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용병길드(1)
“백작, 오랜만이오.”
“그동안 적조하였습니다.”
방안으로 들어선 중년 신사는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트라발트 공작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영지에 정신이 팔려 다른 곳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네.”
“덕분에 저희, 그린넨 백작가는 십수 년 동안 힘겨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중년의 신사, 그린넨 백작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긴 했지만, 말속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있었다.
눈앞의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는 강인한 힘과 권력을 외면한 채 지난 십수 년을 칩거하며 영지 발전에만 온 힘을 집중했다. 그러던 중 그린넨 백작가가 대대로 장악해온 상계를 서서히 잠식해 들어오더니, 지금에 와선 양대 가문이 사실상 상계를 양분하고 있었다.
그린넨 백작으로서는 대대로 장악해오던 상계의 절반을 길지 않은 시간 만에 공작가에 내어주는 치욕을 당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리넨 백작가의 최대의 적은 북부 마파린 후작 가문이 아닌 트라발트 공작가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다고 소드마스터이자 상위귀족인 트라발트 공작을 상대로 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없어 우회적으로 감정을 나타낸 것이다.
“백작께서 이 사람에게 쌓인 감정이 많은가 보구려, 하하.”
“감정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그저 지난 시간 공작 각하께서 보여주신 능력에 감탄했을 뿐입니다.”
“칭찬이란 뜻인가?”
“물론입니다. 공작 각하의 상재가 놀라워 드리는 말씀일 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트라발트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화로에 올려놓은 오래된 무쇠 주전자를 들어 직접 찻잔에 따랐다.
“한번 들어보게.”
“감사합니다.”
백작이 찻잔을 들어 향을 맡은 뒤 조심스럽게 차를 마셨다.
“…향이 좋군요.”
백작이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보았다.
“알아보겠나?”
“트루 공국의 실브렌 아닙니까?”
“하하! 역시 알아보는군.”
실브렌은 투르 공국에서만 극소수 생산되는 차로, 죽음의 호수 아래에서만 자생하는 독특한 수초를 가공해 만든 차였다. 맛과 향이 독특할 뿐 아니라 장복하면 백독을 막아준다는 신비의 차였다.
현재 트루 공국에서 생산된 차는 모두 황제를 위해 전량 제국으로 보내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을 만큼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이걸 어떻게….”
“이번에 운이 좋아 트루 공국과 교역을 할 수 있게 되었네!”
트라발트 공작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린넨 백작으로서는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상계의 지각이 변할 만한 큰일이었다. 실브렌은 황제만이 먹는 사치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했다. 그런 실브렌이 시중에 풀리기 시작하면, 고위 귀족들이라면 누구라도 달려들어 황제만이 마신다는 실브렌을 사들여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할 것이다.
트라발트 공작가는 이를 무기 삼아 더욱더 공격적으로 상계를 장악해 나가려 할 것이다.
“…그렇군요. 헌데 왜 절 보자고 하신 겁니까? 설마 트루 공국과의 교역을 자랑하려 부르신 건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아니! 정확히 보았네, 난 지금 트루 공국과의 교역을 자랑하려 자넬 불렀네.”
“…공작 각하!”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백작이 손을 힘껏 말아쥐는 바람에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갔다. 비록 공작에 비해 낮은 작위에 있다고 해도, 그는 변경백이자 고귀한 순혈 귀족인 동시에 동부를 다스리는 맹주로서 공작에게 놀림이나 당할 대상이 아니었다.
만약 상대가 트라발트 공작이 아니었다면 모욕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당장 장갑을 던져 결투를 신청했을 것이다.
“아무리 작위가 낮은 귀족이라고 해도 전 동부를 다스리는 변경백이자 고위 귀족입니다. 어찌 절 놀리시는 겁니까?”
“일단 앉지.”
공작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대화는 더 이어가기 어려울 듯 합니다.”
“다시 말하지, 앉아.”
공작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며 거대한 압력이 그린넨 백작의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크윽, 무, 무슨 짓입니까?”
거대한 압력에 백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온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등 뒤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며 버티고 선 채 공작을 노려보았다. 고작 중급 엑스퍼트인 그린넨 백작이 소드마스터의 기운을 버티고 선 것이다. 만약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그린넨 백작의 몸은 압력을 견디지 못해 혈맥이 터져 목숨을 잃고 말 것이었다.
“대단하군, 마스터의 기운를 버티다니 말이야.”
“….”
공작의 말에도 백작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공작을 노려볼 뿐이었다. 점점 가중되는 압력에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버티고 있다간 온몸에 혈관이 터져 죽을 거야. 어떤가? 이만 자리에 앉는 것이?”
공작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했지만 백작은 아예 눈을 감았다. 비록 실력에서는 떨어진다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었다.
“허허, 의지가 대단하군.”
“……휴!”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순간 그린넨 백작이 탁한 숨을 토해냈다.
“오래전 기억이 나는군, 자네처럼 고집이 센 녀석을 본 적이 있지. 얻어맞으면서도 계속 일어나 공격을 하더군, 포기를 모르는 녀석이었지.”
옛 기억에 얼굴을 찌푸린 공작이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방금 있었던 일은 사과하지, 미안하네.”
공작이 직접 고개를 숙이자 이번엔 백작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조금 전까지 죽일 듯이 몰아붙이던 공작이 이번엔 직접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한 것이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백작이 힘겹게 고개를 숙여 공작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공작이 직접 고개를 숙인 이상 그린넨 백작으로서는 사과를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럼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나? 더 이상 무례한 일은 없을 것이야!”
“알겠습니다.”
그린넨 백작의 대답에 미소를 지은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넬 부른 건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라네, 만약 자네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실브렌 교역권을 자네에게 넘기겠네.”
공작의 말에 백작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지금… 실브렌의 교역권을 제게 넘기겠다는 말입니까?”
“그렇네, 자네에겐 결코 해가 될 일이 아니야. 어떤가, 제안을 들어보겠나?”
“…좋습니다.”
그린넨 백작의 말에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덜컹-
낡은 문이 활짝 열리며, 두터운 피풍의와 로브로 얼굴을 가린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피풍의와 로브 위로 내려앉은 두터운 흙먼지만 보아도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봐! 안으로 들어오려면 일단 먼지라도 털고 들어와야 하는 게 예의 아니냐!”
얼굴 한쪽이 커다란 상처로 일그러진 험상궂은 인상의 장한이 먹고 있던 커다란 뼈다귀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탁자 위에 놓인 커다란 전투 도끼를 들고 달려들 듯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시끄러워요. 노츠 님!”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온 뾰족한 외침에 험상궂은 장한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리며 허둥지둥 탁자에 놓인 뼈다귀를 감췄다.
“루, 루이즈.”
“제가 몇 번을 말해야겠어요? 여기서 음식을 먹는 건 금지라고요. 금지!”
“하하, 그, 그게… 말이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여긴 노츠 님의 식당이 아닌 용병길드예요. 아시겠어요?”
허리에 손을 올리며 눈까지 치켜뜬 젊은 여인이 몰아붙이자, 장한이 당황한 듯 안절부절못하더니 결국 어깨를 늘어트리며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알았다. 다음부터는 안 그러마.”
고개를 푹 숙인 노츠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흥! 아무리 불쌍한 표정을 지어도 이번엔 절대 안 돼요.”
단호하게 말한 루이즈가 고개를 돌려 아직도 로브를 뒤집어쓴 일행들을 세심하게 살피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먼 곳에서 달려온 용병들인 것 같은데, 설마 전쟁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건 아니죠?”
“벌써 전쟁이 선포된 겁니까?”
“정말, 전쟁 때문에 온 건가요?”
루이즈가 깜짝 놀라 오히려 되물었다. 트라발트 공작이 전쟁을 선포한 것은 바로 어제 있었던 대귀족 회의에서였지만, 이 내용이 용병 길드에까지 알려진 건 오늘 정오가 넘어서였다.
눈앞에 있는 용병들이 전쟁에 대해 알고 왔다면, 적어도 이들은 대귀족 회의가 있기 전 이미 전쟁이 일어날 거란 사실을 알았다는 말이었다.
“우연히 들었을 뿐입니다. 그보다… 용병 길드가 맞습니까?”
“맞아요. 뭐가 이상한가요?”
루이스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텅 비어있는 내부로 향했다.
“풋, 길드가 너무 한산한가요?”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다르군요. 평소에도 이렇게 한산합니까?”
“그럴 리가요. 오전까지만 해도 의뢰를 기다리던 용병들로 상당히 북적거렸는걸요.”
“그럼 왜….”
“왜 지금은 한가한지 궁금하겠죠.”
루이스가 미소를 지으며 접수대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쟁 소식이 알려지자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갔죠. 덕분에 지금은 한산하기만 하답니다.”
“전쟁을 피하려 몸을 감췄단 말입니까?”
“아뇨. 전쟁은 용병들에겐 큰돈을 벌 기회예요. 마다할 이유가 없죠. 단지 귀족들을 상대로 최대한 자신들의 몸값을 높게 받으려는 것뿐이에요. 이번 전쟁엔 영지를 얻기 위한 귀족들이 대가 참전할 거란 소식도 함께 전해졌거든요.”
이번 전쟁은 단순한 국지적인 전투가 아닌 백여 년 만에 벌어지는 대규모 정복 전쟁이었다. 참전 귀족들에게 정복한 땅과 재물을 약속한 트라발트 공작의 선언에 영지를 갈망하는 수많은 계승 귀족들과 기사 가문들이 벌써부터 무거운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하지만 영지가 없는 귀족들은 영주들과는 달리 저택을 보호할 약간의 기사들과 수십의 병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절박하게 영지를 원해도 이들만으로 전쟁에 참전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이 훈련된 정예 병력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규모로 용병을 모집하는 것뿐이었다.
“아마도 내일쯤이면 귀족들이 용병들을 대규모로 고용하기 시작할 거랍니다. 그러니 당신들도 참전을 원한다면 내일 다시오는 게 좋을 거예요.”
“오해를 하셨군요.”
“네?”
“전 의뢰를 받기 위해 온 게 아니라 용병등록을 위해 찾아온 겁니다.”
“용병… 등록요?”
“그렇습니다.”
루이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선 거구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요즘 용병 길드를 직접 찾아와 용병 등록을 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대부분 용병 길드에 가입하기 전 대형 용병단에서 일정 기간 훈련을 받은 뒤 용병 등록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혹, 중 대형 용병단에 가입되어 있거나 훈련을 받은 적이 있나요?”
루이스가 뒤에 늘어선 사람들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럼… 용병들을 상대로 용병 시험을 치른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운이 좋았군요. 그럼 혹 소개장은 있나요? 최소 B급 이상의 용병에게 소개장을 받았다면 용병 시험을 치르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부친께서 B급 용병이셨습니다.”
카일이 품 안에서 보일의 서신을 꺼내 내밀었다. 루이스가 서신을 읽기 전 서신에 찍혀있는 용병패 문양을 수정구에 가져가자, 수정구 위로 푸른 기운이 뭉치며 일정한 형태의 글자가 나타났다.
“B급 용병 보일 님의 자제분이셨군요. 카일 님 되시나요?”
“맞습니다. 제가 카일입니다.”
카일이 머리에 쓰고 있던 두꺼운 로브를 벗었다.
“상당히… 젊으시군요. 서신엔 이미 엑스퍼트 경지를 넘었다고 되어 있는데, 몇 살이시죠?”
“며칠 뒤면 성년이 됩니다.”
“확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카일이 단검을 뽑아 가볍게 오러를 끌어올렸다. 청백색의 오러가 서서히 단검을 감싸자, 루이스가 놀란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대, 대단하군요. 벌써 초급을 넘었다니.”
루이스의 말에 카일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카일이 단검에 밀어 넣은 오러의 양은 고작해야 초급 엑스퍼트 끝자락에 닿을 정도의 양이었다. 그런데도 루이스는 카일의 오러만 보고도 초급이 넘었다 확신을 한 것이다.
“제가 용병 길드에서 일한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답니다. 검술을 펼칠 줄은 몰라도 눈치 하나는 빠르죠.”
루이스가 카일의 눈빛에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카일 님은 B급 용병패가 발급될 거예요. 비용은 1골드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용병패는 마법이 적용되어있어 비싼 거예요. 절대 길드에서 가져가는 비용이 없음을 알아주세요. 골드가 없다면 길드 자체에서 빌려드리기도 해요. 이후 의뢰비에서 차감될 겁니다.”
“이게… 끝입니까?”
“간단하죠? 용병 가족과 가문의 사람에게는 그만한 특권을 주고 있답니다. 용병패는 내일 찾으러 오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길드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길드… 장님을요?”
“아마도 이걸 전해주시면 만나주실 겁니다.”
카일이 품 안에서 황금빛 용병패를 루이스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