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동부로(1)
파코는 훌륭히 지시를 이행했다.
연공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지원자를 받았다. 예상한 대로 용병대 전원이 연공법을 익히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가 한가지 있었다.
밤의 숨결을 익히기 위해서는 미스티늄이란 약물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더구나 한 명이 연공법을 완벽하게 익히는 데에는 희석한 미스티늄 8병이 필요했다. 2백여 명을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미스티늄이 필요하기에 모두가 당장 연공법을 익힐 수는 없었다.
“방법이 있다.”
“네?”
툴린이 의외로 쉽게 해답을 내어 놓았다.
“목 아래쪽 마나 포인트만 먼저 미스티늄으로 개방시킨 뒤 마나 집적진 안에서 연무를 하는 것이다.”
툴린의 말에 카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티늄만은 못하지만 인위적으로 주변의 마나를 집약시키는 방법이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연공법을 완성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 이제 어느 선까지 약물을 이용해 연공법을 익힐 것인지, 그것이 문제겠군요.”
“부대장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가능하다면 파코의 경우처럼 십인대장까지는 미스티늄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비록 갑작스런 실험 덕분에 파코가 혜택을 받았다고 해도, 다른 십인대장까지 연무를 거쳐야 한다면 지금은 몰라도 이후 불만이 쌓일 겁니다.”
“십인대면… 30명이 넘는군요.”
“그렇습니다.”
마라스의 말에 카일이 툴린을 돌아보았다.
“재료가 부족하진 않겠습니까?”
“다른 재료는 문제가 없다. 다만 트롤의 피는 구하기 어려워. 지금 가진 양으론 겨우 30명 분량 밖에는 되지 않는다. 더구나 트롤의 피 대부분을 신전에서 포션 용으로 매입하기에 구하기가 쉽지 않다.”
툴린이 고개를 저었다.
“트롤의 피가 필요합니까?”
그때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듣고있던 마라스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혹 구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흠…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금방 알아보겠습니다. 어쩌면 쉽게 구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마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작은 유리병 십여 개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보십시오.”
“이건?”
“아이스트롤의 피입니다.”
“아!”
카일이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마라스 용병대가 아이스트롤을 사냥하던 몬스터 전문 용병대란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트롤의 피는 북부 일대에선 어디서든 골드를 대신해 사용할 수 있죠. 그래서 몇몇 용병들은 트롤의 피로 이렇게 목걸이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기도 합니다.”
카일이 기대에 찬 눈으로 툴린을 돌아봤다.
“확실히 트롤의 피가 맞다. 그것도 최상급!”
“부족하면 말씀하십시오. 급히 모아온다고 조장급을 중심으로 걷었습니다만, 십인장이나 일반 대원 중에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마라스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품 안에서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공짜로 걷을 수야 있나요? 가지고 있는 트롤 피가 있다면 모두 매입해 주십시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트롤 피가 어디에 사용될지 알고 있는데 골드까지 받다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연공법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용병들에겐 큰 은혜였다. 그런데 이젠 그들에게 사용할 트롤의 피까지 매입하겠다니. 마라스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마라스의 완강한 태도에 카일이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다시 주머니를 마라스에게 밀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네?”
“북부 영지에 용병들의 가족이 제법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 그렇습니다.”
갑작스런 카일의 말에 마라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카일의 뜻을 눈치챈 것이다.
“한동안 사냥을 못 했으니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지 못했을 겁니다. 일단 이걸 용병들에게 나눠주십시오.”
“하지만…!”
“아! 걱정 마시죠. 공짜로 드리는 건 아닙니다.”
카일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툴린에게 물었다.
“마법사의 포션을 만들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이정도 양이면 사흘이면 충분하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마라!”
툴린의 대답을 들은 카일이 마라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같이 가실 데가 있습니다.”
“저와 말입니까?”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저택을 벗어나자 일을 하고 있던 용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카일에게로 쏠렸다. 조금 전 마라스가 급히 나와 조장들이 가지고 있던 트롤의 피를 쓸어가면서 연공법에 대한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천천히 따라오시지요.”
“감사합니다.”
마라스가 고개를 숙이자 카일이 정문을 향해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와아아!
막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 멀리 용병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뒤에서 들려오는 환호 소리에 카일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곧 파코가 그에게 급히 달려왔다.
“오늘은 쉬는 날 아닌가요?”
“그게… 제가 자청했습니다.”
파코가 음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룻밤 새에 파코가 소드 유저에 오르자 동료들이 종일 그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질문만 벌써 수백 번 들은 것 같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자청해 정문으로 왔습니다. 차라리 여기가 편합니다.”
“하하! 그렇게 된 거군요.”
“그럼 원래 이곳을 책임지던 십인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도 어딘가에서 환호를 지르고 있을 겁니다”
“찾아오세요.”
“네?”
“파코는 저와 갈 데가 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곧장 찾아오겠습니다.”
파코가 신나게 안쪽으로 달려들어 갔다. 곧 텁석부리 장한이 달려와 카일에게 급히 고개를 숙였다.
“질런입니다.”
“쉬고 있는데 미안하군요”
“아, 아닙니다.”
질런이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가실까요?”
“어딜 가시는 겁니까?”
“가보시면 압니다.”
카일이 웃으며 앞장서 걸어가자 마라스와 파코가 급히 뒤를 따랐다. 골목길을 한참 동안 이리저리 돌고 나서야 세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오셨습니까?”
술 창고 앞에서 기다리던 바일이 황급히 달려 나와 카일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일꾼들은 모두 도착해 있습니까?”
“창고 안에서 이번에 나갈 브랜디를 정리해 병에 담고 있습니다.”
“잘됐군요.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안내하죠.”
바일이 급히 창고 문을 열어 카일을 안내하면서도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는 마라스와 파코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마라스 용병대장!’
바일은 단번에 마라스를 알아보았지만, 파코만큼은 그로서도 누군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곳입니다.”
바일이 안내한 곳에는 십수 명의 남녀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코르크 마개를 끼우는 등 힘이 필요한 일을 제외한, 숙성된 브랜디를 병입하고 포장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모두 여인들 몫이었다
“상단에 납품되는 브랜디는 이렇게 포장을 하지만 귀족가에 직접 납품할 때는 오크통을 통째로 넘기죠.”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이렇게 병입해 상단에 넘기는 브랜디는 오랜 숙성을 거친 상질의 것이지만, 오크통으로 배송되는 것들은 이보다 한 단계 아래의 술입니다. 보통 이런 술들은 하급귀족들을 위한 상품이죠.”
카일이 가만히 수긍했다. 아무리 부유한 귀족들이라도 수십 수백이 모이는 파티나 연회에 값비싼 브랜디만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브랜디가 모두 나가면 한동안 술 창고가 비겠군요”
“그렇습니다.”
바일이 급히 작은 서류를 내밀었다.
“이번에 들여올 예정인 술입니다. 모두 서부 세실 지방에서 증류한 것들로 예년에 비해 포도작황이 좋아 가격이 낮게 책정되었습니다.”
“300골드군요.”
마라스와 파코가 깜짝 놀란 얼굴로 카일을 보았다. 설마 술 창고를 채우는 데에 이렇게 많은 비용이 들지 몰랐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빠져나간 브랜디와 비어있는 것을 채우려면 이정도 금액은 필요합니다.”
바일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2백 골드 드리겠습니다. 나머진 비워두세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도 생각이 있으니. 그리고 앞으로 술 창고는 여기 마라스 대장이 맡아 관리할 겁니다.”
카일의 말에 마라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만 전 이런 술 창고를 관리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더구나 술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저 가끔 확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궁금한 점은 여기 바일 님께 물어보시면 됩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혹… 어딜 가시는 겁니까?”
“네, 동부에 잠시 다녀올 일이 있습니다. 처음엔 용병등록을 마치고 귀족원을 방문한 후 곧장 떠나려 했지만… 좀 늦어졌습니다.”
“언제 떠나실 생가입니까?”
“준비가 되는 대로 단출하게 떠날 생각입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바일이 입을 열었다.
“조심하십시오. 전쟁 때문인지 요즘 동부 일대의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잠시 들렸다가 곧장 돌아올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바일이 작은 책자 하나를 꺼내 카일에게 내밀었다.
“요즘 테일런 용병대의 움직임 심상치가 않습니다. 아무래도 마라스 용병대를 노리는 것 같아 조금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테일런 용병대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하다 보니 뒷배가 심상치가 않더군요.”
“…뒷배라면 다른 용병대가 또 있단 말입니까?”
“용병대라면 차라리 괜찮겠지만… 상대가 귀족입니다. 혹 케시언 백작이라고 아십니까?”
“글쎄요?”
“대략 2년 전부터 두각을 드러낸 귀족입니다. 삼 왕자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죠. 전형적인 문관으로, 머리가 비상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삼 왕자의 참전을 주도한 것도 캐시언 백작이라고 하더군요.”
“삼 왕자… 흠!”
카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조세츠 자작부터 모트 자작까지 모두 삼 왕자와 연관된 자들이었다. 왕성에 도착한 이후 더 이상 삼 왕자와 엮이는 일은 없을 줄 알았건만…. 마치 그의 착각을 비웃듯 또다시 삼 왕자와의 악연이 이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
“저택의 방비를 최대한 강화해야 겠군요. 다른 일도 서둘러야겠어요.”
다른 일, 바로 연공법을 뜻했다. 테일런 용병대가 공격해 오기 전 최대한 전력을 상승시켜 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이기지는 못해도 최소한 수성전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믿겠습니다.”
마라스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성전은 개인의 역량이 중요한 난전과는 달리 단일 된 체계와 조직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테일런 용병대를 주시해 주십시오.”
“이미 사람을 붙여 놓았습니다. 움직이기 시작하면 바로 알려드리죠. 다만 캐시언 백작가 쪽은 워낙 폐쇄적인 인물이라 사람을 확인하긴 힘들 겁니다.”
“할 수 없죠, 테일런 용병대만이라도 잘 부탁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바일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