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신비의 미스티늄(1)
“뭐냐! 뭐냔 말이다!”
제이콥이 눈앞의 현실에 비명을 질렀다. 언덕 위를 향해 바람처럼 질주하며 내달리던 용병들이 정문에 다다른 순간,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며 십여 명의 검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제이콥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마라스가 마지막 발악을 하는군!’ 정도로 치부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충돌 이후 바닥에 쓰러진 건 자신의 용병들이었다.
“엑스퍼트!”
그렇다.
문을 나선 용병들 전원의 검에는 분명 선명한 오러 소드가 맺혀있었다.
“후퇴시켜야 합니다. 이대로는 전멸입니다.”
제이콥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멍하니 전장을 바라보고 있자, 부관인 데리크가 급히 말했다.
“이놈들!”
데리크의 외침에 겨우 현실로 돌아온 제이콥이 분노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장으로 뛰쳐나갔다.
“대장!”
데리크와 남은 용병들이 다급히 제이콥의 뒤를 쫓았다.
* * *
“대단해!”
루트는 소드 유저들을 상대로 오러 소드를 뿜어내며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밀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작은 병 안 출렁이는 보랏빛 액체를 응시했다.
미스티늄!
툴린이 만들어낸 마법사 포션은 트롤의 피를 마법으로 정제한 후 마나를 집약시켜 만들어낸 치료제였다. 하지만 신전에서 제작한 포션과는 달리 마법사의 포션은 트롤 피의 독을 완벽히 정제하지 못해 항상 부작용이 발생했다.
툴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일에게 마법사의 포션에 신성력을 부여해달라 부탁했는데, 이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일종의 부산물이자 마나의 집약체가 생겨났다.
툴린은 신비하다는 뜻의 고대어 ‘미스티리오’에서 이름을 따 이 마나 집약체를 미스티늄이라 불렀다.
미스티늄은 고도의 마나가 집약된 물질로, 희석하지 않은 미스티늄을 그대로 섭취할 경우 내부의 오러가 격렬하게 반응하여 마나 폭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경지에 따라 적절한 양을 희석해 쓴다면 내부의 오러를 증폭시켜 일시적이긴 하지만 자신의 경지보다 한 단계 높은 고밀도의 오러를 사용하게 해주었다.
다만 내부에 오러가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일시적으로 체력을 올려주는 역할밖에는 없었다.
‘이것만 있다면 겁날 게 없겠군.”
루트는 손에든 미스티늄을 단숨에 들이켰다.
먹자마자 청량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더니 내부의 오러와 만나 격렬하게 반응하며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어때, 짜릿하지!”
언제 다가왔는지 밀런이 루트의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리 꺼져!”
루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밀런을 밀어냈지만 내심 밀런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거 중독되겠는데….”
루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달아오르는 기분을 억지로 내리누르려다 눈앞에 달려드는 용병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적이 눈앞에 있는 이상 굳이 기운을 억누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와라!”
검을 꽉 말아쥔 루트가 우르르 달려드는 용병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죽어라!”
“미안하지만 너와 놀아줄 시간이 없다.”
꽝-
꽝-
루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오러 소드에 달려들던 용병이 깜짝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나자, 루트가 더욱 강하게 오러를 밀어 넣으며 검을 내려쳤다.
검술로 상대를 제압하기보다는 강력한 오러 소드로 상대의 검을 파괴하는 무식한 수법이었다.
“이… 이런 괴물 같은!”
꽝-
루트의 검을 힘겹게 막던 용병이 점점 부서져 나가는 검을 보며 절망적으로 소리쳤지만, 루트는 상대의 사정을 살펴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약물을 복용한 이상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은 적을 쓰러트려야만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깡-
퍽-
“크악”
루트의 오러 소드가 검을 부수고 머리를 갈라버렸다. 어느샌가 루트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있었다.
“피해!”
꽈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시안느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려나더니 세인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격렬하게 이어지던 싸움도 끝이 났다.
다행히 미스트늄의 약효가 떨어지기 직전에 전투가 끝난 것이다.
“가, 강하다.”
시안느가 브로드 소드를 든 사내를 보며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반쯤 무릎을 굽힌 시안느를 세인이 급히 일으켜 세웠다.
“걱정 말아요. 그보다. 저 사람 상당히 강해요.”
시안느의 말에 세인의 시선도 두 사람을 굳은 얼굴로 노려보는 사내에게 향했다.
“내 검을 막아내다니, 너희들은… 대체 누구냐!”
제이콥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들은 무식하게 오러 소드만 내뿜으며 달려드는 다른 용병들과는 달리 검술 하나로 소드 유저들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그만큼 높은 경지의 검술을 배웠을 뿐 아니라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오른 검사들이란 뜻이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뭐라!”
“우린 이미 적으로 만났고 검을 마주했어요. 지금 우리의 정체를 안다고 해서 검을 물리고 돌아가진 않을 거잖아요?”
“그럴리가!”
“그럼 대답이 필요 없겠군요.”
“하하! 맞는 말이다. 궁금증은 너희 둘을 잡은 뒤에도 얼마든지 풀 수 있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이콥의 몸이 세인을 향해 쇄도했다.
“속도라면 저도 자신이 있어요.”
세인 역시 빠르게 달려 나갔다.
씽-
세인의 검이 제이콥의 좌측 어깨를 찔러 들어갔다. 제이콥은 이를 무시한 채 검을 짧게 횡으로 휘둘렀다. 세인이 한 걸음 더 다가오는 순간 검 끝은 정확히 세인의 목으로 파고들 것이다.
“헛!”
급히 왼발을 내리누른 세인의 몸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져 뒤로 물러났다.
“하하, 설마 이걸 피할 줄은 몰랐군.”
“함정이었군요.”
“약간의 속임수가 가미된 것 뿐이다. 그나저나 대단한 검술을 익혔군. 정말 빠르고 정교한 검술이다.”
제이콥이 놀랍다는 듯 웃으며 어깨에 남은 작은 흠집을 바라보았다. 몸을 피하는 순간에도 검을 찔러넣은 것이다. 처음 보는 정교하고 빠른 검술에 놀라 반걸음 물러난 덕분에 어깨가 꿰뚫리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턴 좀 다를 거다.”
제이콥의 검이 푸른 오러로 물들며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상급 엑스퍼트에 근접했다고 알려진 제이콥이 본격적으로 실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에요. 잊지 말아요.”
시안느가 미스티늄을 꺼내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세인이 손에든 미스티늄을 단숨에 삼키며 말했다.
다른 동료들과 달리 두 사람은 아직 미스티늄을 마시지 않았다. 카일이 돌아오지 않은 이상 제이콥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세인과 시안느가 유일하기 때문이었다.
“내상이라도 입었나?”
“다,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 에요.”
세인과 시안느가 얼굴을 붉히더니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 사람이 마신 미스티늄은 조금 더 고농도라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더욱 격렬하고 강할 수밖에 없었다.
발끝에서 시작된 짜릿한 진동을 겨우 가라앉힌 두 사람이 곧장 제이콥에게 달려들었다.
“하하, 두 미인이 환대를 해준다면 나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지! ”
제이콥이 검을 높게 들어 그대로 내려쳤다.
“내가 막아요.”
어깨에 방패를 밀착한 시안느가 세인의 앞을 막았다.
꽈앙-
푸른 기운으로 휩싸인 시안느의 방패 위로 강력한 기운이 어린 제이콥의 브로드 소드가 떨어져 내렸다.
“크윽-!”
시안느가 어깨의 충격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주춤 물러난 것과 달리, 세인은 오히려 시안느의 앞으로 달려 나와 제이콥의 심장으로 검을 뻗었다.
위잉-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찔러 들어가는 검에 제이콥이 대경하여, 방패의 반동을 이용해 검을 튕기듯 끌어당겼다.
따앙-
맑은 검명과 함께 이번에는 세인의 검이 제이콥의 검면에 튕겨 나갔다. 세인은 손목을 가볍게 비틀어 다시 어깨를 찔러 들어갔다.
다시금 놀란 제이콥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몸을 비틀어 세인의 검을 피하는 동시에 검날을 거꾸로 잡아 도끼를 찍듯 세인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비켜요.”
그때였다.
뒤로 물러나 있던 시안느가 세인을 밀어내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꽈앙-
방패를 비스듬히 기울여 충격을 해소한 시안느가 오히려 안쪽으로 파고들며 아래에서 위로 검을 그어 올렸다.
가가각-
제이콥이 급히 검을 세우자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며 오러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빌어먹을!”
제이콥이 오러를 더욱 집중해 검을 밀어내는 동시에 발을 들어 시안느를 걷어찼다.
퍽-
“컥-!”
미처 발길질까지는 피하지 못한 시안느가 뒤로 튕겨 나가며 바닥을 뒹굴었다.
“죽어라!”
제이콥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따라붙어 검을 휘둘렀다.
“어딜!”
세인이 급히 제이콥의 뒤를 쫓아 검을 찔러 넣었다.
“잡았다, 이년!”
순간 몸을 180도 반전시킨 제이콥이 세인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세인이 급히 검을 들어 막핬다.
꽈앙-
엄청난 충격에 세인이 뒤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커억- 쿨럭!”
격한 기침을 내뱉은 세인이 결국 붉은 피를 토해내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빌어먹을!”
제이콥이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작은 단검 하나가 깊숙이 박혀있었다.
제이콥과 검이 충돌하며 뒤로 밀려나는 순간에도 세인이 단검을 투척해 기어코 어깨를 꿰뚫은 것이다.
“죽여버리겠다.”
제이콥이 바닥에 단검을 던져버리곤 쓰러진 세인에게 걸어가다가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꽝-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공간에서 검이 튀어나와 제이콥의 검을 막았다. 제이콥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거기냐!”
제이콥이 급히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상대는 자취를 감춘 후였다.
“큭, 도망간 것인가! 그럼 방법이 있지!”
제이콥이 다시 세인을 향해 달려가자 이번엔 우측에서 단검 하나가 빠른 속도로 날아와 제이콥의 목을 노렸다.
캉-
가볍게 단검을 날려버린 제이콥이 다시 세인을 향해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쿵쿵쿵-
토벽 위에 올라서 있던 마라스 용병대가 창을 들어 방패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마라스 용병의 위압적인 행동에 제이콥이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기운이 급습했다.
“이 개자식!”
땅-
대검을 휘둘러 날아든 단검을 처낸 제이콥이 욕설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나 사방을 경계했다.
쿵쿵쿵-
2백여 명이 일치된 동작으로 발을 구르고 방패를 내려치자 주변을 맴도는 암살자의 작은 기척과 진동까지 모두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대장을 보호하라!”
그때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데리크가 급히 용병들을 불러 제이콥을 둘러쌌다.
“세인 경과 시안느 경을 보호한다.”
코퍼 역시 재빨리 두 사람을 한쪽으로 끌어당겨 보호했다.
그와 동시에 정문이 활짝 열리며 마라스 용병대까지 달려 나와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건… 생각하지 못한 상황인데요.”
막 언덕 위로 올라선 루이스가 여기저기 쓰러진 제이콥 용병대원들을 보며 놀란 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