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부활
새하얀 빛에 직격당한 레드 와이번이 거세게 몸부림쳤지만, 빛은 오히려 점점 규모를 키웠다. 잠시 후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빛의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곧 와이번은 거대한 알 속에 갇힌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직후 변화가 시작되었다.
우두두둑-
뼈가 꺾이고 부러지는 끔찍한 음향과 함께 거대한 알 속에 갇힌 와이번의 신체가 급격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골격을 서서히 변화시켰다.
쫘아악-
얼마 뒤 붉은 비늘에 둘러싸인 날카롭고 단단한 발톱이 빛의 알을 찢어발기더니 거대한 주둥이가 찢어진 구멍을 넓히며 빛의 알을 빠져나왔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본래의 체구보다 두 배 이상 거대해진 동체였다. 새롭게 가슴 아래를 뚫고 나온 작은 앞발, 머리 위로 돋아난 한 쌍의 거대한 뿔과 더불어 날카롭게 번들거리는 이빨, 붉은 눈까지…. 레드 와이번과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을 가진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
힐튼 남작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도저히 믿을 수도 믿고 싶지도 않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드래곤의 부활…!’
천년 전 대륙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드래곤이 눈앞에서 부활하고 만 것이다.
“이… 이게 뭐야!”
그때였다.
날카롭게 자신의 몸을 살피던 드래곤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당황한 듯 소리쳤다.
“위대한 화이트 드래곤, 나 아르미스가 고작 이따위 몸을 차지하다니!”
크아아앙-
분노한 아르미스가 허공을 향해 포효했다.
“크윽”
“헉!”
힐튼 남작과 보일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공포심과 압력에 급히 오러를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다. 그리고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하늘 위에 오롯이 떠 있는 드래곤을 힘겹게 바라보았다.
“이… 이게 정녕 드래곤의 힘이란 말인가?”
“정신 차리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는 보일에게 힐튼 남작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
남작의 외침에 겨우 정신을 차린 보일이 고개를 흔들며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정말… 대, 대단하군요.”
“일단 몸을 피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네! 이대로 있다간 드래곤에게 당하고 말걸세.”
“아! 알겠습니다. 마침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보일이 급히 앞장서 달리자 힐튼 남작이 그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드래곤에게서 멀어져 갔다.
“빌어먹을 인간 놈들!”
아르미스가 멀어져 가는 보일과 힐튼 남작을 보며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는 이미 두 사람의 존재를 일찍부터 인지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 행동했다.
겉으로는 완벽한 드래곤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실 아르미스는 온전한 드래곤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드래곤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화이트 드래곤, 그중에서도 8천 년을 살아온 고룡이었다.
천 년 전 마왕과의 전투에서 죽기 직전 기억을 알의 형태로 봉인했고, 분신이자 가디언인 화이트 와이번에게 맡겨 새롭게 부활하려 한 것이다.
화이트 와이번은 자신의 피와 살로 만들어져 있기에 부활에 필요한 마력만 쌓을 수 있다면 온전한 화이트 드래곤으로 새롭게 부활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아르미스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마왕이 중간계로 현신하면서 마나가 왜곡되었기에 정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수백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봉인된 알을 지키던 화이트 와이번은 수십 년 전 수명을 다했고, 알은 지금에 와서야 레드 와이번의 몸을 빌어 부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레드 드래곤은 불의 기운, 화이트 드래곤은 얼음의 기운을 다스린다.
아르미스는 불의 기운을 가진 육체와 얼음의 마력이 서로 서로 상충하는 상태로 부활한 것이다.
당연히 지금의 아르미스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 상태로 무리하게 기운을 끌어올려 두 사람을 상대했다가는 상충된 기운으로 인해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당장 그에게 필요한 것은 어긋난 두 기운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인간들을 대륙에서 쓸어버리고 말겠다.”
멀어져 가는 보일과 힐튼 남작을 바라보던 아르미스가 구름을 뚫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 북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드래곤을 피해 고원 위를 빠르게 달려가던 보일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이런!”
“무슨 일인가?”
힐튼남작이 보일의 곁으로 다가섰다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 이건!”
힐튼 남작의 눈앞에 엄청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백 수천의 오크들이 몰려나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드래곤 때문입니다.”
보일은 오크들의 상태를 단번에 알보았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강대한 존재로 인해 공포에 물든 오크들이 급격히 뒤로 밀려났고, 순식간에 부족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고원, 아니 오크랜드 전체의 균형이 흔들리며 혼란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뚫고 나가야 하나?”
“안 됩니다. 여길 뛰어드는 순간 모든 오크들이 저희를 타깃으로 삼을 겁니다. 지금은 피해야 합니다.”
보일이 심각하게 주변을 살피더니 오크를 피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당장은 빠져나가기 힘들겠습니다.”
“그럼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야 한단 말인가?”
“어쩔 수 없습니다. 오크들이 안정을 찾을 때까진 움직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언제까지 말인가?”
“최소 십여 일, 어쩌면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나 오래 걸린단 말인가?”
“돌파까지 염두에 두고 말씀드린 겁니다.”
“허허! 그 정도란 말인가?”
“드래곤의 등장으로 오크랜드 전체가 들썩이고 있을 겁니다. 지금 움직이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보일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그동안 어디에 있을 생각인가? 오크랜드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면 안전한 곳이 없지 않나?”
“한 곳 있습니다. 고원 일대 전체를 살필 수 있는 곳 말입니다.”
보일이 고개를 돌려 고원 위에 우뚝 솟아있는 바위 절벽을 바라보았다.
일전에 힐튼 남작을 피해 카일이 머물렀던 절벽이었다.
“여기라면 당분간 안전하게 머물 수 있을 겁니다.”
절벽 위에 올라선 보일의 말에 주변을 돌아보던 힐튼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보일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제 그 빛의 정체에 대해 말해줄 수 있겠나?”
힐튼 남작이 보일을 향해 물었다.
“이미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역시 화이트 와이번의 알은 자네 부자가 가지고 있었군.”
“면목이 없습니다.”
보일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화이트 와이번과 맹약을 맺을 생각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러를 주입한 결과가 결국 드래곤의 부활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더구나 힐튼 남작이 그렇게도 원했던 와이번과의 맹약까지고 모두 틀어지고 만 것이다.
“죄송합니다.
“너무 자책 말게. 어차피 누구의 손에 들어갔어도 드래곤의 부활은 피할 수 없었을 거야! 그보다 도대체 어떻게 알을 차지한 건가? 분명 제국의 와이번 나이트가 알이 든 상자를 가져가는 걸 나도 보았네!”
“그땐 이미 알을 바꿔치기한 뒤였습니다.”
“바꿔치기? 가짜 알을 만들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보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힐튼 남작이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파린 후작가와 그린넨 백작가는 와이번 알을 차지하기 위해 수개월 동안 혈투를 벌이며 무수한 희생을 치렀다. 하지만 결국 그 주인은 두 가문도, 제국도 아닌 카일과 보일 부자였던 것이다. 만약 이번 일이 터지지 않았다면 누구도 카일과 보일 부자가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허허! 자네 부자에게 놀아난 기분이긴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 어찌하겠나! 이 일은 우리 두 사람만의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네.”
힐튼 남작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드래곤이 부활한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져봤자 문제만 복잡해진 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구나 카일은 힐튼 남작이 직접 인장 반지까지 넘겨준 가문의 후계자다. 남작으로선 카일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런 말 말게. 카일은 내게도 소중한 사람이니 말이야! 하지만 드래곤의 등장은 보통 일이 아니니 왕실에 알려야 할걸세. 자네도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나?”
“죄송합니다만 이번 일로 오크랜드의 사정이 복잡하게 변했을 겁니다. 자칫 외곽으로 밀려난 오크들이 통곡의 협곡을 넘어 영지로 넘어올지 모르니 이곳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보일의 말에 힐튼 남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도 오크들이 얼마나 지독하고 위험한 존재인지 이미 경험한 적이 있었다. 만약 오크들이 대규모로 오크랜드를 넘어 남부로 쏟아져 들어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가장 최선의 방법은 샤론 마을에서 통곡의 협곡으로 이어지는 요새를 중심으로 최대한 오크를 막아내는 것이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왕립중앙은행으로 들어서자 젊은 사내가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페이튼 님을 만나고 싶습니다만?”
“아! 죄송합니다. 페이튼 님께서는 오늘 중요한 경매가 있어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사내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보석 경매 때문에 직접 경매장을 찾은 것 같았다.
카일은 품 안에서 작은 동패를 꺼내 사내에게 내밀었다.
“비밀함을 확인하려고 합니다만.”
동패를 바라본 사내의 눈에서 묘한 빛이 어렸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은행에서 발행한 동화군요.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일이 사내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지난번과 마찬가지고 기하학적인 문양의 마법진이 그려진 원형 지하광장이었다.
사내가 동화를 앞에 놓인 수정구 위에 올려놓자 역시나 마법진 위로 작은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관함은 방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내가 보관함을 카일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카일이 상자를 들고 방안으로 사라지지 얼굴 위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던 사내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는 급히 작은 종이 위로 글자를 날려쓰더니, 밖으로 달려 나가 심부름을 하는 작은 소년을 불렀다.
“이걸 푸른 달빛이란 여관주인에게 전해 다오. 이만큼 동전을 더 줄 거란다.”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작은 쪽지와 동전을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부탁하마!”
“걱정 마세요.”
소년이 쏜살같이 골목길로 빠져나가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 무렵, 사내에게서 받은 비밀함을 열어본 카일의 두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아!”
상자 안에는 크고 작은 보석과 커다란 금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서류 뭉치와 더불어 D급 용병패부터 B급 용병패까지 다양한 신분의 용병패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카일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정작 따로 있었다.
“이건?”
카일이 비밀함에서 꺼낸 건 정교하고 세심하게 그려진 동부의 지도였다.
카일이 갑자기 든 생각에 급히 주머니 안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은판을 꺼내더니 지도위에 겹쳐보았다.
“역시!”
가죽 지도와 은판은 크기와 모양이 정확히 일치했다. 동시에 은판 위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점들이 모두 특정한 지역과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보틀러와 크루트 모두 동부 일대에서 활약하던 검은 여우. 이들이 같은 크기와 문양의 은판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건….”
동부 일대를 암약하는 검은 여우의 비밀거점들!
“이거 재밌게 되었군!”
카일은 손에 쥔 은판과 함께 비밀함에 가득 담긴 금괴와 보석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