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31화 (231/404)

231.귀족원

투두둑-

핏방울이 마법진 위로 떨어져 내렸다.

우웅-

작은 진동과 함께 마법진 여기저기에 떨어졌던 핏방울이 마법진의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호오-.”

노인이 핏방울의 움직임에 낮은 탄성을 터트리며 눈을 빛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글쎄?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다만, 일단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켜봐야겠구나.”

노인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마법진을 살폈다.

“드디어 움직이는군!”

노인의 말대로 하나로 뭉쳐있던 핏방울이 잠시 흔들리더니, 마법진에 새겨진 복잡한 선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정교하게 새겨진 글자 위에 멈춰 섰다.

“이… 사벨라?”

카일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글자 위에 뭉쳐있던 핏방울이 마법진으로 스며들며 구름 같은 기운이 피어올라 하나로 뭉치더니, 낮고 음울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름을 말하라!-

“카일 드 마일론-스파더.”

노인의 말에 구름 같은 기운이 다시 마법진으로 스며들며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핏방울이 머물렀던 이사벨라의 이름 밑으로 가는 선이 그어지며 카일의 이름과 성이 정교하게 새겨졌다.

“…이건?”

카일이 놀란 얼굴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놀랐느냐?”

카일이 표정이 재밌는지 노인이 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이 마법진은 뭡니까?”

“이것 말인가?”

마법진을 쓰다듬던 노인이 카일을 돌아보며 웃었다.

“이건 왕실 가계도라네!”

“네?”

노인의 말에 카일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노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이 마법진에 이름을 올렸다는 건 왕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증거지. 자네가 바로 이사벨라 왕녀의 아들이겠지?”

“그걸….”

“읽어보겠나?”

노인이 손에 들린 작은 서류와 서책을 카일에게 내밀었다.

“이 서책은 스파더 가문의 가계도라네, 여길 확인해 보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15년전, 이사벨라 왕녀가 귀족원에 스파더 가문의 후계자를 미리 지정해 놓았네. 여기 이름이 보일거야!”

노인이 직접 서책을 넘겨 이름을 확인시켰다.

-카일 드 스퍼더-

“나도 오래전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사흘 전 이른 아침 낯선 기사 하나가 이 서신을 가지고 찾아왔다네. 덕분에 나도 그때 기억이 떠올라 확인을 했지.”

노인이 카일에게 서신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카일의 신분과 함께 조만간 마일론 가문의 작위를 계승하기 위해 귀족원을 방문할 거란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루트란 기사가 찾아왔었네. 자신을 조세츠 자작가의 기사라고 하더군.”

카일 역시 서신에 남은 서명과 인장을 보고 루트가 다녀갔단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군”

“사람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일론 가문의 후계자임을 인정했지만, 전 단 한 번도 귀족이 되고 싶다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왕실의 인원이라니…!”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흠! 자네, 나와 차나 한잔하지.”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노인이 카일의 대답도 듣지 않고 뒤돌아 서가 한쪽에 만들어진 작은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잠시 당황한 카일이 서둘러 노인의 뒤를 쫓았다.

“거기 앉게.”

방안으로 들어서자 노인이 능숙하게 찻잔을 내려놓고는 붉은 차를 따랐다.

“마셔보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을 거야!”

“꽃향기가 은은하게 입안에서 맴도는 것 같습니다.”

“리덴차라네. 가끔 꿀을 넣어 마시기도 하지만 난 이렇게 차 본래의 맛과 향을 즐기지”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싸늘하게 방안으로 들어선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자넨 내가 누군지 아나?”

노인의 물음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처음 본 사이니 죄송할 것까지야… 일단 내 소개부터 하지, 난 애틀린 폰 빌리어스 공작이라고 하지.”

“공작가?”

카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더구나 왕국 내 공작위를 가진 자는 트라발트 공작가만이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어 그의 말이 카일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 거짓말 같은가?”

“왕국에 공작위를 가진 귀족은 트라발트 가문이 유일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작위를 받은 이후 사교계에 등장한 적이 없으니 알려진 적이 없지.”

“그럼 왜… 제게?”

“빌리어스란 성은 작위와 함께 새롭게 받은 성일 뿐, 어린 시절엔 애틀린 폰 크로노스로 불렸지.”

“크… 로노스!”

“지금 병석에 누워있는 국왕이 내 배다른 형이라네! 미약한 기반과 병약한 몸으로 왕권에서 한발 물러난 덕분에 난 무사히 살아남았지, 이후로도 최대한 몸을 낮추고 사교계와는 담을 쌓은 채 지내어 이렇게 중늙은이가 되어서도 귀족원에 처박혀 있다네.”

“…이런!”

카일이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왕실 어른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 왕실의 혈통을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걱정 말거라. 조금 전 했던 말은 벌써 잊었으니 말이다.”

애틀린 공작이 당황해하는 카일을 보며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웃음을 지었다.

“왕실의 가계에 이름을 올리는 건 그저 요식적인 행위일 뿐. 지금의 계승권자가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지 않는 이상 너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계승권자가 모두 죽으면 어찌 됩니까?”

카일의 물음에 애틀런이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계승권자를 모두 죽이고 왕이 되고 싶으냐?”

“아, 아닙니다!”

카일이 당황한 나머지 급히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뭐,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지금 왕자들이 모두 죽으면 어쩔 수 없이 이사벨라의 아들인 너에게도 계승권이 주어질 거다. 물론 너까지 죽으면 크로노스 왕가는 공식적으로 끝이 나고 트라발트 공작이 왕위를 이어받겠지만 말이다.”

“트라발트 공작가가 말입니까?”

“원칙을 따지자면 트라발트 공작가는 크로노스 왕실의 적통이라 할 수 있다.”

에틀리 공작은 트라발트 공작가의 탄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8대 국왕인 패일튼이 젊은 시절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차기 국왕으로 배다른 동생인 트리프가 국왕에 즉위한다. 원칙적으론 이제 막 태어난 패일튼의 아들이 국왕에 올라야 하지만 당시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와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에 트리프가 왕위에 오르고 패일튼의 아들에게는 트라발트란 성과 함께 공작위를 내려준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트라발트 공작가가 왕위를 요구한 적은 없습니까?”

“비록 권력에 밀려 왕위를 넘겼다고는 해도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거쳤으니, 아무리 그들이 왕실의 적통을 이었다고 해도 쉽게 왕위를 요구할 수는 없겠지.”

“그렇군요.”

“귀족원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귀족, 특히 왕실의 가계를 공개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와 같이 왕실의 일원임을 밝히지 않는다면 누구도 네가 왕실의 일원이란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원하는 삶을 살아도 된다.”

애틀린 공작의 말대로 왕실의 가계에 이름을 올렸다고 해서 어떤 지위나 특권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고, 외부에 알려지는 것도 아니었다. 즉 카일 스스로 신분을 밝히지 않는 이상 애틀린 공작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제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공작님.”

“충분히 이해한다. 왕실의 가계에 이름을 올렸으니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 그보다, 계속 날 공작으로 부를 셈이냐? 아무리 요식적인 행위라도 내가 집안의 어른인데 말이다.”

공작이 카일을 지그시 노려보자 카일이 당황스러운 듯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할… 아버님!”

카일의 말에 앤틀린 공작이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골목 깊숙히 어두운 그늘아래 몸을 숨기고 있던 장한이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와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기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어이!”

“….”

장한이 카일을 불렀지만 못 들었는지 아니면 일부러 못 들은 척을 하는지 카일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빌어먹을!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장한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앞서가는 카일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장한의 손이 막 어깨를 짚으려던 순간 카일의 몸이 좌우로 흔들이며 가볍게 장한의 손을 피해 크게 한걸음 물러났다.

“뭐… 야?”

장한이 갑작스런 카일의 기묘한 움직임에 당황한 듯 주춤 뒤로 물러났다.

“무슨 일이지?”

카일이 담담한 표정으로 장한을 살폈다.

“노츠라고 했던가?”

“날… 알아?”

“길드에서 본 기억이 있다. 루이즈와 꽤 친해 보이더군.”

“칫, 꽤 눈치가 빠르군.”

노츠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널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따라와라!”

“내가 왜 따라가야 하지?”

“뭐라! 너….”

노츠의 입에서 험악한 말이 쏟어지려는 순간 카일이 손바닥을 펼쳤다.

“하지만 누가 불렀는지 궁금은 하군! 앞장서겠나?”

“이익!”

노츠가 당장이라도 등 뒤에 비끄러맨 전투 도끼를 꺼내 머리통을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을 힘겹게 참으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따라와라!”

노츠가 카일을 뒤로하고는 어두운 골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리저리 복잡한 골목을 돌아가던 노츠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춰 섰다. 앞만 보며 달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작 뒤에서 달려오는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츠는 카일이 뒤를 쫓아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돌아보다 깜짝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헉!”

언제 왔는지 카일이 노츠의 바로 뒤에 유령처럼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카일의 손에 검이라도 들려있었다면 노츠는 자신이 죽는지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뭘 하는 거지? 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카일의 차가운 말투에, 노츠가 등 뒤를 훑고 지나는 싸늘한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조,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좀 서둘러 줬으면 좋겠군. 내가 좀 바쁜데 말이야!”

“알겠다.”

노츠가 카일의 시선을 피해 황급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어둠에 잠긴 작은 창고 앞에 멈춰 섰다.

“여긴가?”

“그렇다. 안에 들어가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대로 돌아갈 생각인가?”

카일이 주춤 뒤로 물러나는 노츠의 뒤를 막아섰다.

“난… 심부름만 했을 뿐이다.”

“돌아가려면 나도 당신이 필요할것 같은데?”

“…그건!”

“걱정말라고, 심부름 값은 충분히 줄테니 말이야!”

카일이 웃으며 손을 뻗어 도망치지 못하게 노츠의 어깨를 붙잡았다.

“헉!”

“그럼 함께 들어가 볼까?”

카일이 노츠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은 커다란 막돌로 벽을 쌓고 두텁게 진흙을 발라 만든 창고로, 입구는 좁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깊고 서늘하면서도 달큰한 포도향이 진하게 풍겨왔다.

“포도주인가?”

카일이 벽면 가득 3단으로 쌓아놓은 수백 개의 커다란 오크통을 보며 물었다.

“브… 랜디다.”

“왕성 안쪽에 이런 술 창고가 있는 줄은 몰랐군.”

“왕성 안에서 이 정도 크기의 술 창고는 이곳뿐이다.”

“오호! 그래?”

카일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 살피며 걸어 들어가자 가장 안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다 왔나 보군”

카일이 불빛을 향해 다가서자 뒷쪽으로 검은 인영 십여명이 퇴로를 막아섰다.

“날 환영해주려 나온 건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누인 채 황금빛 액체를 손에 든 바일을 보며, 카일이 물었다.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글쌔? 내가 보기엔 멍청한 것 같군.”

카일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곧장 바일을 향해 걸어가 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날 보자고 한 용건은?”

“잘 알거라 생각하는데?”

“주변에 적이 많아서 말이야! 누군지 모르겠군.”

카일이 앞에 놓인 술병을 들어 향을 음미한 뒤 한 모금 마셨다.

“제법 좋은 술이군.”

“술에 대해 잘 아나?”

“물론, 나도 술을 제법 잘 만든다고 자부하거든. 이 정도쯤이야.”

카일의 말에 바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곳에 쌓아놓은 술들은 최고의 포도주를 증류해 만든, 고위 귀족들이나 찾는 최고급 브랜디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미친놈이군. 길게 말하지 않겠다. 네놈이 가진 왕립중앙은행의 동화,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좋지 않겠나?”

“주인? 그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비밀함의 주인은 그 녀석이 아니다.”

“그럼 누구의 것이지?”

“당연히!”

“검은 여우들 것인가?”

창-

카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검은 복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놈! 우리 정체를 알고 있었나?”

“보틀러의 정체는 알고 있었지!”

카일이 태연하게 술병을 들어올리자 바일이 노츠를 돌아보았다.

“추적자가 있었나?”

“없었습니다. 확실합니다.”

노츠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걱정 말라고, 미행은 없었으니 말이야!”

카일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뭘 믿고 이리 당당한 것이지?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엑스퍼트급 실력자다. 그중 다섯은 중급에 올랐지.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런! 착각을 하고 있군.”

카일이 들고있던 술병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다.”

카일이 들고 있던 술병을 퇴로를 막고 선 검은 복면인들에게 던졌다.

펑-

카일의 손을 떠난 술병이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수 십수 백 개의 유리 파편이 암기로 변해 복면인들의 전신으로 날아들었다.

그 뒤로 카일이 바짝 따라붙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막아!”

바일이 깜짝 놀라 소리치자 가장 앞에 서 있던 복면인이 급히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유리 파편을 막았다.

따아앙-

따당-

귀를 울릴 정도의 굉음과 엄청난 힘에 유리 파편을 막아섰던 복면인이 주춤 물러서는 순간, 사방에서 날아든 파편이 복면인들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뒤이어 카일의 검이 무방비 상태인 복면인들의 목을 베며 스치듯 지나가 버렸다.

“컥!”

“커억-!”

목을 부여잡으며 반항한 번 하지 못하고 복면인들 절반이 순식간에 쓰러져 버리고, 이번엔 오히려 카일이 유일한 퇴로를 막아섰다.

“이제 상황이 바뀐 것 같은데?”

카일이 검에 맺힌 피를 한차례 털어내며 바일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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