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43화 (243/404)

243. 그린넨 백작가(1)

꽝-

사나운 폭음이 울리며 카일의 신형이 또다시 튕겨 나갔지만, 노인 역시 오러임펄스의 충격을 해소하지 못해 주르륵 뒤로 밀려나다가 바닥을 뒹굴었다.

“크윽!”

노인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면서도 만신창이가 된 몸을 힘겹게 일으켜 앉았다. 그리곤 반쯤 부러진 단검을 씁쓸하게 내려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상급 엑스퍼트에 오른 이후 지금껏 단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분신과도 같은 단검이 지금은 처참하게 부러져 쓸모없는 폐물이 되어 있었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말이다.

노인이 들고 있던 부러진 단검을 던져 버리고는 바닥에 쓰러진 카일을 바라보았다.

미동도 없이 바닥에 처박혀 있던 카일이 희미한 백광을 일으키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노인도 저 기운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신성력! 놈, 대지의 신전과 무슨 관계냐!”

“글쎄?”

카일이 지친 얼굴로 노인의 앞에 섰다. 신성력이 아무리 몸을 보호하고 있다고 해도 내부를 뒤흔드는 충격파의 고통은 온전히 카일이 감당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엉망이군.”

부러진 팔과 여기저기 찢어지고 갈라진 모습은 정상적으로 살아가기는 어려울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놀리지 말고 어서 죽여라!”

“이미 폐인이 된 마당에 굳이 죽일 필요가 있을까? 원하는 것만 얻는다면 굳이 죽일 생각은 없다.”

“흥, 골드의 위치는 절대 밝힐 수 없다.”

“굳이 노인장이 아니라도 알아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카일의 말에 노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도둑놈 같으니라고!”

“어차피 이젠 노인장에게 필요 없는 물건 아닌가? 물론, 거절해도 상관없다.”

카일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노인의 어깨 위에 검을 올렸다.

“좀 많이 아프겠지만 말이야.”

“젠장!”

노인이 카일을 노려보다가 힘겹게 팔을 걷어 올리자 손가락 세 마디 굵기의 팔찌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제.”

노인이 힘겹게 남은 오러를 쥐어짜 팔찌에 밀어 넣었다.

철컹-

낮은 쇳소리와 함께 팔찌가 벌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인이 흔들이는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팔찌를 바다보다 결국 카일을 향해 던졌다.

“가… 가져가라!”

미련을 버리려는 듯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고맙군.”

카일이 웃으며 팔찌를 품 안에 밀어 넣었다.

“바로 차지 않을 생각인가?”

“보여줄 사람이 있어서.”

“…그런가?”

노인이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흔들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날… 살려두면 후환이 두려울 텐데, 그래도 날 살려 둘 텐가?”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겠지. 그리고 내가 누군지 모르지 않나?”

“검은 여우, 아니, 내 동료들의 능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찾을 거라 확신한다.”

“동료? 왠지 스스로는 검은 여우가 아니란 말처럼 들리는군”

“검은 여우 내에서도 더럽고 위험한 일만 처리하는, 아주 짙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이들을 언제부턴가 스스로를 쉐도우라 불렀고, 검은 여우와는 다른 독자적인 조직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남은 쉐도우는 고작 아홉 명, 이제 날 제외하면 8명이 남았군.”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

“목숨의 대가다. 마법 팔찌가 소중하다곤 해도 내 목숨값에 비하면 하찮은 물건이지.”

노인이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야 오래전 루퍼트가로 잠입하면서 살기를 죽이고 살행도 더 이상 나가지 않았지만, 녀석들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잊지 마라!”

노인은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뒤로 물러나 차가운 벽에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아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일이 고개를 흔들며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괜찮으십니까?”

문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터그 형제들과 함께 루퍼트 준남작을 붙잡고 있던 코퍼 용병대가 다가왔다.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지, 집사는 어찌 되었습니까?”

“살아는 있다.”

“휴…. 다행이군요!”

루퍼트 준남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장을 무서워하는 것 아니었나?”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루퍼트가를 생각해준 건 집사뿐이었습니다. 제국에서 무리한 요구를 해와도 앞장서서 막아준 것도 노인이었죠.”

“제법 정이 들었나 보군.”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루퍼트 준남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금이 있는 곳을 알려줬으면 하는데?”

“그건….”

“우린 반드시 금을 찾아 돌아갈 거다. 다만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가의 차이뿐이지. 어때, 시간을 두고 몸과 마음을 다해 차근차근 대화를 나누며 위치를 말할 것인지, 아니면 짧은 인연으로 서로 잊을 것인지. 결정하는 건 준남작 당신이다. 어느 쪽을 원하지?”

카일이 습관처럼 단검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 알려드리겠습니다.”

“좋아! 앞장서라!”

카일의 말에 루퍼트 준남작이 체념한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말해라.”

“여기에 금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안 겁니까?”

“그게 궁금한가 보군.”

“저, 저도 이곳에 금이 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으니까요.”

루퍼트 준남작의 말에 카일이 걸음을 멈추곤 돌아보았다.

“금이 있다는 걸 몰랐다고?”

“저야, 몇 달에 한 번씩 물건을 옮겨 놓았다가 다시 옮겨가는 장소만 제공하면 됐으니, 어떤 물건이 옮겨지는지는 굳이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아주 중요한 물건이라는 소리는 들었습니다만….”

“관리는 당연히 노인이 했겠군.”

“그, 그렇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루퍼트 준남작이 카일과 일행을 데려간 곳은 1층 복도 끝, 작은 방안이었다.

“집사의 방입니다. 침상을 들어내면 바닥으로 내려가는 작은 통로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루퍼트 준남작의 말에 브린과 버크가 재빨리 침상을 들어내자 커다란 문이 드러났다.

끼이익-

카일이 직접 문을 들어 올리자 방보다는 조금 작은 지하 석실이 모습을 드러났다. 카일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타고 내려와 벽면에 걸린 램프에 불을 붙여 주변을 살폈다.

노인의 실력을 믿어서인지 주변에 함정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찾은 것 같군요.”

카일이 한쪽 벽면에 쌓여 있는 수십 개의 작은 상자들을 보며 말했다.

“이게 모두 금이란 말입니까?”

카일의 옆으로 다가온 코퍼가 깜짝 놀라 물었다.

“제가 들은 바로는 그렇습니다.”

카일이 나무상자 한쪽을 뜯어내자 정련된 사각형의 금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정말 금이 있었군요.”

루퍼트 준남작이 두 눈을 크게 뜨곤 상자를 바라보았다. 집사의 방을 찾을 때까지도 금괴가 정말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모여 있는 금은 모두 서부 일대의 검은 여우들과 하위 조직에게 지급될 자금들이다.”

카일의 말에 루퍼트 준남작은 물론 이번 일에 가담했던 코퍼와 용병들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다만 터그 형제들만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담담한 표정이었다.

“루퍼트가의 역할은 동부 국경을 통해 은밀하게 들여온 금을 보관하는 중간 기착지다. 여기서 상단과 용병대를 통해 서부 일대의 각 지부로 배분해 옮겨지게 되지.”

“만약… 이 금괴가 서부로 도착하지 않으면…!”

“약간의 혼란은 있겠지만,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겠지?”

카일이 웃으며 금괴가 가득 들어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순순히 금괴가 있는 상자를 찾아 주었으니, 루퍼트가의 몫으로 금괴 두 상자를 남겨 놓겠다.”

“…왜?”

“금괴가 탈취당했단 사실이 알려지면 검은 여우들이 어딜 먼저 찾을 것 같나?”

카일의 물음에 루퍼트 준남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연히 가장 먼저 루퍼트가를 찾아 이번 일에 대해 물을 것이다. 물론 사실을 정확하게 말한다고 해도 쉽게 믿어주진 않을 것이다.

“충고를 하나 하지. 최대한 빨리 가솔들을 이끌고 이곳을 떠나라! 북부나 서부는 최대한 피해라. 열악하긴 해도 작은 영지들이 난립한 남부가 가장 좋다. 남부가 싫다면 붉은 거미들이 장악한 왕성이 검은 여우들을 피하기 가장 좋을 것이다.”

“왜… 제게 이런 말을 해주는 겁니까?”

“그건 직접 생각해 보면 알겠지?”

루퍼트 준남작이 물었지만 카일은 고개를 저을 뿐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터그 형제와 코퍼 용병대를 돌아보았다.

“금괴부터 옮기죠.”

카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용병들과 터그 형제가 달려들어 금괴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 사이 루퍼트 준남작도 자신 몫의 금괴와 간단한 짐을 챙긴 뒤 겁에 질려 방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가족들을 끌어내 마차에 태워 급히 저택을 떠났다.

“동작 하나는 굉장히 빠르군.”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며 고개를 흔든 브린이 조심스럽게 카일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런데… 왜 금괴까지 챙겨서 저들을 놓아준 겁니까?”

브린의 물음에 사람들이 시선이 카일에게로 쏠렸다. 잔인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런 일을 가장 완벽하게 처리하는 방법은 생존자를 남겨두지 않는 것이다. 헌데 카일은 집사라 불린 노인뿐 아니라 루퍼트가를 살려둠으로써 스스로 작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때론 작은 흔적이 오히려 혼란을 줄 수 있죠.”

“네?”

“금괴가 사라지고, 동시에 루퍼트가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검은 여우들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루퍼트가를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집사란 노인이 살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죠. 하지만 과연 노인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노인이 루퍼트가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죠.”

“가족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충분히 의심할 수 있겠군요.”

“의심을 하든 하지 않든, 검은 여우들은 가장 먼저 루퍼트가의 흔적을 쫓을 겁니다. 그렇게 흔적을 쫓아가다 보면 그들이 사용한 금괴에 대한 흔적도 찾게 되겠죠.”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겠군요. 하지만 저들이 과연 검은 여우로부터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

“제 말대로 왕성이나 남부로 간다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두 곳 모두 검은 여우들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니까요.”

카일이 멀어져가는 마차를 바라보며 고개를 젓고 터그 형제를 바라보았다.

“금괴를 파르트 님께 전해주고 곧장 동부로 오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터그와 형제들이 고개를 숙인 뒤 금괴가 가득 실린 마차에 몸을 실었다. 금괴는 파르트를 통해 새롭게 가공한 다음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보급 물자를 매입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었다.

“그럼 우리도 가보죠.”

카일의 말에 코퍼와 용병들이 수정구를 꺼내 사방으로 던졌다. 곧 뿌연 안개가 주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시카니스!”

카일의 낮은 외침에 밤하늘을 맴돌던 거대한 와이번이 안개를 헤치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 * *

“죄송합니다. 급한 볼일이 있어 함께 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 백작령엔 늦지 않게 도착하겠습니다.”

새벽녘 마차에 몸을 실은 이엘에게 말을 탄 카일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한 말이다.

그는 그렇게 사과의 말을 남기고는 코퍼 용병대와 터그 형제를 이끌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리곤 벌써 삼 일째 카일은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하아!”

식사를 대충 마친 이엘이 뒷마당의 작은 벤치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늦은 저녁 무렵 마차는 무사히 그린넨 백작령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곧장 영주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고급여관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아직 초대 당사자인 카일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그리 깊은 한숨을 쉬십니까? 무슨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이엘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카일이 웃으며 서 있었다.

“돌아… 오셨군요.”

“늦지 않게 돌아올 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카일은 항상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이엘이 미소를 지으며 잠시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카일, 저와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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