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동부로(5)
”응?”
차가운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눈을 꼭 감고 있던 버크가 지독한 고요함에 지쳐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브린! 대장!”
차마 눈을 뜨진 못한 버크가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옆에 있던 브린은 물론 용병대 중 누구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난치지 마!”
버크가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은 미세한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결국 무거운 침묵을 이기지 못한 버크가 살며시 눈을 떴다.
“뭐야!”
버크가 눈을 크게 뜨고는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어딜 보아도 두텁게 내려앉은 안개만이 앞을 가리고 뿐이었다.
“어디 있는 거야!”
버크가 크게 소리치며 조심스럽게 안개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역시나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황한 버크가 이리저리 손을 휘저으며 전진할 때였다. 갑자기 안개 속에서 손이 튀어나와 버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버크가 깜짝 놀라 손을 뿌리치려 하자 그 속에서 아덱이 튀어나왔다.
“헉!”
버크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가 상대가 아덱임을 확인하고는 다급히 다가갔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입을 벌려 말하는 아덱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뭐야! 뭐라는 거야!”
버크가 손을 좌우로 흔들며 크게 소리쳤다.
“가… 마”
“뭐?”
“가… 마… 히….”
“뭐라는 거야!”
“가만히 있으라고! 움직이지 말고!”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안개가 옅어지며 아덱의 목소리가 점차 또렷하게 들려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포그 마법이다.”
“그 정도쯤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단순한 안개가 아니잖아요.”
“사일런스 마법이 가미되어 있어요. 그보다 괜찮습니까?”
카일과 함께 다가온 멀린이 물었다.
“약간 당황은 했지만 괜찮습니다.”
“이 정도쯤은 문제없죠.”
버크와 아덱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른 분들 말입니다.”
카일이 바닥에 쓰러져 몸을 꿈틀거리는 브린과 그를 사납게 노려보는 야튜, 코퍼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많이 다친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갑작스런 안개에 당황해 서로 살짝 부딪혔을 뿐입니다.”
아덱이 어색하게 웃었지만, 브린의 얼굴에 새겨진 커다란 멍 자국은 부딪혔다기보단 얻어맞았단 표현이 더 정확해 보였다. 안개 속에서 무작정 움직이다가 야튜나 코퍼와 크게 부딪혔으리라 짐작만 될 뿐이었다.
“그보다… 조금 전 그 수정구는 뭡니까?”
“아! 이거 말이군요.”
카일이 들고 있던 수정구를 버크에게 건넸다. 터그에게서 다시 건네받은 여분의 수정구였다.
“특이하군요. 이런 건 처음입니다. 하지만….”
수정구를 조심스럽게 살핀 바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특이한 형태를 제외하면 그다지 효용성은 없어 보였다.
인챈트 된 마법 역시 처음 강렬했던 폭발력을 제외한다면 플래쉬 마법이나 포그 마법처럼 살상력이 없는 비효율적인 마법으로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격한 움직임에 수정이 파괴된다면 멋대로 마법이 발현될 수도 있어 보였다. 플래쉬 마법이나 포그 마법이 비살상 마법이니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 강력한 폭발이 불시에 일어난다면 함께 있던 병력까지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안정성 때문이겠죠.”
카일이 버크에게서 다시 건네받은 수정구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갑자기 반쯤 부서진 성벽을 향해 힘껏 던졌다.
“헉!”
갑작스런 카일의 행동에 버크와 아덱이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돌렸다.
퍽-
“응?”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이질적인 소리에 버크와 아덱이 슬그머니 성벽을 바라보았다. 성벽에선 어떠한 마법적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카일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정을 들어 자세히 살피다 이내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수정구를 코퍼에게 넘겼다.
“확인해 보겠습니까?”
카일의 말에 코퍼가 수정구를 받아 들어 자세히 살폈지만, 수정구 어디에도 부서지거니 파손된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정도 내구력이면 전장에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버크도 재빨리 다가와 수정구를 다시 한번 살폈지만, 역시 작은 흠집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내구도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마법을 발현시키려면 수정구를 부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단단하면 필요할 때 수정구가 부서지지 않아 사용할 수 없을 겁니다.”
버크가 다시 카일에게 수정구를 돌려주며 너무 강한 내구도의 문제를 지적했다.
“좋은 지적입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요구하듯, 멀린에게 다시 수정구를 넘겼다.
“우선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설명 드리죠. 이건 부수어서 마법을 발현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터그 형제들은 수정구를 부쉈습니다.”
“저도 봤습니다.”
아덱과 버크의 말에 멀린이 웃으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수정구가 부서졌기 때문에 마법이 발현되었을까요? 아니면 마법이 발현되었기 때문에 수정구가 부서졌을까요?”
“아!”
멀린의 물음에 버크와 아덱이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터그의 행동에 그저 수정구를 부숴야만 마법이 발현된다고만 생각했지, 마법이 발현되면서 수정구가 부서졌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수정구는 이 자체만으론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저 단단하기만 한 수정에 불과하죠. 하지만….”
멀린이 웃으며 터그에게 수정구를 내밀었다. 터그는 멀린의 뜻을 알아채곤 수정구를 들어 힘껏 라이플을 향해 내려쳤다.
쩌어억-
수정구 위로 실금이 퍼져 나가더니 수정구 안에서 백광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터그는 재빨리 수정구를 성벽 너머로 힘껏 던졌다.
번쩍-
성벽 너머에서 강렬한 빛이 일순간 터져 주변을 밝혔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보셨듯이 이 수정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라이플이, 정확히는 이곳에 새겨놓은 각인이 필요하죠.”
멀린이 터그의 라이플을 가리키며 말했다.
멀린의 말대로 터그의 라이플에는 툭 튀어나온 작은 돌기 위로 정교하게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적에게 수정구를 빼앗겨도 라이플이란 무기가 없는 이상 다시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군요.”
“맞아요.”
전쟁에선 상대에게 무기를 빼앗기거나 상대의 무기를 빼앗아 공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면에서 이 무기는 상대가 쉽게 탈취해 사용할 수 없으니, 그만큼 아군에게 더 유리했다.
“확실히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스크롤에 비해 좋은 점은 있군요. 그래도 이런 수정구에 비해 스크롤이 더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아덱의 물음에 멀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스크롤은 가벼워 다량을 휴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실제는 어떤가요?”
“네?”
“기초마법인 1서클을 제외하면, 스크롤의 가격은 상당히 비싼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용병들은 스크롤을 소지하고 있어도 되도록 사용을 하지 않는다지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마법 물품이 비싼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법사인 멀린 님께서 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이죠. 스크롤이 단발성이긴 해도 제작에는 상당한 수고가 필요해요. 마법 처리한 양피지에 값비싼 각종 시약과 더불어 마나석 가루를 사용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이 수정구는 달라요.”
멀린이 카일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멀린이 이 수정구를 만들며 적용한 방식은 마법적 요소보다는 기술적 요소가 깊게 들어가 있었다.
“수정은 기본적으로 마나 전도율이 높은 물질이라 마법적 처리는 물론 시약이나 마나석 가루 역시 필요 없죠. 이렇게 작은 조각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만큼 비용이 적게 든다는 말이군요.”
“단순히 비용만의 문제가 아니죠.”
“그럼?”
카일의 말에 버크가 물었다. 그러자 카일을 대신해 멀린이 입을 열었다.
“스크롤은 마법사마다 각기 다른 시약과 비율로 마나석을 섞어 마법진을 그리기에 비밀스럽게 작업을 합니다. 때문에 마법사가 모든 것을 직접 해야만 했죠. 하지만 수정구를 깎고 마나석을 집어넣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외부유출만 막을 수 있다면 마법진 역시 누구나 새길 수 있죠.”
멀린의 말을 깊이 고민하던 코퍼가 놀란 얼굴로 멀린과 카일을 돌아보았다.
“서, 설마 대량생산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마법사의 역할은 수정구에 새겨진 마나석과 마법진을 연동시키는 것뿐이니까요. 단 하나의 마법진만 새겨진 수정구라면 3서클 마법사도 하루에 30개 정도는 충분히 인챈트 시킬 수 있을 거예요.”
멀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 청난 양이군요.”
“대부분이 1서클과 2서클 사이의 하급마법이니까요. 그래도 마나석을 사용한 덕분에 위력과 강도가 훨씬 강해졌죠.”
멀린은 3서클 마법사보다 몇 배는 많은 마력을 보유한 5서클 마법사다. 당연히 더 많은 그들보다 몇 배는 더 많이 생산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놀랍군요. 그럼 이걸 용병대 전체에 보급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죠.”
카일이 웃으며 터그를 돌아보았다.
“수고했습니다. 짧은 기간에 이 정도까지 해낼 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일 동부로 갈 겁니다. 터그 형제도 함께 가면 좋을 것 같군요.”
카일의 말에 터그가 눈을 빛냈다.
“저희도 함께 말입니까?”
“실전만큼 뛰어난 훈련도 없으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터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훈련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훈련을 해온 만큼 자신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무래도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터그가 고개를 숙이곤 서둘러 형제들과 함께 물러갔다.
“실전이 있습니까?”
코퍼가 굳은 얼굴로 카일에게 물었다. 코퍼 용병대가 카일과 함께 동부까지 내려온 건 카일과 용병 계약을 맺고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코퍼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전에 먼저 가볼 곳이 있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저희도 가야 하는 곳입니까?”
코퍼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불편하십니까?”
“카일 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자칫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으니까요.”
코퍼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카일을 하대하던 그도 언제부터인지 높아진 카일의 신분과 존재감에 스스로 자세를 낮추며 존대를 하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다면 함께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감당은 제가 하죠. 여러분들은 절 따라와 주시면 됩니다.”
“굳이 저희 같은 작은 용병대가 필요합니까? 카일 님은 이미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계십니다.”
“사람이 많다고 해도 각자 해야 할 일들이 다릅니다. 제가 코퍼 용병대를 원하는 것도 여러분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곧 알게 될 겁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카일이 웃으며 코퍼에게 손을 내밀었다.
코퍼는 카일이 내민 손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