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동부로(6)
땅!
땅!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가 망치질을 따라 얇게 펴졌다. 긴 집게가 그걸 다시 차곡차곡 종이 접듯 접은 뒤 황토물에 밀어 넣었다.
부글부글-
치이익-
뜨겁게 달아올랐던 쇳덩이가 차가운 황토물에 격렬히 반응하며 뿌연 수증기를 토해냈다.
“파르트!”
“타르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안 보이나?”
달아오른 쇳덩이를 다시 모루 위에 올려놓은 붉은 망치의 족장 파르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렇게 망치질을 할 때엔 최대한 말을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을 타르파가 모를 리 없었다.
“카일이 돌아왔다.”
“뭐!”
머리 위로 커다란 망치를 들어 올렸던 파르타가 환하게 웃더니 들고 있던 망치를 내팽개치듯 내려놓고는 황급히 지하 광장으로 달려갔다.
“언제 온 거야?”
“이제 막 도착했다.”
“그럼 서둘러 가야겠군!”
파르트가 짧은 다리를 재빨리 움직이며 광장으로 들어섰다.
“파르트 님!”
“아하하! 카일, 나의 형제여! 왔는가!”
파르트가 카일을 격하게 반기며 달려가다 카일 뒤에 선 코퍼 용병대를 보고 멈춰 섰다.
“인간?”
“걱정 마십시오. 이들은 모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카일의 말에 파르트가 조심스럽게 코퍼와 용병들을 살폈다.
“카일이 믿을 수 있다면 나도 믿을 수 있다. 환영한다, 인간!”
파르트의 말에 브린과 버크가 눈을 비비곤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고 있는 파르트를 바라보았다.
“드… 워프?”
“붉은 망치 일족을 이끌고 계시는 파르트 님입니다. 인사들 하십시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코퍼라고 합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코퍼가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야튜와 아덱 그리고 버크가 나섰고, 아직도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브린만이 가장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한동안 못 볼 줄 알았는데, 어쩐 일로 이렇게 빨리 온 건가?”
“붉은 일족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
“이번에 제국과 큰 전쟁이 있을 듯합니다. 저 역시 참전할 것 같습니다.”
카일의 말에 파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인간들은 도대체가 알 수가 없어. 왜 수없이 죽으면서도 매번 전쟁을 일으키느냔 말이야.”
“욕심 때문이지요.”
“자네도 욕심 때문에 참전하는 건가?”
“저도 인간이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무얼 얻으러 참전하는 거지?”
“이 땅입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이미 아르산 님께서 크레센트 숲을 자네에게 내리지 않았나?”
“지금 이 땅은 크라노스 왕국에 속한 아킨스 자작가의 영토입니다. 오랜 세월 아르산 님이 이 땅을 지켜왔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그러니 공식적으로 왕국에 인정받으려는 겁니다.”
“하긴… 수백 년 전의 일이니, 그렇겠군.”
“도와주시겠습니까?”
“다른 일도 아니고 이 땅을 위한 일 아닌가. 그럼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 붉은 망치 일족의 일이기도 하지. 그래, 무슨 도움이 필요한가? 역시 무기인가?”
“그렇습니다.”
“음… 라이플을 원하나? 터그 녀석들에게 나눠준 것 말고도 30정은 더 있다네.”
“아직 라이플로 무장할 정도는 아닙니다. 대신 이걸 만들어 주십시오.”
카일이 품 안에서 돌돌 말린 양피지를 꺼냈다.
“이건…?”
“만들 수 있겠습니까?”
“최대한 얇게 만들어야겠지?”
“너무 얇아도 안 됩니다.”
“그렇겠지!”
파르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만들어야 하나?”
“3백 개입니다. 대신 장식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흠… 장식이 필요 없다니 안타까운 말이군. 좀 많긴 하지만… 못할 것도 없지. 검도 필요하겠지?”
“물론입니다. 롱소드와 짧은 단검이면 충분합니다.”
카일의 말에 파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간은 얼마나 있나?”
“보름 정도입니다. 보름 뒤 부하들이 이곳으로 출발할 겁니다.”
“보름이라….”
파르트가 토르파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아이들을 모두 불러들여야겠군.”
“광산 쪽도 말인가?”
“이런 일은 뒤로 미루기보단 빨리 끝내는 게 좋아!”
“알겠다.”
토르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 여기 이들 것부터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카일이 코퍼와 용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렵지 않다.”
파르트가 코퍼와 용병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새벽까지 만들어 놓겠네!”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아이들을 부른 건 강철을 제련할 시간을 아끼려는 것뿐이야! 이미 제련된 철괴가 있으니 장식이 없다면 그다지 오래 걸릴 일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보다… 가져온 건 없느냐?”
파르트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그럴 리가요. 다만 지난번 것과는 다릅니다.”
카일이 메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인간들이 마시는 고급 브랜디입니다.”
카일이 가져온 것은 바일의 술 창고에서 상단에 납품하던 브랜디였다.
“몇 병 준비하진 못했지만, 보름 뒤면 용병들이 곡식은 물론 맥주와 브랜디도 충분히 가져올 겁니다.”
“매, 맥주도 말인가?”
“당연하죠. 커다란 수레 10대는 족히 넘을 겁니다. 기대하십시오.”
“10대씩이나… 역시 화끈하군! 하하하!”
파르트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커다란 수레에 브랜디와 맥주는 물론 곡식과 각종 생필품까지 가득 실어 크레센트 숲으로 용병들을 불러들였다. 그 대가로 무기를 요청하긴 했지만, 사실 카일은 단순히 새로운 무기를 마련해 주자고 용병들을 크레센트 숲으로 부른 것이 아니었다.
이번 케시언 백작가와의 계약이 성사되면서 카일은 크래센트 숲과 더불어 레드스톤 지역 일대를 그의 소유로 인정받았다. 영주의 사냥터인 크래센트 숲이나 붉은 바위 지대는, 황무지에 불과한 쓸모없는 땅이었다. 때문에 케시언 백작은 큰 걱정 없이 카일에게 땅을 넘겼다.
카일은 이번 기회에 북부 영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용병 가족들을 이곳 크레센트 숲으로 불러들여 정착시키고 마을을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아직은 정식 영지보다는 장원의 성격이 강했지만, 아직 차기 영주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3왕자의 서명과 인장이 찍힌 계약서가 있는 이상 누가 아킨스 자작령을 소유하든, 카일에게 땅을 돌려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별말씀을,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그런 말 말게. 자네 덕분에 당분간 광물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네! 아이들도 마음껏 망치질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자넨 우리 붉은 망치 일족의 큰 은인이야!”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잠시만 있어 보게. 아츠!”
마침 지하 광장에 들어선 아츠를 파르트가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아츠가 주변에 서 있는 인간들을 보며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카일을 발견하곤 환하게 웃었다.
“카일 님이셨군요.”
“아츠 님! 잘 계셨습니까?”
“저야 요즘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모두 카일 님 덕분입니다.”
“아, 아닙니다.”
고개를 숙이는 아츠의 모습에 카일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고, 그거, 가져와 보거라!”
“그거라면… 아! 알겠습니다.”
아츠가 환한 얼굴로 황급히 달려나갔다.
“저 녀석이 지난번 자네가 말한 그걸 만들었네! 제법 정교하게 잘 만든 물건이니 한 번 보고 필요하다면 가져가게”
파르트의 말에 카일이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워낙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 덕분에 어떤 걸 말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겁니다.”
짧은 다리를 재빨리 놀려 달려온 아츠가 가죽 천에 돌돌 말린 기다란 물건을 건넸다. 딱 봐도 라이플이 분명해 보였다.
“풀어보십시오.”
아츠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묵직하군요.”
카일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게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천천히 가죽 천을 벗겼다.
“이건…!”
천을 풀어내자 화려한 예술품처럼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아름다운 개머리판과 금과 은으로 음각된 총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손에 들린 라이플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엽총!!”
카일의 손에 들린 라이플의 형태는 총신이 두 개인 엽총, 즉 산탄총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카일이 보일에게 만들어준 총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더 정교하고 더 화려할 뿐이었다.
“탄환입니다.”
아츠가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내밀었다.
“말씀하셨던 탄들입니다. 산탄에서부터 슬러그 탄까지 모두 들어있어요. 와이번 나이트나 와이번을 직접 공격할 무기가 필요하시다기에 만들어 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완벽… 합니다.”
“다행입니다. 지난번 직접 만드셨던 라이플은 이마 완전 분해되었기에 꼭 만들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마음에 듭니다.”
“다행이군요.”
아츠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물러나자 카일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한 뒤 조심스럽게 산탄총을 쓰다듬으며 기뻐했다.
“이런 자네가 이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군.”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총을 받게 될 줄 몰랐으니까요.”
“그런가?”
카일의 말에 파르트가 눈을 빛냈다.
“흠… 아무래도 자네와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나눠야겠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말아야.”
“아! 알겠습니다.”
파르트의 갑작스런 말에 카일이 잠시 당황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왔으니 카일로서도 바쁜 파르트를 붙잡고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 그러니 자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지. 물건은 내일 찾으러 오게. 준비해 놓겠네!”
“알겠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숙이자 파르트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짧은 걸음을 서둘러 옮겨 광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토르파가 그 모습을 당황한 듯 바라보다 카일에게 고개를 숙인 뒤, 급히파르트의 뒤를 쫓았다.
“그만 가시지요.”
카일이 돌아서며 멀린에게 산탄총과 탄환 주머니를 내밀었다.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완벽하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멀린이 웃으며 총과 탄환을 받아 들고는 허리에 찬 공간확장 주머니에 쑥 밀어 넣었다.
* * *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대장!”
야튜의 물음에 코퍼가 말없이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전 언제나 형님과 함께할 겁니다.”
야튜의 말에 코퍼가 희미하게 웃었다.
“다른 녀석들은 많이 흔들리는가 보구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녀석들도 이젠 가족이란 걸 만들고 싶어 할 나이니까요. 카일의 말대로 여기 크래센트 숲이라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안전하게 가족을 지키며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코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코퍼에게 독립적인 분견대의 대장이란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카일은 용병대 안에 직할대 개념의 특수 부대 두 개를 만들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대장으로 터그와 코퍼를 생각하고 있었다. 터그야 이미 카일의 사람이지만, 코퍼는 여러 번의 제안에도 아직 뚜렷한 답을 주고 있지 않았다.
“원치 않는다면 이번 일을 마치고 떠나시죠.”
고민이 깊어 보이는 코퍼의 모습에 야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리 작은 용병대라도, 코퍼는 용병대를 이끌던 대장이었다. 일반 단원과는 다른 입장인 것이다. 더구나 대장으로 모셔야 할 자가 이제 막 성인이 된 애송이 용병이라니. 코퍼로서는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휴… 너희들에겐 미안하지만, 녀석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코퍼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다른 녀석들에게는 제가 말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장 덕분에 지금의 코퍼 용병대가 있는 겁니다.”
야튜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코퍼가 결국 고개를 떨궜다. 자신을 위한 결정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다시 결정을 바꾸고 싶지도 않았다.
“모두에게 미안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