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마라스 용병단(3)
사르락-
조용하고 아늑한 방안, 한 손엔 가죽으로 정교하게 양장한 고풍스러운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작은 찻잔을 든 사내가 은은한 차향을 맡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베른입니다.”
“들어오세요.”
사내의 입에서 낮지만 부드러우면서도 뚜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죠?”
여전히 책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사내가 서재 안으로 들어선 집사 베른을 향해 물었다.
“아킨스 자작령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모트 자작이 보냈나 보군요.”
“자작이 죽었단 보고입니다.”
“…그렇군요.”
집사의 말에 책장을 넘기던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사내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생각이 짧아 걱정했는데… 누가 죽였답니까? 래쇼트 백작입니까?”
“아닙니다. 지금으로선 누가 죽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죠?”
“와이번을 타고 날아갔다가 이틀 뒤 평원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함께 갔던 기사 둘도 멀지 않은 곳에 죽어 있었답니다.”
“공중전이 있었단 말인가요?”
“주변 흔적으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모트 자작의 경우, 검이 부러지고 몸이 양단된 것으로 보아 결투를 벌인 것 같습니다.”
“…결투? 모트 자작을 죽일 만한 자가 남부엔 없을 텐데… 설마 자작령을 습격한 자들이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만, 하루 전 모트 자작을 상대로 결투를 벌인 자가 있다고 합니다.”
“모트 자작이 졌군요.”
“그렇습니다. 상대는 마일론 가문의 카일이란 자로,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귀족가의 후계자라 합니다.”
“…성년도 되기 전 상급 엑스퍼트인 모트 자작을 이겼다라…?”
책을 읽던 사내가 습관처럼 손가락에 낀 인장 반지를 문질렀다. 그 모습에 집사 베른의 얼굴도 진중하게 바뀌었다. 드디어 자신의 주인이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결투 이후는 어땠습니까? 모트 자작 성격상 그냥 보내주진 않았을 것 같은데?”
“카일이란 자도 위기를 느꼈는지 새벽녘에 일행을 데리고 성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하하! 재밌군요. 마일론 가문이라고 했나요?”
“네! 결투 전 플라워가 새겨진 인장 반지를 꺼내 귀족임을 증명했다고 합니다.”
“정통계승 귀족? 확인은 했습니까?”
“귀족원 명부에 등록된, 남작위를 가진 계승 귀족 가문이란 사실은 확인했습니다. 다만 정확한 가문의 정보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작위를 가진 정통계승 귀족의 신분과 혈통 보호가 귀족원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니, 그쪽을 통해선 알아보기 힘들 겁니다. 일단 남부 귀족가들을 중심으로 조사해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테일런 용병대장이 찾아왔습니다.”
“기다리던 결과가 나왔나 보군요.”
“어찌할까요?”
“기분 좋은 소식을 들고 왔을 테니 들어오라고 하세요. 아! 그 사람도 차를 좋아한다고 했던가요?”
“차를 새로 준비하겠습니다.”
“좋아요.”
고개를 끄덕이자 베른이 서재 문을 열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테일런을 안으로 들였다.
“캐시언 백작님, 테일런입니다.”
“어서 와요. 편하게 앉으세요.”
“아니, 이대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탁-
테일런의 말이 끝나는 순간 캐시언 백작이 읽고 있던 책장이 소리 나게 닫히며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실패… 했나요.”
캐시언 백작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조금 전 모트 자작의 죽음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것과는 크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테일런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유가 뭐죠? 마라스 용병대 정도는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마라스 용병대를 누군가 도와준 것 같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엑스퍼트들이 제이콥과 용병들을 공격해 오히려 마라스 용병대에 복속 당했다고 합니다.”
테일런의 말에 캐시언 백작이 한동안 말없이 손에든 찻잔을 매만지다 뜨거운 김을 불어내고는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차가 쓰군.”
백작이 인상을 쓰며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곧 새로운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집사 베른의 말에 캐시언 백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네, 난 지금 당장 목이 마른데 말이야.”
“네?”
“그럴 땐 어쩔 수 없지, 쓴 차라도 마실 수밖에.”
캐시언 백작이 손에 들린 찻잔을 들어 뜨거운 김을 불어내며 다시금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테일런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겠습니다.”
“내가 마시던 차를 남이 가로채면 난 아주 기분이 나쁠 거야. 어쩌면 아끼던 찻잔까지 부숴버릴지도 모르지.”
“명심하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테일런이 서재를 빠져나가자, 캐시언 백작이 손에 들린 찻잔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푸른 옥돌을 깎아 만든 고급스러운 찻잔이 오늘따라 마음에 차지 않았다.
“흠… 찻잔을 바꿀 때가 된 건가?”
“마침 새로운 찻잔이 들어왔습니다. 다음부터는 새 찻잔을 들이게 하겠습니다.”
“글쎄…. 아직은 쓸만하니 당분간은 내버려 두는 것도 좋겠군.”
캐시언 백작이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금 찻잔을 들어 쓰디쓴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 * *
“카일 님!”
이른 아침 용병 길드로 들어선 카일을 루이즈가 반갑게 맞이했다.
“마침 잘 오셨어요. 길드장님께서 카일 님을 기다리고 계세요.”
“잘 됐군요. 저도 마침 길드장님을 만나러 오던 길입니다. 바로 집무실로 올라가면 됩니까?”
“네! 바로 올라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카일은 루이즈를 뒤로 하고 곧장 한센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서 오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어제 일은 들었네! 제이콥 용병대를 복속시켰다던데 사실인가? 루이즈에게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네에게 직접 듣고 싶어 기다리고 있었네.”
“사실입니다. 곧 제이콥 용병대와 마라스 용병대를 해체하고 새롭게 용병대를 창설할 생각입니다.”
“마라스 용병대까지 말인가?”
한센이 깜짝 놀라 물었다. 마라스 용병대는 2백이 넘는 중대형 용병대로, 여기에 제이콥 용병대까지 합류한다면 대형 용병대에 근접한, 삼백에 가까운 새로운 용병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새로운 용병대의 단장은 이제 갓 성년이 된 상급 엑스퍼트의 용병이다. 겨울이 지나 벌어질 전쟁을 앞둔 귀족 가문으로서는 관심이 쏠릴 수밖에는 없었다.
“마라스 용병대는 처음부터 절 찾아온 겁니다. 제법 숫자가 많아 당황은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된 일이지요.”
“그럼 자네도 전쟁에 참전할 생각인가? 대형 용병단을 창단했으니 분명 귀족들이 관심을 보일 걸세.”
“아닙니다. 당분간은 용병대를 통합하는 데 집중할 생각입니다. 전쟁은…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삼백에 가까운 용병을 거느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참전하지 않는다면 그 많은 용병들을 어찌 먹여 살릴 생각인가?”
한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가지고 있던 보석을 처분하려 합니다. 혹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까?”
“보석이 또 있었나?”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앞서 한센에게 건넨 것의 두 배 정도 되는 양이었다.
“이제 보니 자네, 아주 부자였군.”
“어쩌다 보니 얻게 된 것들입니다. 모두 처분하고 싶습니다.”
“보석은 앞서 그랬던 것처럼 경매를 통하는 것이 가장 좋네.”
“아시는 것처럼 마라스 용병대의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더군요.”
“흠…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떤가? 길드에서 골드를 빌려주지, 보석을 담보로 말이야. 물론 약간의 이자를 받아야겠지만, 보석상에 넘기는 것보단 좋을 거야.”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길드에서도 용병들의 자금을 맡아 관리하고 있으니, 문제될 건 없네! 그보다 자네의 용병패가 나왔네.”
한센이 작은 서랍에서 황금빛 용병패를 꺼냈다.
“…이건.”
“본적이 있을 거야. 크루트도 같은 용병패를 사용했으니 말이야. 원래는 B급 용병패를 지급해야 하지만, 상급 엑스퍼트에게 그럴 수야 없지 않겠나?”
한센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카일이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볼 생각인가?”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바쁘다니 붙잡지는 않겠네, 골드는 루이즈에게 말해놓을 테니 필요할 때 찾아가게!”
“감사합니다.”
카일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막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아래에서 올라오던 사내와 마주친 카일이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 길을 비켜줬다.
“고맙군.”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사내가 천천히 한센의 집무실을 향하려다 고개를 돌려 카일을 바라보았다.
“못 보던 얼굴인데?”
“어제 막 용병등록을 마쳤습니다.”
“신입 용병인가 보군.”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카일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체를 제법 잘 단련했군, 어떤가? 우리 용병대에 가입해볼 생각은 없나?”
“감사한 말씀이지만, 이미 용병대를 정했습니다.”
“이런, 아쉽군. 자네같은 훌륭한 용병을 놓치다니 말이야.”
사내는 정말 아쉬운지 카일을 다시 한번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정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아직 정식으로 용병대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면 생각을 바꾸는 건 어떤가? 자네 정도면 곧장 내 직속 분견대에 배치해주지.”
“죄송합니다.”
카일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거절했다.
“허허! 생각이 확고하다면 어쩔 수 없지, 아쉽지만 포기하는 수밖에.”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카일 역시 계단을 내려가려 돌아섰다.
“아! 잠깐, 내 소개를 안 했군. 난 테일러라 하네, 테일러 용병단의 단장이지, 혹시라도 생각이 바뀐다면 날 찾아오게!”
테일러가 웃으며 길드장실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테일러 용병대?”
카일이 조금 전 보았던 테일러를 떠올리며 얼굴을 굳혔다. 테일러라 자신을 밝힌 상대의 경지를 알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상대의 경지가 자신의 아래가 아니란 뜻이었다.
“부디 적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카일이 굳게 닫힌 길드장의 집무실을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용병 길드를 벗어났다.
* * *
“전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고맙네!”
“별말씀을!”
보일이 힐튼 남작의 곁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남작의 다리가 어느 정도 치료되자 보일은 직접 남작과 함께 오크랜드로 향했다.
최대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남작이 와이번과 맹약을 맺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엔 반드시!”
힐튼 남작이 봉인구에 잠긴 붉은 루비를 바라보며 겨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서서히 힘을 가해 봉인구를 부수기 시작했다.
쩌어억-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건 보일이 품 안에서 푸른 가죽에 소중히 감싼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꺼내 들었다.
장시간 마을을 떠나 오크랜드로 와야 하기에 알을 직접 가지고 온 것이다. 무엇보다 보일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건 와이번의 알 전체에 수없이 만들어진 실금들이었다.
즉 얼마 안 있어 와이번이 알에서 깨어날 거란 뜻이었다.
‘조금만 더!’
보일이 맹약석을 손에 쥔 채 서서히 오러를 끌어올렸다.
쩌어억-
순간 화이트 와이번의 알이 서서히 갈라지며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힐튼 남작의 손에 들린 봉인구가 부서져 나가며, 붉은 루비에 갇혀 있던 거대한 레드 와이번이 아공간을 가르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끼아악-
거친 비명을 토해낸 거대한 레드 와이번의 시선이 순간 보일을 향했다.
화아악-
그때였다. 보일의 손에 들려있던 화이트 와이번의 알이 산산이 부서지며 새하얀 빛이 하늘 위로 둥실 떠올랐다. 그 빛은 하늘 위에 떠 있던 레드와이번을 직격하더니, 곧 거대한 빛이 레드 와이번을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