왔군.”

“수고하셨습니다.”

지치고 핼쑥해진 얼굴로 목책 앞에 선 힐튼 남작을 향해, 보일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수고야 자네가 했지, 나야 자네 뒤만 졸졸 쫓아오지 않았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남작님께서 곁에 없었다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보일이 고원에서 겪었던 오크와의 처절한 전투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크들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만 잠시 몸을 피하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무려 보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수많은 오크들이 서로의 피와 살을 탐하며 크고 작은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전투의 규모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커지고 오크의 숫자도 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혼란이 가라앉을 거란 보일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결국 보일은 절벽을 오른 지 보름 만에 강행 돌파를 결정했다.

더 버티기엔 식량도 식수도 부족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었다.

그렇게 보일과 힐튼 남작은 서로의 등을 지켜주며 수없이 달려드는 오크와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고원을 빠져나왔다. 덕분에 힐튼 남작과 보일의 몸 여기저기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무수히 새겨져 있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샤론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하,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힐튼 남작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생사를 가르는 처절한 전투를 치르긴 했지만, 덕분에 보일과 힐튼 남작 사이에 서로에 대한 끈끈한 정과 믿음이 자리 잡았다.

“들어가시죠.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으니 오늘은 아껴뒀던 술 창고를 개방하겠습니다.”

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이 환하게 웃으며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대장님!”

힐튼 남작과 함께 목책 안으로 들어서자 목책을 지키고 있던 필론이 황급히 내려왔다.

“필론이구나!”

“어떻게 된 겁니까? 보름씩이나….”

“아!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 이야기는 내일 해 주마.”

보일이 필론의 물음에 손을 저으며 힐튼 남작과 함께 멀어져 갔다.

“아! 대장님, 손님이…!”

필론이 급히 돌아서 보일을 불렀지만, 이미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뭐… 상관없겠지?”

필론이 고개를 저으며 목책 위로 올라갔다. 그 사이 보일과 힐튼 남작은 걸음을 재촉해 드디어 집 앞에 멈춰 섰다.

“…마을 사람이 찾아온 건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안을 바라보며, 힐튼 남작이 물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 제가 없는 걸 알고 있습니다. 빈집에 불까지 밝히고 있을 리는 없죠.”

“켈토가 찾아온 건 아닐까?”

“그럴 줄 알고 떠나기 전 기사단장께 전서를 날렸습니다.”

“그럼… 설마 카일이 돌아온 걸까? 공작령에서 바로 돌아왔다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은데?”

“글쎄요? 집안에 들어가 보면 누가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겠죠.”

보일의 말에 힐튼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보일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문 앞에 멈춰 섰다.

“휴….”

“왜 그러나?”

“왠지… 기분이 이상해서”

보일이 고개를 흔들며 문손잡이를 잡으려 했다.

벌컥-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며 낯익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

보일이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깜짝이야! 놀랬잖아!”

거구의 여인이 버럭 고함을 치며 보일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이야! 이거 오랜만인걸? 좀 늙긴 했지만 하나도 변한 게 없네?”

“…타샤!”

“호호, 이거 영광인걸?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타샤가 웃으며 보일에게 바짝 다가섰다.

“타샤 경, 장난은 그쯤 하는 것이 어떤가?”

“래, 래쇼티… 남작!”

“미안하지만 지금은 백작입니다. 오르하튼 남작님”

“아실 겁니다. 오르하튼이란 성은 정식으로 귀족원에 등록된 작위가 아닙니다.”

보일이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칫, 역시 변한 게 없어!”

타샤가 입을 삐죽거리더니 경악한 얼굴로 래쇼트 백작과 자신을 돌아보는 힐튼 남작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요. 이곳에 계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타샤… 네가 어떻게 여길…?”

“저야 주인을 따르는 사람이잖아요.”

“스파더 남작님께서 이곳에 오셨단 말이냐?”

힐튼 남작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스파더 남작가는 북서부 끝단에 위치한 척박하고 가난한 영지로 알려져 있지만, 대귀족인 마파린 후작과 힐튼 남작을 비롯한 몇몇은 스파더가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었다. 더구나 힐튼 남작의 영지와 스파더 가문의 영지는 서로 인접한 곳이라 제법 친분이 있었다.

“물론이죠.”

타샤가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수수한 평복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에요.”

“…카렌, 아니 이사벨라.”

보일이 떨리는 음성으로 이사벨라 남작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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