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동부로(7)
“으으, 춥다.”
부르르 몸을 떤 병사가 들고 있던 창을 잠시 어깨에 걸쳐 놓고, 화톳불 근처에서 마른 손을 비볐다. 그제야 따뜻한 온기가 조금 전해졌는지 창백하던 병사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수고했다.”
이미 화톳불 곁에 앉아 몸을 녹이고 있던 병사 하나가 손에 들린 뜨거운 차를 건넸다.
“고맙다, 롬.”
“별말씀을”
“아! 잠깐 있어 봐!”
롬이라 불린 사내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품에서 진한 갈색빛 액체가 가득 담긴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너…!”
“목소리 낮춰, 라드!”
롬이 급히 주변을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라드가 급히 입을 막으며 눈치를 보았다.
“휴, 다행이다.”
라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롬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술은 당분간 금지란 걸 잊었어? 들키면 나까지 처벌받는단 말이야.”
“칫, 여기 누가 온다고. 한두 모금 정도는 괜찮아!”
롬이 투덜거리며 손에 들린 뜨거운 찻잔에 유리병을 기울였다.
“이렇게 위스키를 뜨거운 차와 섞으면 아무도 모를걸? 어때, 한잔하겠어?”
롬이 피식 웃으며 손에 들린 술병을 흔들었다.
“정말… 괜찮을까?”
최근 제국과의 전쟁이 확정되면서 동부 영주들은 다가오는 봄 전쟁을 대비해 영지의 경계를 강화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기에 바빴다. 물론 동부의 모든 영지가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지만 병력이 부족하거나 중립 영지인 경우, 참전을 포기하고 영지의 경계 강화에만 힘쓰는 가문도 있었다. 롬과 라드가 속한 최하급 귀족, 루퍼트 준 남작의 장원 역시 병사가 수십에 불과한 작고 힘없는 가문이라 참전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장원의 경계에만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때문에 롬과 라드는 물론 병사 대부분이 한동안 술은 구경도 못했다. 술병을 바라보는 라드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한잔인데, 어…!”
창-
롬이 갑자기 어깨에 걸쳐 놓은 창 아래쪽을 힘껏 내려쳤다. 그러자 창대가 목을 따라 반원을 그리며 회전하더니 빈 공간을 때렸다.
퍽-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물체가 창대와 부딪히더니 허공에서 부서지듯 터져나갔고 뿌연 안개가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누구냐!”
라드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지만, 여전히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롬!”
라드가 롬을 불렀다. 다행히 붉게 타오르는 불꽃 덕분인지 그나마 롬의 모습만은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드의 부름에도 롬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니 분명 롬 역시 라드에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롬과 라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서로 등을 마주 대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작은 장원의 병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침착하면서도 민첩한 행동이었다.
쉬익-
창-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라드는 그저 깊고 두터운 안개의 흔들림만으로 다가오는 날카로운 공격을 창대로 후려쳤다. 아니, 오히려 공격을 걷어낸 창대가 곧장 안갯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자신을 공격한 상대의 위치를 정확히 예측해 날린 일격이었다.
텅-
물론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창대를 통해 전해진 진동만으로도 자신이 날린 공격이 막혔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드는 전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내딛으며 강하게 창대를 밀어붙였다.
“젠장!”
라드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창대를 밀어붙이며 팽팽하게 유지되던 힘의 균형이 한순간 무너져 버린 것이다. 다행히 롬이 재빨리 붙잡아 넘어지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라드는 급히 창대를 회수했다.
“보통 놈이 아니다.”
매끄럽게 잘린 창대를 보며 라드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겉으로 보기엔 목봉 끝에 창날을 붙인 평범한 창이지만, 실제로는 창대에서부터 창날까지 고합금을 이용해 만든 만큼 쉽게 잘릴 물건이 아니었다.
‘움직이자!’
라드가 롬을 향해 급히 신호를 보내며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안갯속에서 튀어나온 검이 라드의 어깨를 노렸다.
텅-
롬이 라드를 대신해 급히 창대를 휘둘러 공격을 튕겨내자 이번엔 비어있는 롬의 가슴을 향해 정확히 검이 파고들었다.
깜짝 놀란 롬이 급히 창대를 후려쳐 찔러 들어온 검을 걷어내는 동시에 상대의 가슴을 강하게 찼다.
터엉-
발끝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롬은 상대 역시 제법 타격을 입었을 거라 확신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 녀석들, 안갯속에서도 우리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조심해!”
롬이 라드을 돌아보며 말했다. 비록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입 모양만으로도 라드는 롬의 말을 쉽게 알아들었다.
“괜찮아?”
라드가 롬의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적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견딜 수 있다.”
롬이 가슴을 내려다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서두르자!”
롬이 앞으로 나서며 창대를 휘둘렀다.
텅-
창-
롬이 한걸음 나서는 순간 사방에서 검격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롬은 망설임 없이 창대를 휘둘러 검격을 쳐내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드 역시 롬의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부러진 창대와 단검을 양손에 말아쥐고 사방으로 맹렬하게 휘둘렀다.
작은 장원의 병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실력이라도 시야를 가리는 뿌연 안개와 침묵 속에서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단하군!”
옅어진 안개를 헤치며 커다란 체구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와 부러진 창대를 잡고 힘겹게 버티고 선 라드와 롬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들은… 누구냐! 왜… 우릴 공격한 거지?”
라드가 힘겹게 입을 열어 물었다.
“이유는… 너희들도 알고 있지 않나?”
“…큭, 역시 그런 건가? 괜한 질문을 했군.”
라드가 웃음을 흘리다 주변을 에워싼 사내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제법 열심히 싸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상한 걸 입고 있었군.”
라드가 사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변을 둘러싼 사내들은 작은 챙이 달란 둥근 투구에 수정을 깎아 만든 커다란 고글을 쓰고 있었다. 무엇보다 라드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상체를 감싼 짙은 회색빛 금속제 갑옷이었다.
이런 갑옷은 라드도 처음 보는 형식의 갑옷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들 중 누구도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지 않은 듯했다.
“나 역시 과한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내가 고개를 흔들며 라드와 롬을 돌아보았다.
“동료가 힘들어하는군.”
“롬이란 녀석이지. 평생의 친구와 마지막도 함께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 중이다.”
“미… 친놈… 헉헉….”
롬이 힘겹게 라드의 말을 반박하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라드가 롬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부탁이 있다.”
“말해라!”
“요즘 경계가 강화되어서… 한동안 술을 못 마셨다. 어때, 한 모금 정돈 괜찮겠지?”
라드가 롬을 돌아보았다.
“너, 넌 역… 시 미친놈이야.”
롬이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술병을 꺼냈지만, 결국 힘이 다했는지 술병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던 라드가 떨어진 술병을 주워들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빌어먹을 싸구려 위스키군!”
라드가 빈 술병을 바닥에 던져 버리며 사내를 돌아보았다.
“이름을 알 수 있나? 누구에게 죽는지는 알고 싶은데?”
“…내 이름은… 코퍼, 코퍼 용병대의 단장이다.”
“용병대?”
라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코퍼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죽는 마당에… 뭐 상관없겠지.”
라드가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다, 코퍼가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사악-
코퍼의 검이 바람 소리를 내며 라드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형님, 서둘러야 합니다.”
바닥에 쓰러진 라드를 씁쓸하게 바라는 코퍼에게 야투가 황급히 다가와 말했다.
“터그 쪽은?”
코퍼가 동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섬광탄이 터졌습니다.”
“늦었군! 서두른다.”
코퍼가 황급히 검을 갈무리하고는 저택을 향해 달렸다.
펑-
탕-
탕탕-
코퍼와 용병대가 저택으로 다가섰다. 저택 동쪽에서 섬광과 폭발이 여기저기 울리고 있었다.
“연막!”
코퍼의 외침에 브린과 버크가 저택 안으로 수정구를 던졌다.
펑-
펑-
수정구가 터지며 깊은 두터운 안개가 주변을 감싸자 코퍼를 비롯한 용병들이 황급히 고글을 착용했다. 마법 안개 속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든 고글이었다.
‘진입.’
코퍼가 재빨리 수신호를 보냈다. 안갯속에서는 코퍼 용병들도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코퍼를 선두로 용병대가 저택 안으로 진입했다.
창-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코퍼의 머리 위로 검이 날아들었다. 저택을 지키고 있던 호위 기사가 문을 향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른 것이다. 하지만 코퍼의 뒤를 따르던 야튜가 급히 코퍼를 밀어내며 기사의 검을 막아섰다.
푹-
코퍼의 검이 기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괜찮나?;
코퍼가 야튜를 돌아보며 신호를 보내자 야튜가 검을 들어 보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빛이 반사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검은 재를 칠한 검이었다. 야튜의 손에 들린 검은 옅은 오러 소드 정도는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는 드워프제 강철 검으로, 검격의 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코퍼는 야튜의 신호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내부로 진입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작은 저택으로, 코퍼의 목표는 3층에 위치한 루퍼트 준남작의 집무실이었다. 다행히 뒷문을 지키는 병력을 제외하면 3층으로 진입할 때까지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동쪽에서 소란을 피우며 진입하는 터크 형제로 인해 병력 대부분이 그쪽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적입니다.”
3층으로 진입하려던 브린이 조심스럽게 물러나며 코퍼를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몇 명이냐?”
“복면을 한 자들이 좁은 복도를 가득 메웠습니다. 못해도 20명은 될 것 같습니다.”
“잘됐군, 수류탄!”
용병들이 일제히 수정구를 꺼내더니 가드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쩌억-
수정구 위로 실금이 가더니 붉은 기운이 스며 나왔다.
“척탄!”
코퍼의 외침에 용병들이 일제히 수정구를 복도로 던져 넣었다.
쾅-
콰광-
커다란 폭음이 연달아 들리며 건물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렸다.
“진입!”
폭음이 끝나자 코퍼가 검을 뽑아 들고는 곧장 3층으로 진입했다.
강력한 폭발로 인해 복도는 이미 아수라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수정구에 직격당한 몇몇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고 후미에 있던 복면인들은 심각한 부상에 신음하고 있었다.
“아덱, 버크, 여길 정리한다.”
코퍼의 말에 두 사람이 달려 나와 신음하고 있는 복면인들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었다.
“야튜, 브린, 섬광탄!”
브린이 수정구를 들었다. 그사이 야튜가 단단하게 잠긴 문틈으로 검을 찔러 넣은 뒤 문을 발로 힘껏 찼다.
꽝-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브린이 수정구를 던져 넣으며 옆으로 피했다.
펑-
반쩍-
“으악-!”
“내 눈!”
강렬한 섬광과 함께 안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압한다.”
코퍼가 가장 먼저 안쪽으로 달려들며 소리쳤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선 코퍼는 눈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상황이 이미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모두 단단히 묶어둬!”
뒤따라 들어온 브린과 야튜가 복면인들과 함께 바닥에 쓰러진 인자한 모습의 노인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루퍼트 준 남작인가?”
“너… 넌 누구냐!”
루퍼트 준 남작이 힘겹게 눈을 뜨며 물었다. 하지만 정작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당신들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까?”
이제 막 집무실로 들어선 카일이 루퍼트 준 남작에게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냐! 정체라니!”
“검은 여우! 아닌가?”
카일이 날카로운 눈으로 루퍼트 준 남작을 노려보았다.
“검은 여우라니… 당최 무슨 소릴….”
“이제 와 발뺌할 생각인가? 하긴, 상관없겠지. 그다지 관심도 없으니.”
카일이 루퍼트에게 바짝 다가갔다.
“난 다른 것엔 관심이 없다. 그저 제국에서 들어온 골드만 토해내면 순순히 여기서 물러나 주겠다. 어떠냐?”
“…너희들, 붉은 거미가 아니었구나!”
“큭, 검은 여우가 아니라더니… 붉은 거미에 대해선 잘 알고 있나 보군.”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루퍼트를 지그시 바라보자 루퍼트 준 남작의 얼굴에 난처함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