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용병길드(3)
“보석까지 줄 필요가 있었습니까?”
은행을 빠져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한센에게 카일이 물었다.
카일이 골드에 대해 인색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수십 골드 가치의 보석을 선뜻 내어줄 정도로 헤프지는 않았다.
더구나 한센이 건넨 보석은 크루트가 용병 가족들을 위해 남긴 보석으로 그의 것이 아니었다.
“보석이 아까운가?”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 사람에겐 골드 몇 개만 줘도 충분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하, 자네 아주 솔직하군.”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인 한센이 진지하게 카일을 바라보았다.
“내가 페이튼에게 보석을 준 것은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라네”
카일의 이해할 수 없는 표정에 한센이 다시 말을 이었다.
“페이튼에겐 골드만 줬다면 어땠을 것 같나?”
“받은 골드가 있으니 적어도 도움을 줬다는 생색은 내려 하겠죠.”
“왜 그렇게 생각했나?”
“그야 보석은 그와 아무런 관련이… 아!”
가벼운 탄성을 터트린 카일이 한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페이튼도 이젠 단순히 생색만 낼 수는 없겠군요.”
카일이 말에 한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카일은 한센이 페이튼에게 보석을 주고 그의 마음을 사려 한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카일은 단순히 보석 하나의 가치만을 생각해 페이튼에게 건넨 보석을 아까워했지만, 한센은 보석 하나로 단순한 방관자로 경매를 바라보던 페이튼을 직접 당사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페이튼은 자신 몫의 보석을 최대한 높은 값에 처분하기 위해서라도 경매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에게도 그만큼 큰 이익이 돌아올 테니 말이다.
카일과 한센이 용병 길드로 돌아왔을 때는 해가 점점 기울어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을 무렵이었다.
두 사람이 천천히 길드 안으로 들어서자, 접수대에 앉아 있던 루이즈가 급히 일어나 다가왔다.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이냐?”
한센이 루이즈의 다급한 표정에 급히 물었다.
“아무래도 곧 용병대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아요.”
“전투? 설마 마라스 용병대를…!”
“네! 제이콥 용병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허허, 기어코 제이콥이 움직였단 말이냐! 그리 말렸건만….”
한센이 고개를 저었다.
한센이 비록 용병길드장으로 길드를 효율적으로 잘 운영하고는 있지만, 지금처럼 용병들 간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길드장으로서의 중재가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테일런은 어찌하고 있느냐?”
한센의 물음에 루이즈가 고개를 저었다.
“테일런의 용병대는 더 이상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겠답니다.”
“테일런까지 말이냐!”
“제이콥이 먼저 손을 쓴 것 같아요. 그보다 카일, 당신 동료들 모두 마라스 용병대와 합류했어요.”
“네?”
카일의 당혹스러운 표정에 루이즈가 급히 말을 이었다.
“혹, 마크라는 용병을 아나요? 조금 전 마라스 용병대에서 길드장님께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보냈던 사람이에요. 당신 동료들이 그 사람을 먼저 알아보더군요.”
“아!”
카일이 그때서야 일행이 마라스 용병대와 합류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보니 마라스 대장이 기다린다던 사람이 바로 자네였군.”
“마라스 대장을 잘 아십니까?”
“그들 모두 북부 설원에서 활동하던 용병대라 잘 알지는 못한다네, 다만 제이콥 용병대와 계속된 분쟁 때문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지, 그보다 큰일이군. 마라스 용병대만으론 제이콥 용병대를 감당하긴 힘들 텐데.”
“전력 차이가 많이 납니까?”
“전력이랄 것도 없네, 마라스 용병대는 이름만 용병대일 뿐 전역한 병사들이 모여 몬스터를 사냥하는 사냥꾼에 지나지 않아. 다만 숫자가 2백을 훌쩍 넘을 정도로 많을 뿐이지.”
“2, 2백이나 된단 말입니까?”
“그렇네, 그중 소드유저는 대장인 마라스가 유일할 거야. 그에 비해 제이콥 용병대는 숫자는 50명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지만, 20명 정도가 소드 유저에 엑스퍼트도 3명이나 된다네, 더구나 단장인 제이콥은 이미 중급을 넘어선 상급엑스퍼트에 근접했다고 알려졌지.”
생각보다 강력한 전력에 카일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만약 이대로 전투가 벌어진다면 일행의 도움을 받더라도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제이콥 용병대가 상당한 전력을 가진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분쟁이 발생한 겁니까?”
“제이콥의 욕심 때문이라고 할까?”
“욕심… 입니까?”
“그래. 욕심이지.”
한센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이콥 용병대는 강력한 전력은 보유했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는 항상 그들의 약점으로 남아있었네.”
“약점이야 용병들을 더 받아들이면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아무리 용병대의 숫자가 부족하다고 해도, 어중이떠중이 용병들을 마구 받아들일 수는 없어, 더구나 백 단위를 훌쩍 넘어가면 집단전에 대비한 같은 강도 높은 훈련도 필요하고, 아무튼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갑자기 눈앞에 훈련이 잘된 수백의 정예 병사들이 나타났네, 자네 같으면 어떨 것 같나?”
“욕심이 나겠군요.”
“그래, 제이콥 입장에선 쉽게 떨칠 수 없는 유혹이었지. 그때부터 제이콥은 지속적으로 마라스 용병대를 흡수 통합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고 있다네. 그나마 지금까진 중대형 용병대인 테일런 용병대의 눈치를 살폈지만, 전쟁 때문에 상황이 바뀐 것 같네.”
내일이면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용병들과 접촉하며 계약을 맺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제이콥은 그전에 마라스 용병대와 통합할 생각인 것이다. 그래야만 더 좋은 조건에서 계약을 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가봐야 할 것 같군요.”
한센의 말대로라면 이대로 시간을 지체하며 기다릴 수는 없었다.
“지금 마라스 용병대가 있는 곳이 어딥니까?”
“제가 안내하죠.”
루이즈가 카일에게 다가섰다.
“위험할수 있습니다.”
“어차피 제가 아니면 안내할 사람도 없잖아요.”
“그건…!”
카일이 난감한 표정으로 텅 비어있는 길드내부을 바라보았다.
“서둘러야 하지 않나요?”
“그럼… 부탁드라겠습니다.”
카일이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가요.”
“조심하거라.”
한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이즈가 걸음을 옮기자 카일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 * *
외성 인근.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위
커다란 돌을 세심하게 쌓아 만든 3층 규모의 낡은 저택 주변으로 수백의 용병들이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단단한 병진을 구성한 채 일렬로 늘어선 50여 명의 용병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마라스 그만 항복하는 것이 어떤가? 굳이 피를 흘리며 싸워야겠나?”
“흥! 말은 똑바로 해라! 이곳은 우리 마라스 용병대의 거처다. 허락도 없이 무작정 밀고 들어와 싸움을 걸고 있는 건 너희들이다.”
마라스가 높이 쌓아올린 토담 위에 올라 소리쳤다.
이곳은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된 곳을 자금이 넉넉하지 못한 마라스 용병대를 위해 마크와 비터가 매입한 곳으로, 여관을 통째로 빌리는 것보단 확실히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물론 아무리 방치된 곳이라 해도 카일이 건넨 50골드로는 값을 치르기 어려웠다. 적어도 건물의 외관은 멀쩡했고, 넓은 대지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비터와 마크가 모아왔던 골드를 몽땅 털어 넣어야 했지만, 지금 상황만 본다면 골드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역시 마라스 대장이다.”
마크가 토담 위에 당당히 올라서 있는 마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라스는 자유민 출신으로, 5백인대를 이끌고 서부국경지대를 전전하며 다수의 국지전을 경험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혹시 모를 제이콥 용병대의 공격에 대비해 언덕 주변으로 땅을 파 토담을 만들고 주변에 정찰병을 투입한 것도 모두 마라스의 생각이었다, 덕분에 기습을 위해 접근하던 제이콥 용병대를 미리 발견하고 단단한 방진을 구축하며 그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마라스를 바라보던 제이콥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이콥은 기습을 통해 최소한의 피해로 마라스를 비롯한 수뇌부를 사로잡기 위해 이번 작전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하지만 언덕 위로 진입하는 순간 어둑했던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며 단단하게 방진을 형성한 마라스 용병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제이콥은 기습작전이 실패했음을 알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단단한 방진을 형성했다고 해도 전체적인 전력에선 제이콥 용병대가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이었다.
“방진이 제법 단단합니다. 토벽까지 만들어 놓은 걸 보니 쉽게 굴복할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잠시 뒤로 물러나 다시 한번 협상을 시도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대장, 이대로 전투가 벌어지면 저희 쪽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볼 겁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시간이 없다. 무조건 오늘 안으로 녀석들을 굴복시켜야 해!”
이대로 전투가 벌어질 경우, 어느 정도 피해는 있겠지만, 다수의 소드 유저와 엑스퍼트가 있는 이상 제이콥 용병대가 어렵지 않게 전투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제이콥 용병대의 목적은 이들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흡수해 용병대의 몸집을 불려 조금 더 유리한 상황에서 전쟁에 참전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투를 통해 강압적 통합을 이룬다면, 다수의 사상자로 인해 전력의 감소는 물론 통합된 마라스 용병들 사이에서도 원한을 가진 이들이 생길 것이다.
전쟁 중 가장 두려운 것은 앞에서 다가오는 적이 아닌 뒤에서 날아오는 칼이었다.
제이콥 용병대의 조장들이 전투를 꺼리는 것 역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제이콥은 지속적인 조장들의 만류에 결국 직접 마라스를 향해 다가갔다.
“마라스, 그대에게 부대장 자리를 내어주겠다.”
“부대장? 우리 마라스 용병대는 통합을 원치 않는다.”
마라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젠장! 마라스, 도대체 이유가 뭐냐! 고작 하급용병대 주제에 왜 중급 용병대인 우리와의 통합을 거부하는 것이냔 말이다!”
제이콥이 분통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이유?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다. 그 전에 그대에게 묻겠다. 통합이 이루어지면 마라스 용병대의 조장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건…!”
“고작 하급 용병일 뿐이니 다시 평대원으로 돌아가겠지, 그리고 그 자리를 제이콥 용병의 대원들이 차지하겠지? 아니, 그전에 인원도 늘었으니 병력도 새롭게 재편성하겠군.”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설마 소드 유저들이 하급 용병의 한낱 조원으로 들어가길 바라는 것인가?”
“그래 줄 수 있나?”
“난 지금 농담이나 듣자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제이콥이 굳은 얼굴로 마라스를 노려보았다.
“농담? 그럼 묻겠다. 우리 마라스 용병대의 최대 강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그야 당연히 집단전에서….”
“그렇다. 집단전이다. 집단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호흡이다. 우리 마라스 용병단이 집단전에 능한 건 우리 모두 설원을 뒹굴며 함께 훈련하고 먹고 자며 사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집단이 끼어들면, 어떨 것 같나?”
마라스의 말에 제이콥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라스의 말대로 조장을 바꾸고 새로운 조원들이 합류하고 부대를 재편성하면, 호흡을 중시하는 진형은 흔들리고 마라스 용병대의 강점은 사라진다. 나아가서는 중간에 끼어든 새로운 용병들로 인해 생겨난 균열은 순식간에 진형을 무너트릴 것이다.
“너희가 우리와 통합하려는 목적은 제국전쟁에 참전하려는 것이겠지?”
“그, 그렇다.”
“우리 마라스 용병대는 전역한 병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즉, 집단전엔 강할지 몰라도 난전에는 약하다는 말이다. 진형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 마라스 용병대에서 가장 많은 피해가 나올 것이다. 이대로 통합하면 전쟁이 끝났을 때 우리 마라스 용병대는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유리가 너희와 통합을 해야 하나?”
“아직… 시간은 있다. 얼마든지 훈련으로 극복할 수 있다.”
“흥, 조장이 바뀌었는데도 말인가?”
“….”
마라스의 말에 제이콥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집단전에서 조장의 역할은, 각 조원들의 역량을 파악하고 전투의 상황에 따라 호흡의 강약을 조절하며 대장의 명을 정확하고 빠르게 이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막 새로 들어선 조장이 조원들의 성향과 역량을 파악하고 집단전을 이끌어가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이라도 극히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통합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냐?”
“우리 마라스 용병대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대들과 통합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마라스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휴! 어쩔 수 없지, 굴복을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이후 벌어질 일의 책임은 마라스 당신에게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나 마라스, 책임이 있다면 떳떳하게 질 것이다. 그대 역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책임을 그대가 오롯이 지길 바란다.”
“두고 보면 알겠지!”
제이콥은 당당한 마라스의 태도에 찝찝한 기분을 날려 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돌아왔다.
“이야기는 모두 들었겠지?”
제이콥이 주변에 늘어선 용병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마라스는 명확하게 통합에 대한 거부를 표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래서 마라스의 뜻대로 하급 용병을 조장으로 두고 소드 유저들을 그들의 조원으로 내어줄 건가?”
“그건… 아닙니다.”
“다들 정신 차려! 우리가 이번에 계약하려는 대상이 누군지 벌써 잊은 건가?”
“아닙니다.”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안에 마라스 용병대를 접수한다. 다른 건 필요 없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마라스 하나다. 정문을 집중 공격해 빠르게 마라스를 잡는다.”
“알겠습니다.”
제이콥의 명이 떨어지자 일렬로 늘어서 있던 용병들이 일제히 정문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라스가 고개를 돌렸다.
“잘 부탁하네.”
“걱정 마세요. 분명 잘해 줄 거예요.”
이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단히 잠겨있던 정문이 오히려 활짝 열렸다.
“크아악! 다 덤벼!”
정문이 열리는 순간 가장 먼저 앞으로 뛰쳐나간 밀런이 다가오는 달려오는 용병들을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소드유저라 알려져 있던 밀런의 검에 엑스퍼트를 상징하는 푸른 기운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멍청아! 혼자 날뛰면 어쩌자는 거야! 그러다 죽고 싶어?”
밀런의 뒤를 바짝 쫓아온 로트가 고함을 지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명심해! 효력은 고작해야 차 한잔 마실 시간밖에 안 가!”
“칫, 나도 알아!”
밀런이 로트의 말에 투덜거리며 급히 뒤로 물러나 진형을 유지했다. 그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은 로트가 손에 들린 작은 병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