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바일
바일이 바닥에 쓰러진 부하들을 돌아보다 한쪽에 얼굴을 처박고 숨어있는 노츠를 노려보았다.
“내가 저 멍청한 놈을 믿다니!”
바일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이젠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다행히 살아남은 검은 여우 다섯은 모두 중급 엑스퍼트에 이르는 강자들이었다.
“실력이 대단하군!”
바일이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카일의 말에 차갑게 얼굴이 굳었다.
“날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 정도 인원으론 어림없다는 걸 알 텐데? 무슨 자신감으로 날 여기까지 부른 거지?”
카일이 바닥에 쓰러진 복면인들을 바라보며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무, 무슨 소리냐?”
“얼마 전 마라스 용병대를 습격한 제이콥 용병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모두 마라스 용병대에 복속 당했다고 알고 있다.”
“틀렸다. 마라스 용병대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 굴복했지.”
카일이 바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서, 설마! 제이콥을 제압한 사람이… 너, 너란 말이냐?”
바일이 깜짝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났다. 덩달아 복면을 한 검은 여우들도 서서히 물러났다. 제이콥은 상급에 근접한 실력자로, 그를 손쉽게 제압하는 것을 보아 카일의 경지는 최소 상급 엑스퍼트였다. 중급 엑스퍼트에 오른 다섯 명의 복면인은 카일을 당해낼 수 없다는 말이었다.
바일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앞을 막아선 사내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그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모두 무기를 버려!”
“다, 단주!”
“이 싸움은 우리가 졌다.”
“하, 하지만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물론 싸울 수야 있겠지. 하지만 녀석이 있는 곳은 좁은 통로라는 걸 잊지 마라!”
바일의 말대로 창고를 빠져나갈 유일한 통로는 두세 사람 정도가 나란히 서면 꽉 찰 정도로 좁은 곳이었다. 때문에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는 인원이 제한적이라 이대로 카일을 공격한다 해도 이기기는 힘들었다.
결국 복면인들도 바일의 말에 따라 하나둘씩 검을 바닥에 던지며 물러서자 바일이 천천히 카일에게 다가갔다.
“항복하겠다.”
“이렇게 쉽게? 검은 여우라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차피 싸워봐야 모두 의미 없이 죽을 뿐이다.”
바일이 허탈하게 말했다.
“너희들을 어떻게 믿지? 다음번엔 더 완벽한 함정을 파고 기다릴 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럴 바에야 차라리 다 죽여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카일이 복면 사내들을 싸늘하게 바라보자 바일이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 하나로 끝내다오. 나만 죽으면 왕도의 검은 여우들도 뿔뿔이 흩어 질 거다.”
“다… 단주….”
“이렇게 된 이상 모두 정리하고 떠나 조용히 살아라! 행여 제국으로 돌아가거나 복수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마라! 괜히 살아남은 동료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될 거다.”
“하, 하지만 어떻게…!”
“나야 자식도 가족도 없으니 홀가분한 몸이지만 너희는 다르지 않느냐.”
바일이 복면인들을 뒤로하고 카일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말을 이었다.
“모두 오랜 시간 왕국에 정착하면서 가정을 꾸렸다. 나만 죽으면 저들도 무모하게 복수를 하지는 않을 거다.”
“너희들이 조용히 넘어간다고 해도 제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걱정 마라! 우린 점조직으로 움직인다. 몇몇 간부급만이 정확한 거점이나 연락방법을 알고 있다. 나만 사라지면 여기 있는 누구도 본단과 연락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아니, 설령 안다고 해도 제국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이곳은 그다지 중요한 거점이 아닐 테니 말이다.”
“왕성이라면 가장 중요한 정보들이 모이는 곳 아닌가? 제국으로서도 중요한 거점 중 하나일 텐데?”
“물론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지. 하지만 크로노스 왕국에도 검은 여우만큼이나 뛰어난 정보조직이 있다.”
“붉은 거미들을 말하는 건가?”
“잘 아는군! 맞다. 거미들이 왕도 전역에 촘촘하게 거미줄을 쳐놨어. 이곳은 그들의 사냥터다. 가는 거미줄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어렵게 만든 조직 전체가 붕괴되어 버리지.”
바일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붉은 거미들은 중앙 귀족이나 왕실의 주요인물 주변으로 은밀하게 거미들을 배치해 놓았다가, 이들에게 접근하는 타국의 정보조직을 역으로 깊이 파고들어 조직을 붕괴시켜 버렸다. 즉 왕실과 중앙귀족이란 미끼를 도처에 함정으로 깔아놓은 것이다.
“어렵게 구축한 정보조직들이 연이어 붕괴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자, 제국은 과감하게 왕성 일대의 정보수집을 포기했다. 대신 대 영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보망을 구축했지.”
“왕성을 포기했다면 왜 너희들은 ㅂ 이곳에 남아있지?”
“아무리 포기를 했어도 크로노스 왕가와 중앙귀족들의 동향, 세평들은 필요할 테니 최소한의 인력만 남긴 거다. 지금은 그조차도 유명무실해지면서 정보조직도 대부분 흩어져 버리고 남은 인원이라고 해봐야 30명이 안 된다.”
바일은 사실대로 말했다. 어차피 알려진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는 것들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오늘 다섯이 죽었군.”
죽어 있는 복면인들을 보며 바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이미 무기도 버리고 전의도 완전히 상실한 상대를 검으로 위협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이대로 놓아주는 것 역시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이 술 창고는 너희들 것인가?”
카일이 갑자기 든 생각에 바일을 보며 물었다.
“그건… 왜?”
“대답하기 싫다면….”
카일이 살며시 검집을 쓰다듬자 바일이 불안한 표정으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다. 이곳에 자연동굴이 있어 주변 땅을 매입한 뒤 동굴과 연결해 술 창고를 만들었다.”
이 역시 모두 사실이었다. 딱히 숨길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카일의 말에 바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좋아! 이곳을 내게 넘기면 목숨은 살려주지!”
“수, 술 창고를 넘겨 달라는 말이냐!”
“그래, 이만한 조건이면 너희 다섯… 아니지, 일곱의 목숨값으로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카일이 오크통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성 외각이라 저택과도 그리 멀지 않았고 창고 주변 땅도 있으니 술 창고를 직접 운용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수, 술 창고는 쉽게 운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항상 일정하게 온도와 습도를…!”
“아! 나도 그 정도 지식은 있으니 걱정 말고 넘기기나 해!”
바일이 카일의 싸늘한 말투에 주춤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겠다며 당당하게 말할 때와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설마 목숨보다 이 술 창고가 중요하단 말이냐!”
“…그렇다. 이곳은 절대 안 된다. 그렇지, 다른 곳은 안 되겠나? 왕도 중심가에 푸른 달빛이란 고급여관이 있다. 그곳을 넘겨주면 어떻겠나?”
바일이 당황한 듯 서늘한 술 창고 안에서도 굵은 땀을 흘렸다.
“술 창고에… 뭔가 숨긴 것이 있나?”
“그건 아니다.”
“그럼 털어놔 봐! 이유를 들어보고 판단하겠다.”
카일의 말에 바일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여기 브랜디들 절반은 이미 귀족과 상인들에게 팔린 것들이다. 만약 보름 뒤 브랜디를 넘기지 않으면, 상인과 귀족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다.”
“이유가 고작…!”
“고작이라니! 그놈들이 얼마나 독한 놈들인데, 마, 만약 술 창고가 넘어간 사실이 알려지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끝이다.”
바일의 외침에 카일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일과 복면인들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던 자들이 지금은 당장이라도 버렸던 검을 주워 달려들 듯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술 창고가 문제가 아니라 술이 문제다?”
“그것도 그렇지만… 여기에 생계가 달린 녀석들도 있어서….”
카일이 얼굴을 찌푸리며 묻자 바일과 복면인들이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숙였다. 술 창고를 내어 달라는 말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이들이 카일의 매서운 눈빛에 그제야 현실을 자각하곤 카일을 시선을 피한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바일은 끝까지 자신이 할 말을 내뱉었다.
“허, 이젠 날 죽이려는 녀석들 생계까지 책임지란 소리냐!”
카일이 잠시 황당한 얼굴로 바일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좋다. 술 창고는 넘기는 대신 귀족과 상인들에게 넘길 브랜디는 남겨주겠다. 이곳에서 일하던 자들도 그대로 고용하지, 원하는 게 더 있나?”
“…저희 푸른 달빛에도 브랜디 필요합니다만… 아! 물론 공짜로 가져가겠다는 건 아니고… 좀 저렴하게, 한 30, 아니, 4~50% 정도면….”
바일은 이 상황에서도 기화를 놓치지 않고 카일의 눈치를 살피며 협상을 걸어왔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어이없이 바라보던 카일이 결국 고개를 저었다.
이제 보니 왕성에 남은 검은 여우들 대부분이 생계형 정보조직이나 다름이 없었다.
“좋아! 45%,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파격적인 조건에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은 바일이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말투도 정중하게 바뀌어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최대한 이행하겠습니다.”
“정보가 필요할 때 알아봐 줄 수 있나? 물론 정당한 대가는 지급하지.”
“저, 정보 상인이 되란 말입니까?”
“무슨 문제가 있나?”
카일의 물음에 바일이 제법 심각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저희가 판 정보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판단은 내가 하겠지만, 지금으로선 믿어도 좋을 것 같은데?”
카일이 미소를 지었다. 비록 지금은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검은 여우로서 왕성에까지 파견될 정도면 상당히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정보요원들이다. 이들이 장난만 치지 않는다면 꽤 정확도가 높은 정보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최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바일의 말에 카일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곧장 계약서를 만들고 싶은데?”
“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계약서를 가져오겠습니다.”
바일이 복면인 하나를 지목하자 그가 급하게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사이 남은 복면인들이 널브러진 시체와 어지러워진 바닥을 정리했다. 바일은 카일에게 새로운 브랜디를 가져왔다.
“붉은 새벽이란 녀석입니다. 밤의 숨결이란 브랜드보단 못해도 고급 브랜디입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브랜디가 바로 이 붉은 새벽이죠.”
바일이 유리잔에 붉은 새벽을 따랐다. 마법등에 비친 브랜디는 앞서 마셨던 황금빛 술보다 조금 더 붉은 빛깔이 강해, 새벽녘 노을빛과 비슷해 보였다.
“좋은 술이군”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바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에 담긴 술을 멍하니 바라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의심스럽진 않으십니까? 부하 녀석이 계약서 대신 증원군을 부르러 갔을 수도 있습니다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단 믿기로 했으니 의심은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누가 오더라도 몸 하나 빠져나갈 자신 정도는 있고 말이야.”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바일이 놀란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가져왔습니다.”
그때 밖으로 달려나갔던 부하가 계약서를 바일에게 내밀었다.
바일은 카일과의 협의 내용을 계약서에 작성하고 서명을 한 뒤 카일에게 내밀었다.
“이곳에 서명을 하시면 이 술 창고는 카일 님의 것입니다.”
바일의 말에 카일이 곧장 서명을 했다.
-카일 드 마일론-스퍼더-
“…남작님이셨습니까?”
바일이 당황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문제될 것이 있나?”
“아, 아닙니다.”
“그럼 내일 다시 찾아오지.”
“알겠습니다.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바일이 고개를 숙이자 카일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술 창고를 빠져나갔다.
“바일 님, 정말 정보를 파실 생각이십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나? 이젠 우리도 제국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어!”
“그럼….”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안 그런가, 노츠!”
바일이 조심스럽게 입구로 향하는 노츠를 불렀다.
“허억-!”
“일단 잡아!”
바일의 외침에 복면 사내들이 번개같이 노츠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