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에밀리아
-에밀리아….-
그녀는 이제 갓 대지의 여신을 모시기 시작한, 15살의 가장 어린 수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같은 어린 수녀들과 함께 잠을 청하던 에밀리아는 꿈속에서 일어난 작은 빛을 따라 성기사들이 철통같이 지키는 대 신전 안으로 소리 없이 들어왔다. 그리고는 여신상 앞에서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나의 아이여!-
순간 거대한 여신상에서 은은하고 성스러운 빛이 쏟아지더니 아름다운 순백의 여인이 천천히 걸어나 와 바닥에 쓰러진 에밀리아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여신이여!”
에밀리아는 여전히 꿈을 꾸듯 눈을 감은 채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여신을 불렀다.
-나의 아이 에밀리아! 천년의 시간을 넘어 거대한 악이 잠에서 깨어나 세상을 어지럽힐지니, 신성한 빛 전사이자 사악한 어둠의 기사, 너와 나의 유일한 성스러운 기사를 찾아 어둠을 밀어내고 악을 물리쳐 그를 진정한 빛의 길로 인도하라. 그리하여 아직 대륙에 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할지어다!-
“아아! 여인의 뜻대로-.”
대답과 함께 허공으로 떠오른 에밀리아의 몸에서 성스러운 빛이 은은하게 피어올랐고, 곧 그녀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거칠어진 손과 태양 빛에 그을린 피부가 벗겨지고 틀어진 골격이 부드럽게 제자리를 찾으며, 청초하고 아름다운 순백의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 신탁이다!”
막 대신전에 들어선 대주교 바헤른이 바닥에 새겨진 여신의 뜻과 허공에서 빛을 발하는 에밀리아의 모습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며 극경의 자세를 취했다.
“이 바헤른, 성심을 다해 반드시 사명을 완수 하겠나이다.”
바헤른의 말이 끝나자 허공에 떠 있던 에밀리아가 천천히 하강했다.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주교 바헤른은 입고 있던 법의를 급히 벗어 에밀리아에게 덮은 후 뒤로 물러나 성기사에게 다가갔다.
“지금 당장 성녀와 그의 기사 비하인 경을 모시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성기사가 급히 달려 나가자 바헤른은 여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기도를 드렸다.
“대주교님!”
굵직한 음성에 눈을 뜬 바헤른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순백의 레더아머 위로 금빛 방어구를 착용한 잘생긴 중년의 기사가 서 있었다.
“성녀님, 비하인 경.”
“무슨 일…!”
성녀의 눈이 쓰러져 잠들어있는 에밀리아와 바닥에 새겨진 글씨를 바라보았다.
“신탁이… 내려왔군요.”
“그렇습니다. 성녀… 아니 하이엔 수녀님”
대주교의 말에 하이엔 수녀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신탁을 받은 수녀가 곧 성녀이니 저 하이엔, 성녀의 자리를 에밀리아에게 넘기고 대신전을 떠나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하이엔 수녀님!”
“성녀의 직분은 언제나 제게 과분한 것이었어요. 이렇게 성녀의 직분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한걸요.”
은은한 미소를 지은 하이엔이 앞에 선 비하인을 바라보았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대와 함께 할 수 있겠군요.”
“이 비하인, 하이엔 님을 평생 지킬 겁니다.”
“비하인 경,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별말씀을, 대주교.”
비하인이 미소를 지었다.
대지의 신 레아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이다. 때문에 여신을 모시는 수녀도 혼인이 가능하다. 물론 혼인을 하지 않고 평생 신을 모시며 살아가는 수녀들도 있지만 가정을 꾸리며 대대로 신을 모시는 가문도 적지 않았다. 덕분에 이렇게 탄생한 수많은 신전 가문들이 골드를 보내와 신에 대한 믿음이 쇠퇴한 지금까지도 신전을 유지하고 성기사를 육성할 수 있었다.
성녀 역시 수녀로서 혼인을 할 수 있다. 단 그녀는 반드시 당대의 성기사 중 하나를 자신의 수호 기사로서 반려로 맞이하며, 새로운 성녀가 탄생하면 스스로 성녀의 자리에서 물러나 수호 기사와 은둔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다.
하이엔 수녀 역시 관례에 따라 당대의 성기사인 비하인과 함께 은둔하려는 것이다.
“그나저나 걱정이군요. 신탁의 내용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천년의 악이 깨어났다는 말인데…과연 무엇을 뜻할까요?”
“세상을 혼란에 빠트릴 천년의 악이라면 우리가 찾지 않아도 스스로 그 실체를 드러낼 겁니다. 일단은 빛의 전사이자 사악한 어둠의 기사를 찾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를 찾아야만 천년의 악을 물리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한 사람을 뜻하는지 아니면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진 두 사람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빛의 기운과 사악한 어둠의 기운은 양립할 수 없어요.”
하이엔 수녀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오랜 시간 성녀로 있었던 만큼 누구보다 신성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심성을 말하는 걸까요? 빛의 기운을 타고났지만 어둠에 물든 마음을 정화하란 뜻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빛의 기운을 타고난, 어둠에 물든 자라…?”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죠. 어둠의 기운을 가진 자일지도 모릅니다.”
“흠… 그럴 수도 있군요.”
바헤른 대주교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어디서부터 그를 찾아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 신전의 세력이 극히 위축되어 있어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해 찾아 나서기도 힘든 판국이었다.
* * *
“보툴러의 비밀함이 열렸다라…!”
푸른 달빛의 주인 바일은 손에 든 쪽지를 바라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동부 일대를 사실상 지휘하던 보틀러가 갑자기 실종되면서 검은 여우들에게 자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동부 일대를 암약하던 검은 여우들이 한동안 큰 혼란을 겪어야 했다.
바일이 보틀러의 뒤를 추적하던 중 자금 대부분이 왕립중앙은행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갖은 수단을 동원해 비밀함을 되찾으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비밀함을 열기 위해서는 보툴러가 만들었던 동화나 8서클 대마법사가 있어야만 했기에 사실상 보틀러의 비밀함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보틀러의 비밀함이 열렸다. 더구나 상대는 검은 여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낯선 자였다. 만약 비밀함에 검은 여우의 행적을 나타내는 작은 단서라도 남아 있다면 왕국에 암약하는 검은 여우에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놈에 대해선 알아보았나?”
“왕성에 도착한 지 이제 이틀밖에 되지 않아 알려진 정보가 얼마 없습니다. 다만 마라스 용병대와 함께 생활하는 것으로 보아 용병대 소속으로 보입니다.”
“마라스 용병대라면 이번에 예상을 깨고 제이콥 용병대를 복속시킨 그곳 말인가?”
“네! 지금 왕성 외곽의 낡은 저택을 매입해 머물고 있죠. 최근엔 대규모의 건축자재를 매입하던데, 아무래도 대대적인 공사를 진행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잘됐군, 우리 아이들 몇을 인부로 위장시켜 들여보내면 어떻겠나?”
“아마도 어려울 겁니다. 하급 용병들이 2백이나 있으니 따로 인부를 부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들만으로도 인부는 충분할 테니 말입니다.”
“흠… 내부로 잠입할 방법이 없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마라스 용병대 자체가 워낙 폐쇄적이라 저택을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최근엔 식량을 구매하는 걸 제외하면 거의 외부로 나오는 일도 없더군요.”
초기 마라스 용병대가 저택을 벗어나지 않은 것은 제이콥 용병대와의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용병대 모두가 크루트 용병검술을 익히느라 외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골치 아프군! 그럼 결국 그놈을 직접 잡아야 한다는 말인데… 가능할 것 같나?”
바일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최근에 용병등록을 마쳤다고 했으니 최대한 높게 잡아봐야 B급 용병일 겁니다. 녀석이 혼자 움직일 때를 노린다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좋아! 자네만 믿어보겠네, 노츠.”
“걱정 마십시오. 그보다… 녀석만 잡으면 보틀러의 비밀함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겁니까?.”
노츠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미 보틀러의 비밀함은 제국 본단에서도 포기한 자금이었다. 비밀만 지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자금이란 뜻이었다.
“걱정 말게.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제법 골드를 만질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대신 일은 완벽하게 처리해야 하네! 자칫 일이 새어나가면 동부에 있는 녀석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노츠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 *
쿵-
“이곳은 귀족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거대한 철문 앞 커다란 할버드를 손에든 검은 제복의 기사들이 창대를 내려치며 카일의 앞을 막아섰다.
낡은 레더아머와 피풍의는 전형적인 용병 차림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일론 남작가의 카일입니다.”
카일이 손을 들어 인장 반지를 내밀었다. 그러자 앞을 막아섰던 기사가 깜짝 놀라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용무를 물어왔다.
“실례했습니다. 목적을 말씀해 주십시오.”
“작위 계승 신청을 하려 합니다.”
“가문의 후계자셨군요. 혹 귀족원을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까?”
“처음입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안내인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기사가 벽면에 매달린 종을 쳤다.
땅-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곧 커다란 철문 한쪽에 만들어 놓은 작은 쪽문이 열리며 단정한 복장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일론 남작 가문의 후계자시네! 작위 계승을 위해 방문하셨으니 안내를 부탁하네.”
기사의 말에 카일에게 다가온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안내를 맡은 행정관 츠란입니다.”
“마일론 가문의 카일입니다.”
“아! 카일 님이셨군요.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츠란이 카일을 데리고 안으로 향했다.
“혹 귀족원은 처음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가시는 동안 이곳 귀족원의 배치에 대해 잠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작위를 계승하시면 종종 귀족원을 방문하실 일이 있을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카일의 태도에 츠란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세워진 가장 큰 건물을 가리켰다.
“귀족회의가 열리는 대회의실로, 최대 3백 명의 귀족분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3백이 넘는 귀족분들이 모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요. 대부분 왕성 일대에 거주하는 귀족분들만 참여합니다.”
“아무래도 거리가 있으니 참여가 어렵겠지요.”
“거리보다는, 지방 영주들은 이런 귀족회의에 관심이 없지요. 영주분들과는 큰 관련이 없는 사항들이 논의되니까요. 그리고 오른쪽에 보시는 작은 건물은 저희 같은 행정관들이 업무를 보는 곳입니다. 저곳에서는 귀족원의 잡다한 업무를 봅니다.”
츠란이 웃으며 검은 돌을 쌓아 만든 커다란 건물을 가리켰다.
“이곳이 바로 혈통과 작위를 관리하는 귀족원입니다. 전 여기까지입니다. 이곳은 보안시설이라 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츠란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자 카일이 귀족원 안으로 들어섰다.
“누군가?”
입구를 들어서자 커다란 덩치를 가진 기사가 앞을 막아섰다.
“작위 계승을 위해 찾아왔습니다.”
“계승 귀족인가?”
카일이 다시 한번 손에 끼워진 인장 반지를 보였다.
“후계자인가 보군! 들어가 보게!”
“감사합니다.”
카일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엄청난 크기의 서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뭘 그리 뚫어지게 보고 있나?”
지팡이를 짚은 늙은 노인이 카일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아! 죄송합니다. 이런 서가는 본 적이 없어….”
“이곳이 처음인가 보군. 보통 이곳을 처음 본 녀석들이 자네처럼 놀라곤 하지. 그래, 무슨 일로 왔나? 여기까지 들어온걸 보니 귀족이란 말인데!”
“아! 작위 계승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카일이 인장 반지를 노인에게 내밀었다.
“응? 이건 마일론 가문의 인장 반지인데? 자네가 힐튼이란 녀석의 후계자인가?”
“그렇습니다. 카일이라 합니다.”
카일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카일?”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한쪽에 쌓아놓은 서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분명 여기에… 찾았다.”
노인이 커다란 수정을 정교하게 깎아 만든 외눈 안경을 쓰고서 천천히 서류를 읽어내렸다.
그리곤 다시 카일을 올려보았다.
“자네 이름이 카일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흠… 아무래도 확인이 필요할 것 같군! 잠시 이리오게.”
노인이 카일의 팔을 잡고는 커다란 황금빛 금속판 위, 기하학적인 문양과 글자가 새겨진 마법진으로 다가갔다.
“여기에 자네의 피 한 방울만 떨어트려 보게!”
“이곳에 말입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은 아무 생각없이 단검을 꺼내 손가락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