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26화 (226/404)

226.마라스 용병단(1)

“마라스라 합니다.”

낡고 헤어진 레더아머에 롱소드 한 자루를 단출하게 허리에 찬 중년인이 먼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용병 세계도 수많은 규칙과 명분을 중시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돈과 힘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세계였다.

제이콥이 강압적인 방법으로 마라스 용병대를 흡수하려 했던 것도 제이콥 용병대가 그만함 힘을 보유한 강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일이 그런 제이콥을 두 주먹만으로 때려잡아 스스로 강자임을 증명한 만큼 마라스가 먼저 카일에게 고개를 숙임으로써 자신이 약자임을 인정했다.

“카일입니다.”

카일도 고개를 숙이며 마라스를 살폈다.

은회색으로 변해버린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 수많은 흉터가 남은 거칠어진 손까지 그가 결코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백전의 장수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조금 전의 결투… 인상적이었습니다.”

흥분한 제이콥의 허점을 노려 단번에 기습한 덕분에 단번에 제압할 수 있었다. 과격한 폭력을 사용한 건 제이콥과 그의 용병대를 굴복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마라스 용병대를 의식한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이를 눈치챈 마라스가 카일에게 에둘러 물어온 것이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과격한 방법이긴 하지만, 때로는 대화보다 더 빠르고 확실한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마라스에게는 만족스런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폭력도 불사하겠다는 말로 들려 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그, 그렇군요.”

“그렇다고 폭력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마크와 비터에게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물론입니다. 북부에서 왕도까지 용병대를 이끌고 온 것도 카일 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마크와 비터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면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용병을 모으려 하는 건 용병대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숫자 역시 수십 명 정도에 지나지 않죠.”

카일의 말에 마라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비터와 마크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마크와 비터 두 사람이 북부까지 용병대를 찾은 것도 용병들을 데려가가 위해서였습니다.”

“…설마, 마라스 용병대에서 용병들을 빼가기 위해서 갔단 말입니까?”

카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용병대는 떠돌이 용병들이 의뢰 해결을 위해 잠시 모였다 헤어지는 파티의 개념보다는 그들만의 오랜 경험과 실전을 바탕으로 탄생한 훈련법을 익힌 기사단과 비슷했다. 특히 용병대에서만 익힐 수 있는 마나 연공검이나 연공법은 절대 외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비전중에 비전이라, 한번 용병대에 들면 죽거나 부상을 당하지 않는 이상 용병대를 떠날 수가 없었다. 간혹 가혹한 규율이나 규칙을 견디지 못해 도망친 용병들이 생기기는 했으나, 척살대를 동원해 끝까지 추적해 죽였다.

때문에 용병계에서는 타 용병대에서 용병들을 빼 오는 일을 상당히 금기시하고 있었다.

“아! 오해를 하셨군요. 저희 마라스 용병대의 근본은 군역을 마친 전역한 병사들의 집합체입니다. 대부분의 훈련이 군에서 전해오는 집단전이나 몬스터의 사냥법뿐이니, 애당초 감춰야 할 비전 같은 것도 없죠. 그러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용병대를 떠날 수 있습니다.”

“사냥꾼들조차 자신의 사냥법을 남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물며 몬스터 사냥법은 웬만해선 쉽게 배울 수 없는 비전일 텐데요?”

“몬스터 사냥법은 그저 오랜 시간 사냥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터득한 요령이자 대원들 모두의 것입니다. 그걸 빌미로 용병들을 잡을 수는 없는 일이죠.”

“그럼 마크와 비터 두 사람이 용병들을 데려오려 해도 막을 생각이 없으셨단 말이군요.”

“물론입니다.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용병대를 떠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떠난 용병들도 있지요.”

“그렇군요. 두 사람이 왜 북부까지 달려가 용병들을 데려오려 했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이 남는군요. 처음 말씀드렸듯이 제가 원한 건 많아야 수십 명 정도의 용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용병대 전체가 함께 왔으니 의문이 드실 겁니다.”

마라스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와 비터, 두 사람이 북부까지 찾아와 원했던 용병들은 몇 년 전 친분을 쌓은 4조장 델로를 비롯한 그 조원들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오래전부터 북부 설원을 떠나고 싶어 했으니 마크와 비터도 어렵지 않게 데려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럼 그들에게 문제가 생긴 겁니까?”

카일의 물음에 마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문제라면 용병대 전체에 생겼습니다. 대략 1년 전 토샤 자작령을 비롯한 인접한 영지에 대규모 눈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때문에 토샤 영지는 물론 인접한 세 영지를 통한 북부 설원 진입로가 막혔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곳이 바로 저희 용병대의 주 사냥터라 한동안 사냥을 할 수 없었게 되었죠.”

“아!”

카일이 낮은 탄식을 터트렸다.

북부 토샤 자작 가문은 카일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이엘의 외가로 화이트 와이번의 사체와 알을 발견한 가문이었다.

아마도 이때가 토샤 자작 가문이 와이번의 알과 사체를 발견하고 이를 감추기 위해 설원으로 통하는 관문을 막았던 시기였을 것이다.

“통제가 계속 이어지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냥터를 어렵게나마 찾았습니다. 설원을 제법 깊숙이 넘어가야 하지만, 저희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한데 6개월 후 갑자기 마파린 후작의 명으로 설원 전체에 통제령이 내리더니 설원에서의 모든 몬스터 사냥이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덕분에 그나마 어렵게 찾아낸 사냥터마저 잃고 통제가 풀릴 때를 기다리며 몇 달을 겨우겨우 버텨왔지요. 그러다 결국 한계에 다다랐을 때, 마크와 비터가 델로를 비롯한 용병들을 데려가려 왔습니다.”

델로를 비롯한 용병들은 몇 번의 설득에도 마크와 비터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용병대를 버려두고 자신들만 살겠다고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라스까지 나서 직접 용병들을 설득하다 실패하자, 오히려 마크와 비터가 마라스를 설득해 용병대 전체를 끌고 왕성을 찾아온 것이다.

“두 사람이 그러더군요. 카일 당신이라면 용병대 전체를 먹여 살릴 능력이 있다고 말입니다.”

“휴! 두 사람이 아주 큰 일을 벌려 놓았군요.”

카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비터와 마크는 카일이 만들어낸 도자기를 생각했을 것이다.

“제 밑으로 들어오면 용병대의 개편이 불가피해집니다. 아시다시피 제법 많은 용병이 새로 생겼으니 말입니다.”

카일의 말에 마라스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정말 용병대 전체를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마크와 비터, 두 사람을 믿고 찾아온 것 아닙니까?”

카일의 말에 마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을 믿었다기보단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왕성으로 온 겁니다. 카일 님께서 저희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적당한 귀족 가문과 계약을 맺고 참전도 고려했을 겁니다.”

“그럼 왜 제이콥 용병대와의 통합을 거부한 겁니까? 제이콥 정도의 실력자라면 용병대로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습니다만? 정말 집단전에 대한 문제였습니까?”

“집단전도 중요한 이유지만, 그보다는 외성을 지키는 친우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이야기라면?”

“곧 3왕자가 이번 전쟁에 참전을 선언할 거란 소식이었습니다.”

“참전? 아!”

3왕자는 래쇼트 백작의 지지를 발판삼아 중립 귀족에게 지지를 받는 가장 세력이 약한 왕자로서, 왕위와는 거리가 먼 왕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상황을 단번에 뒤집을, 전쟁이란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만약 3왕자가 이 전쟁에서 무시 못할 전공을 세운다면 두 왕자를 위협할 세력을 만들 수 있었다. 더구나 이번 전쟁은 정복 전쟁이다. 영지를 갖지 못한 수많은 귀족들이 전쟁을 지지하며 참전을 선언한 3왕자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낼 것이다.

“3왕자를 중심으로 곧 대규모 용병을 모집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이콥 용병대도 아마 그 때문에 저희와 통합을 원했을 겁니다. 조금 더 유리한 조건에서 계약을 따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뒤처진 3왕자가 전쟁을 통해 왕위를 이어받으려면… 영웅이 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많은 피를 뿌려야겠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그 피의 대부분은 아마도 용병들의 몫이 될 겁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는 해도 사지인 줄 알면서도 전쟁터로 부하들을 밀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전 어떻습니까? 용병대가 제 밑으로 들어온다면, 저 역시 용병들을 전쟁터로 내몰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이콥처럼 골드를 목적으로 부하들을 전장에 내던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네?”

“제이콥은 처음부터 골드가 목적이었습니다. 더 좋은 조건에서 더 많은 골드를 벌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카일님이 용병을 모으는 이유는 그와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글쎄요? 저도 용병입니다. 제이콥과 마찬가지로 골드를 좋아하지요.”

“그렇습니까?”

마라스가 카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휴! 일단 마라스 님의 뜻은 알겠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용병들을 잘 부탁합니다. 비록 마나를 다루지는 못하지만 그들 모두 충성심이 높은 전사들이라 자부합니다. 분명 카일 님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겁니다.”

“마치 떠나실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용병대에 새로운 주인이 생겼으니 전 이만 북부 설원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마라스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마라스 용병대가 새로운 대장을 받아들이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자신이 용병대를 떠나는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지금 수백의 용병을 떠넘기고 북부로 돌아가겠다는 말입니까?”

“전 이미 늙었습니다. 전장에서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기에는 힘이 부치는 나이입니다. 용병대에 남아 있어 봐야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새롭게 용병대를 재편할 경우, 제 존재는 오히려 내부의 갈등만 조장하게 될 겁니다.”

“걱정 마시지요. 제게도 방법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떠날 생각은 마십시오.”

카일이 단호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용병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마크에게 말해 놓으십시오. 가능한 한 모두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걸 용병들에게 익히도록 하십시오.”

카일이 품 안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크루트… 용병검술?”

“우연히 얻은 크루트 용병대의 검술입니다. 마라스 님께서 먼저 익히신 뒤 용병대에 전수해 주십시오. 검술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마나 연공법도 알려드리죠.”

“마나… 연공법!”

“전 바쁜 사람입니다. 2백이 넘는 용병대를 먹여 살리려면 앞으로 할 일이 아주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마라스 님께서 계속 용병들의 훈련을 맡아 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마라스가 떨리는 음성으로 책자를 들어 올렸다. 마라스 용병대의 최대 약점은 용병들이 익힐 검술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골드만 있다면 용병 길드를 통해 적당한 검술을 매입할 수 있지만, 수십 수백 골드를 감당하기엔 마라스 용병대의 제정상태가 너무 열악했다.

물론 마크와 비터를 통해 카일에게서 검술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카일이 확실하게 용병대를 장악한 이후나 가능할 거라 생각했지 곧장 검술을 내어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마라스는 천막을 빠져나가는 카일의 모습도 살피지 못한 채 검술에 정신없이 빠져들어 갔다.

“헉!”

카일이 천막을 걷어 올리자 마크와 비터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희 둘, 나와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을 것 같은데?”

카일이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갑게 부르자, 두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 아니… 난!”

“따라와!”

카일이 두 사람을 지나쳐 앞장서서 걸어가자 마크와 비터의 굳은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조금 전 카일에게 무지막지하게 얻어맞았던 제이콥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주, 죽이진… 않겠지?”

비터의 말에 마크가 고개를 저었다.

“나, 난 그냥 단번에 죽여주길 바랄 뿐이다.”

“뭘 멍하니 서 있지?”

카일이 고개를 돌려 소리치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무거운 발을 바삐 놀리며 황급히 카일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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