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18화 (218/404)

218.왕성을 향해(5)

“이거 너무 쉬운데?”

마차가 멈춰서자, 가장 먼저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밀런이 주변을 둘러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옷이나 갈아입어, 아직 성을 벗어난 게 아니야.”

말에서 뛰어내린 로트가 마차에 미리 실어놓은 옷과 검을 밀런에게 던지더니 자신의 물건을 챙겨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기사의 정복을 벗고 본래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으려는 것이다.

밀런 역시 로트에게 받아든 옷을 서둘러 갈아입었다.

그 사이 마차에서 내린 카일이 강변에 올려놓은 다양한 크기의 보트를 살폈다.

대부분의 보트들은 물고기를 잡는 어선이 아닌, 영지의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뱃놀이를 하기 위해 만든 고급스럽고 화려한 보트였다. 하지만 이번에 귀족들이 떼죽음을 당하면서 주인이 없는 보트가 되었다.

첨벙-

카일의 힘에 밀려난 보트가 강으로 빨려 들어갔다. 보트 중에서도 제법 크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배였다.

“으악-.”

그때였다.

숲 안쪽에서 들려온 비명성에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든 카일이 곧장 숲속으로 달려들어 갔다.

* * *

“그럼 그렇지, 어쩐지 일이 너무 쉽다고 했어.”

밀런이 죽은 병사의 몸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감시병?”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밀런의 몸이 순간 굳어지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런 미친, 언제 온 거야!’

숲속은 늦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면서 바닥이 온통 낙엽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만큼 작은 움직임에도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로 발각되기 쉬웠다.

밀런이 감시병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작은 낙엽 소리에 반사적으로 단검을 던질 수 있어서였다. 그만큼 밀런의 신경은 어느 때보다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그런데도 밀런은 바로 뒤에서 다가오는 카일의 움직임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적이었다면 언제 죽는지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야!”

비명을 듣고 달려왔는지 로트가 검을 뽑아 들고는 주변을 살폈다.

“우릴 감시하던 병사다. 다행히 다른 움직임 없는 걸 보니 혼자 온 게 분명하다.”

“확실한 거냐?”

“못 믿겠으면 네놈이 더 찾아보든가!”

밀런이 눈살을 찌푸리며 로트를 노려보았다.

“제가 보기에도 더는 병사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언제 기사들이 달려올지 모르니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군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가시죠.”

로트가 카일의 말에 넙죽 고개를 숙이더니 밀런은 내버려 둔 채 카일과 함께 앞서가 버렸다.

“망할 놈 같으니라고!”

밀런이 투덜거리면서도 서둘러 두 사람의 뒤를 쫓아 강변으로 달려 나왔다.

“서둘러!”

“알았다고.”

로트의 재촉에 짜증스럽게 답한 밀런이 배 위의 노를 잡았다.

“정말 노를 저을 수 있는 거냐?”

로트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밀런을 바라보았다.

이 보트는 두세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을 정도의 넓이에 앞뒤로 긴 유선형 선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선미의 3미터가 넘는 긴 노를 이용해 배를 저어가며 강변을 유람할 수 있었다.

긴 노 하나로 배의 속도와 방향을 제어해야 하는 만큼 오랜 경험과 요령이 필요했다.

때문에 이엘은 벨 총관을 통해 노를 저을 수 있다는 하인 하나를 데려가려 했었다.

“걱정 말라고. 이 정도는 문제 없으니까!”

밀런이 자신 있게 말하며 노를 바닥에 찍어 배를 강변에서 천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부드럽게 밀려나는 모습에 일행 모두 놀란 표정으로 밀런을 바라보았다.

“크험, 요령만 조금 알면 노 젓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헛기침을 한 밀런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본격적으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

강물의 흐름에 더해 밀런이 능숙하게 보트를 제어하자 속도는 점점 빨라졌지만, 배의 흔들림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밀런의 노를 젓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란 뜻이었다.

“단순히 요령만 아는 정도가 아니군요.”

카일의 물음에 밀런이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어부였소, 어릴 때 아비를 따라다닌 덕분에 노를 제법 잡아봤죠.”

“용병은 어떻게 된 겁니까?”

“뭐,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죠. 어부로 평생 살기 싫어 도망친 뒤 용병들 뒤를 따라다니며 검술과 단검을 익히고, 핀크 대장을 만나 용병대에 들었다가 여기까지 온 겁니다.”

밀런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는 최대한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며 카일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껏 카일이 자신에게 관심을 표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일행 중 가장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밀런이었다. 밀런은 세인를 납치하려는 아킨스 자작에게 고용되었다가 역으로 포로가 되어 이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을 뿐, 정식 일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로트 역시 비슷한 처지였지만, 이미 세인이나 툴린에게 인정을 받았으니 밀런과는 입장이 다를 뿐 아니라 이미 안전하게 아킨스 자작령으로 돌아온 이상 이들이 밀런과 결별을 선언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밀런은 아킨스 자작령에서 그동안 일구어 놓았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를 도와주던 핀크 단장은 물론 용병대의 단원 모두를 잃고 혼자 남겨졌다. 더구나 그는 용병들의 골드까지 편취해 오며 여기저기 적들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혼자 남게 되는 순간 평생을 용병들에게 쫓기며 살아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만약 카일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린 여길 빠져나가면 곧 왕도로 향할 겁니다. 밀런 님은 앞으로 어쩌실 생각입니까?”

카일이 밀런을 돌아보며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 그건….”

밀런이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설마 카일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전 용병대를 만들 생각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용병대처럼 느슨한 규율이 아닌, 엄격한 훈련과, 규정과, 규율을 가진 용병대를 만들 것입니다. 만약 규율을 어기면 처벌도 가혹하겠죠. 대신 확실한 보상도 따를 겁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만들 용병대에 들어올 생각이 있습니까?”

카일이 밀런을 돌아보며 물었다.

“절… 영입하겠다는 말입니까?”

밀런이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맞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왜… 절, 그러니까 왜 저 같은 망나니 용병을 부하로 삼으려는 겁니까?”

밀런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맞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재주를 가진 망나니의 손에 칼이 들려 있으니, 적당한 제어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당신을 영입하려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카일이 팔짱을 끼고는 밀런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자, 밀런이 잠시 망설이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저, 절대 대장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좋아! 앞으로 편하게 말을 놓겠다.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대장!”

밀런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속도를 조금 더 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밀런이 밝게 웃으며 힘차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왜 저런 자를 부하로 받아들인 거죠?”

카일의 옆에 앉아있던 이엘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용병으로 경험도 많고 검술에도 재능이 있습니다. 나쁜 습관이야 적당히 제어하면 제 몫을 충분히 할 사람입니다. 오히려 제겐 저런 사람이 필요하죠.”

카일이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밀런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밀런이 마음먹고 노를 젓기 시작하자 보트의 속도가 배는 빨라지며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고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정도야 식은 수프 먹기보다 쉽죠.”

밀런이 이미에 흐르는 굵은 땀을 닦아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사이 배에서 내린 일행들이 하나둘 비밀통로 입구로 향했다.

“생각보다 늦었군.”

공간을 가르며 워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워드는 이른 새벽 이미 내성을 빠져나와 비밀통로 앞을 지키고 있었다.

“곧 순찰병들이 이 주변을 지날 거다.”

“그럼 서둘러야겠군요.”

“제가 앞장서죠.”

밀런이 가장 먼저 통로 안으로 뛰어들자, 그 뒤를 따라 일행들도 하나둘 통로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이미 다들 한 번 왔던 길이라 그런지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비밀통로를 거침없이 빠져나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한 무리의 인마가 카일의 앞을 막아섰다.

“늦었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우린 새벽에 도착했다.”

어제 저녁 무렵 성을 빠져나온 코퍼 용병대는 밤새 말을 달려 인근 영지에서 카일과 일행들이 타고 갈 말을 구해 비밀통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럴 것 없다. 우린 엄연히 골드를 받고 의뢰를 처리한 것뿐이다.”

“그래도 덕분에 편하게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카일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현하며 코퍼가 내민 말고삐를 받아 들었다. 일행들 역시 각자 말 위에 올랐다.

“길은 내가 안내하마.”

코퍼가 가장 앞장서 말을 달려 나가자, 코퍼 용병대와 카일 일행들이 빠르게 그 뒤를 쫓으며 아킨스 자작령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여긴 평원지대라, 이렇게 달리면 저녁 무렵이면 아킨스 자작령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거다.”

코퍼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넓게 이어진 평원 위로 말들이 뿜어내는 뿌연 먼지가 일어났다.

“왜 그러세요?”

“아무래도 불안하군요.”

카일이 옆으로 다가온 세인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평원지대라 말을 달리며 생긴 흙먼지가 멀리서도 보일 겁니다.”

“아!”

“아마 하늘에서는 더 잘 보일 겁니다.”

카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서서히 저물어가는 태양을 사이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적은 점들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카일!”

워드가 급히 카일에게 다가와 소리쳤다.

“와이번이다.”

“와이번!”

워드의 말에 일행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평원에서 와이번을 마주치면 끝이다. 아무리 빠른 말이라도 와이번보다 빠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코퍼 대장님! 뒤를 돌아보지 말고 곧장 말을 몰아 벗어나십시오.”

“어쩌려는 것이냐!”

코퍼가 뒤로 물러나는 카일을 돌아보며 소리쳤지만, 카일을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워드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워드 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얼마든지!”

“카일 님! 저도 가겠어요.”

세인이 재빨리 다가왔지만, 카일이 손을 들어 막았다.

“세인 경은 아직 무리입니다.”

“하지만…!”

카일은 세인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고 급히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카일!”

이엘이 멀머리를 돌려 멀어져가는 카일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곧장 시안느가 앞을 막아섰다.

“늦었어요. 지금 돌아가면 카일에게 방해만 될 뿐이에요.”

시안느의 말에 이엘이 입술을 깨물었지만, 딱히 반박할 수는 없었다.

“어서 가요. 지금 카일을 도울 방법은 우리가 안전히 전장에서 멀어지는 것뿐이에요.”

“아, 알았어요.”

이엘이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일행을 쫓아 말을 달려 나갔다.

* * *

“큰일 났습니다!”

루트가 다급히 조세츠 자작의 방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하하, 이런, 루트 아니냐! 어서 와 나와 술이나 한잔하자꾸나! 이거 혼자 마시려니 영 심심해.”

자작이 루트를 향해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자작님!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 모트 자작이 와이번을 소환했습니다.”

“와이번? 큭, 하긴, 여기서 할 일이 끝났으니 왕성으로 돌아가려는 것이겠지.”

조세츠 자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지금 카일과 일행들이 펠론 자작의 도움으로 성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카일이? 큭큭, 용케도 펠론 자작을 구워삶았나 보군. 모트 자작의 배가 좀 아프겠어.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모트 자작이 전날 퇴출시킨 기사들도 함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로트의 말에 그때서야 조세츠 자작의 얼굴에 희미하게 빛이 돌아왔다.

“모트 자작이 카일을 죽이려 와이번을 소환했단 말이냐?”

“네! 분명합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왜 퇴출시킨 기사들을 끌고 나왔겠습니까? 그러니 어서 모트 자작을 말리셔야 합니다.”

로트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자작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조세츠 자작은 오히려 로트의 팔을 뿌리치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하! 모트 자작, 이런 멍한 놈!”

조세츠 자작이 대소를 터트리며 술잔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모트 자작, 그대 명복을 빌어주지, 와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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