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밤의 숨결
한결 기분이 좋아진 카일이 술 창고를 벗어났을 때에는 이미 해를 대신해 커다란 둥근 달이 대지를 밝히고 있었다.
후우-
하루가 다르게 뚝 떨어진 기온 때문인지 깊게 들여 마셨다 내쉬는 숨결을 따라 뿌연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져 갔다.
“밤의… 숨결?”
흩어져 가는 뿌연 입김에 저택을 향해 가던 카일의 걸음이 멈췄다.
카일이 품 안에서 작은 서책을 꺼내어 급히 읽어 내려갔다.
크루트의 비밀함에서 찾아낸 밤의 숨결이란 서책이었다. 기본적인 마나와 오러에 대한 설명과 8가지의 기묘한 동작이 책의 서두에 남아 있었으나,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호흡법이 완전히 뜯겨나간 반쪽짜리 마나 연공법이었다.
물론 밤의 숨결의 호흡법이 온전히 남아 있다 하더라도 8가지의 동작과 호흡법만으로는 그리 뛰어난 마나 연공법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밤의 숨결은 태극권이나 마나 연공검처럼 끊임없이 호흡과 동작을 일치시키는 동적인 연공법이 아닌, 기묘한 동작이 가미된 정적인 동작과 호흡법만으로 마나를 모을 수 있는 독특한 연공법이었고, 그 부분이 카일의 관심을 끌었다.
어찌 보면 카일이 스스로 오러 연공법이라 이름 붙인 혼원장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정지, 누구냐!”
한동안 생각을 정리하며 걷던 카일이 앞에서 들려온 낮은 경고음에 걸음을 멈추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에 빠져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저택에 도착한 것이다.
“대장… 님이십니까?”
카일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자 커다란 횃불을 밝힌 용병 하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수년 동안 생사를 함께한 마라스를 대신해 나이 어린 카일을 새로운 대장으로 받아들여야 하니, 용병들로서도 아직은 어색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라스 용병대의 용병들이 카일에게 불만이 있거나 그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카일이 제이콥을 굴복시키면서 스스로 강자임을 증명했기 때문이었다.
“파코라고 했던가요?”
“절… 기억하십니까?”
파코가 당황한 듯 물었다.
“제가 임명한 십인대장 정도는 기억해야겠죠. 그보다 제가 좀 급히 가봐야겠는데….”
“죄송합니다.”
파코가 급히 뒤로 물러났다. 카일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다가 어둠에 잠긴 저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쯤이면 모두 잠이 들었겠군요.”
“네! 요즘은 대원들 모두 일찍 잠이 드는 편이라…”
파코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 용병들은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이른 아침 일어나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목수들을 도와 저택을 수리한 뒤에 새로운 연무장과 용병들이 거주할 새로운 건물 지었다. 또한 저녁이 되면 카일이 전해준 크루트 검술을 수련해야 하니 대부분의 용병들은 지쳐 잠이 들기 바빴다.
“아무래도 파코가 절 좀 도와줘야겠는데요.”
“네? 하지만….”
“정문의 경계는 남은 용병들로도 충분할 겁니다.”
“중요한… 일입니까?”
“아주 중요합니다. 용병대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말이죠.”
“아, 알겠습니다.”
“그럼 서둘러 가볼까요.”
파코가 부하들에게 급히 말을 전한 뒤 앞서가는 카일의 뒤를 쫓았다.
“여긴?”
파코가 불안한 눈빛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이 멈춰선 곳은 저택 아래쪽에 만들어 놓은 지하실이었다. 이곳은 툴린이 새롭게 만들어 놓은 마법연구실이었다.
“다행히 불이 켜져 있군요.”
카일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누구냐?”
막 실험을 마치고 연구실을 정리하던 툴린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 들어선 상대가 카일임을 알자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황급히 다가가 도망치지 못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오! 카일, 이제야 왔구나!”
“도망치지 않을 테니 팔 좀 놓아 주시지요?”
“흠, 그런 거짓말에 속을 내가 아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정제를 끝내야 해!”
툴린이 단호하게 말하며 붉은 액체가 가득 담긴 유리병을 가리켰다.
“저건…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카일이 당황한 얼굴로 팔을 붙잡고 늘어진 툴린을 내려다보았다.
“지난 나흘 동안 나타나지 않아 쌓인 것 뿐이야!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하루에 한 번 포션을 정제해 주기로 약속한 것 말이야!”
툴린이 사납게 카일을 노려봤다.
“휴! 알겠습니다. 오늘 안으로 포션을 정제해 드릴 테니 일단 이 팔 좀 놓아주십시오.”
“정말이냐?”
“제 발로 직접 연구실로 왔습니다. 도망갈 생각이면 오지도 않았겠죠.”
“그야…! 좋다. 믿어보마.”
툴린이 꽉 붙들어 쥐고 있던 카일의 팔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들어오세요.”
“누가 또 온 것이냐?”
툴린이 문을 돌아보며 물었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파코가 잔뜩 긴장한 듯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다양하고 기묘한 실험을 자행하는 마법사는 평민들에겐 언제나 신비하면서도 공포스런 존재였다.
세상에 나와 의뢰를 수행하는 용병들의 경우 드물긴 해도 마법사를 만나는 경우가 있어 공포심이니 신비감이 덜하지만, 마라스 용병대에 들어가 사람들이 드문 오지에서만 생활하던 파코에겐 툴린은 여전히 신비하면서도 공포스런 존재였다.
“이 녀석, 뭐냐?”
“한가지 알아볼 게 있어 데리고 왔습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품 안에서 서책을 꺼내 툴린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
툴린이 서책을 받아 몇 번 읽어보더니 관심이 없는지 카일에게 다시 돌려줬다.
“마나 연공법인 것 같긴 한데… 쓸모없는 반쪽짜리가 아니냐?”
“맞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책자를 파코에게 넘겼다.
“…이걸, 왜?”
파코가 카일이 내민 서책을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도 귀가 있으니 조금 전 툴린이 말한 내용을 들었다. 카일이 내민 서책은 무려 마나 연공법. 비록 호흡법이 상실된 반쪽짜리지만, 마나 연공법은 귀족 가문이나 정통 기사 가문이 아니면 익힐 수도 없는 귀하디귀한 물건이었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마라스 부, 부대장 덕분에 간단히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잘됐군요. 8가지 동작과 삽화가 있으니 외우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지금 당장 모두 외우세요.”
“네에?”
파코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렵습니까?”
미소를 띤 카일이 파코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다, 당장 외우겠습니다.”
파코가 황급히 서책을 받아 급히 품 안에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동작이 틀리면 안 됩니다. 시간은 충분히 드릴 테니 완벽하게 익히세요.”
“알겠습니다. 바, 반드시 완벽하게 익히겠습니다.”
파코가 서책을 받아들곤 급히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책을 자세히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미 호흡법이 빠진 껍데기에 불과하다. 뭐하러 헛된 희망을 심어주려는 것이냐?”
“과연 그럴까요?”
카일이 웃으며 붉은 액체가 가득 든 병을 손에 쥐었다.
“툴린님은 마나를 오랫동안 연구하셨으니 마나 연공법에서 호흡의 역할도 잘 아시겠군요.”
“호흡이 대기에 떠도는 마나를 붙잡아 몸 안으로 끌어들이는 행위라면, 연무는 몸 안으로 들어온 마나를 특정한 경로를 통해 움직이고 순환시키게 하는 행위다. 이것으로 마나 포인트를 자극해 마나를 쌓을 수 있게 되지. 이 정도는 너도 알고 있을 것 아니냐?”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럼 만약 호흡법을 대신해 마나를 몸 안으로 밀어 넣으면 어떨까요? 일단 마나 포인트만 열어 놓으면 이후부터는 굳이 호흡법에 연연하지 않아도 마나를 몸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마나 포인트를 열수만 있다면 연무만으로 마나를 쌓을 수는 있지만, 마나 포인트를 열기 위한 과정엔 호흡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툴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마나란 놈은 움직이면 흩어지고 멈추면 하나로 뭉치는 성향이 강하다. 마나를 내부로 밀어 넣을 수는 있어도… 호흡법이 없다면 연무을 시전하는 순간 몸 안에 남아 있던 마나가 모두 체외로 빠져나가고 말 거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동적인 연무가 아니라 정적인 연공법이라면 어떻습니까?”
“그야 당연히…!”
카일의 말에 툴린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단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마나 연공법이라면 체내에 강제로 마나를 주입한다고 해도 마나가 체외로 빠져나가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문제는 남았다.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동작의 연공법이라면 마나가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순 있겠지, 하지만 연무 동작이 없다면 마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방법을 실험해 보려 합니다.”
카일이 손에서 강렬한 순백의 힘이 뿜어져 나오자 손에 들린 유리병의 붉은 액체가 요동치며 강렬하고 빠르게 회전하더니 곧 두 개의 층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설마! 미스티늄을 사용할 생각이냐?”
“호흡법이 없으니 분명 한계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성공만 한다면…”
“인위적으로 소드 유저를 찍어낼 수 있겠지!”
툴린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구석진 자리에 앉아 정신없이 서책에 파고든 파코를 바라보았다.
그저 반쪽짜리 쓸모없는 연공법으로 생각했던 서책이 툴린의 눈에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문제가 남았습니다.”
카일의 말에 툴린이 고개를 돌려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문제?”
“미스티늄 원액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런 거야 직접 부딪혀 보며 해결하는 것이 빠를 거야! 일단 지난번 사용했던 미스티늄보다 약하게 사용해 보면 되겠지. 바로 시작할 테냐?”
“시간을 끌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다. 잠시 기다려 보거라!”
툴린이 곧장 카일의 손에 들인 병을 낚아체더니 최상급 포션과 미스티늄을 분리해 일정량을 희석했다.
그사이 카일은 파코를 불렀다.
“모두 외웠습니까?”
“조금 헷갈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모두 외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연공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번 실험이 잘 끝나면 용병대 전체에 연공법을 전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참아 주세요.”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파코가 떨리는 마음을 최대한 가라앉히며 말했다. 실험이란 말에 겁이 나긴 하지만 마나 연공법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위험하단 이유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8가지 동작이라고 했으니 8병을 준비했다. 일단 지난번 사용했던 미스티늄보다 농도를 절반 정도 더 묽게 만들었다.”
툴린이 미스티늄이 든 포션 병을 카일에게 내밀었다.
“준비되었습니까?”
“네!”
파코가 가장 첫 번째 동작을 취했다. 두 손바닥을 마주 대고 왼발로 몸을 지탱한 채 오른발로 왼발을 감은 독특하고 특이한 자세였다.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해야 합니다. 버틸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파코의 말에 카일이 미스티늄을 건넸다.
“미스티늄이란 겁니다. 바로 마시면 됩니다.”
파코가 곧장 미스티늄을 삼키곤 다시 자세를 잡았다.
“몸안에 답답하고 묵직한 기운이 느껴질 겁니다.”
“네! 심장쪽에서 느껴집니다.”
“마나가 규칙적인 심장의 파동에 모였다 흩어지길 반복하는 것이니 놀랄 것 없다.”
“심장을 감싼 마나가 느껴집니까?”
“네! 뿌연 마나가 흩어졌다 뭉치길 반복하고 있습니다.”
“잘됐군요. 그럼 곧장 마나를 몸 전체로 흩어 버리십시오.”
“뭐?”
툴린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하자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연무 동작이 없으니 마나를 움직일 수는 없어도 마나를 몸 전체로 흩어 놓을 수는 있을 겁니다.”
“그렇구나!”
탁!
툴린이 카일의 말을 곧바로 알아듣고선 무릎을 내려쳤다.
지금까지 뭉친 마나를 움직일 생각만 했지 몸 전체로 흩어 놓겠단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것이다.
마나를 인위적으로 흩어 놓으면 연공자의 의지에 의해 몸 전체로 넓게 퍼지긴 하지만, 곧 하나로 뭉치려는 마나 특유의 성질에 따라 한곳으로 몰려들 것이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카일이 파코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은 채 오러를 끌어올려 조심스럽게 파코의 몸 안으로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