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왕성을 향해(4)
”염병할!”
“젠장!”
“우라질 놈, 왜 따라 하는 것이냐!”
“따라 하긴 누가 따라 했다는 겁니까? 지금 제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밀런의 투덜거림에 툴린이 힐끔 밀런이 입은 시종 복장을 살피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녀석 생각보다 잘 어울리구먼.”
“흥, 영감님이야말로 아주 천직인 것 같습니다. 이참에 계속 마부를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놈이! 대 마법사를 뭐로 보고!”
툴린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들린 채찍을 높게 들어 올렸다. 밀런 역시 지지 않고 화난 얼굴로 툴린을 쏘아보았다.
“그렇게 싸우다간 성문 앞에 도착도 하기 전에 들키고 말 겁니다.”
푸른빛으로 염색한 코트형 레더아머와 방어구를 갖춰 입은 루트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말했다.
루트가 입은 레더아머와 방어구는 모두 그린넨 백작 가문의 혈족을 호위하는 블루 코요테 기사단의 정복으로, 루트가 시안느와 함께 기사단의 정복을 입고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염병할! 왜 난 시종이고 저 녀석은 기사단 정복이야!”
밀런이 루트를 보며 투덜거렸지만 루트는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며 반박했다.
“큭큭, 그 얼굴로 기사단 정복이 가당키나 할 것 같으냐!”
루트의 말대로 밀런은 오랜 용병 생활 때문인지 검게 그을린 거친 피부에 얼굴을 가르는 상처까지 있어 기사 역할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젠장, 내 얼굴이 어때서?”
“그야 본인이 더 잘 알겠지.”
밀런이 발끈해 루트를 노려보았지만, 루트는 밀런의 눈빛을 무시한 채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밀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루트에게 달려들려는 모습이었다.
“그만 하세요. 곧 성문 앞이에요.”
그때였다.
마부석 뒤, 작은 창이 열리며 들려온 세인의 목소리에 밀런이 행동을 딱 멈추더니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큭, 이제 보니 세인이 녀석의 천적이었군.”
“칫, 처, 천적은 무슨.”
밀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더 이상 툴린이나 루트를 향해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사실 변복이 원래의 신분과 가장 차이가 나는 사람은 세인이었다.
툴린이야 그동안 신분을 숨기고 공방을 운영했던 만큼 툴툴거리긴 해도 쉽게 마부 역할을 받아들였다. 밀런 역시 루트의 기사 역할에 화가 났을 뿐 용병으로 험난하고 다양한 경험을 했기에 시종 분장에 그다지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세인은 귀족일 뿐 아니라 서임을 받은 엑스퍼트 급 기사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낮은 신분의 시녀 역할을 받아들이는 건 그녀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지!”
마차가 성문 앞으로 다가서자 성문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기사가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입니까?”
루트가 앞을 막아선 기사들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어느 가문의 마차입니까?”
“상당히 무례한 질문이군요.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입니다. 설마 백작 가문의 문장을 몰라 물어보는 겁니까?”
다분히 공격적인 루트의 대답에 앞을 막아선 기사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 역시 마차에 새겨진 백작가의 문장뿐 아니라 마차를 호위하는 두 기사가 백작가의 직계혈족을 보호하는 블루 코요테 기사단의 기사들이란 사실까지 파악했지만, 그저 의례적으로 가문을 물어본 것뿐이었다.
“아, 그린넨 백작 가문의 기사분들이셨군요. 혹, 어딜 가시는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꼭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루트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내성을 출입하는 인원과 신분을 철저하게 확인하라는 부단장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설마 그 명에 저희 백작 가문도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까?”
루트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앞을 막아선 기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검문에 불응한다면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고 명하셨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흠, 그건….”
루트가 짐짓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마차로 다가갔다.
“아가씨”
루트의 부름에 마차의 작은 창이 열렸다.
“무슨 일이세요?”
“모트 자작의 명 때문에 내성을 빠져나가려면 검문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루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으로 다가선 기사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란타나 기사단의 헌트라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마차를 잠시 확인하겠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설마 지금 백작가의 직계혈족이 탄 마차를 검문하겠단 말인가요.”
이엘이 불쾌함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왕실 기사단이라지만 너무 무례하군요. 왕성을 출입할 때에도 대영주 가문의 마차는 검문하지 않는 게 관례 아닌가요. 하물며 여긴 왕성도 아니잖아요.”
“전 그저 명을 따르는 기사일 뿐입니다.”
“하지만!”
헌트는 곧 화가 난 영애의 목소리가 터질 것을 기다리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자제나 영애들이 제 가문의 힘과 기사들만 믿고 섣불리 결투를 신청했다가 망신만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헌트는 백작가의 영애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이런 헌트의 생각과는 달리, 뜻밖에도 마차 안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애, 굳이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마차 안만 잠시 확인시켜 주시지요.”
“그래도 될까요? 혹 불편하다면….”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단단히 화가 났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애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온화하게 바뀌어 있었다.
“문을 열어라!”
이엘의 명에 마부석에 앉아있던 밀런이 급히 마차의 문을 열었다. 분명 밀런의 행동은 시종으로 보기엔 어설프고 어색했지만, 마차 안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던 헌트는 밀런의 어색한 행동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 버렸다.
“당신은!”
마차의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헌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거구의 사내, 카일이었다.
덕분에 시녀 복장을 하고 고개를 잔뜩 움츠렸던 세인은 이미 헌트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당신?”
카일이 헌트의 말에 눈썹을 찡그리며 천천히 기세를 드러냈다. 카일은 작위를 계승할 후계자였다. 비록 왕실에 정식 승인을 받아 귀족원에 등록되어야 하지만, 전대 가주에게 정식으로 물려받은 인장 반지가 있는 이상 왕실에 대한 승인은 그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지금 헌트의 태도는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헌트 경, 지금 그대의 행동, 상당히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허억!”
가슴을 조여오는 거대한 압력에 헌트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죄, 죄송합니다. 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헌트가 고통을 참으며 급히 사과했다. 상대는 부단장 모트 자작을 패퇴시킨 상급 엑스퍼트였다. 더구나 조금 전 헌트의 행동은 명백히 카일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아침부터 피를 볼 생각은 없으니 사과를 받아들이죠. 하지만 이런 무례는 두 번 받기 싫군요.”
카일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헌트에게 집중시켰던 기세를 거둬들였다.
“그럼 이제 성을 나가도 되겠습니까?”
“그건…!”
카일의 말에 헌트는 제대로 답할 수가 없었다. 어제저녁 무렵 부단장인 모트 자작에게 카일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으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카일과 그 일행들만 왔다면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아 붙잡아 놓거나 기사단을 동원해 카일을 제압했겠지만, 지금처럼 그린넨 백작가의 위세를 등에 업고 명분을 따지고 든다면 헌트로서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혹 어디를 가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젠 행선지까지 알려드려야 합니까?”
카일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헌트를 응시하자 헌트가 급히 손을 저었다.
“그,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언제 적 와이번이 나타나 공격해 올지 모르니 안전을 위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놓으려는 것뿐입니다.”
헌트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적 와이번이라…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외성 서쪽으로 강을 따라 작은 숲이 길게 이어져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작령의 귀족 자제들이 배를 타던 곳이라기에 영애를 모시고 한번 찾아가 보려 합니다.”
“…그, 그렇군요.”
헌트가 황당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불과 며칠 전 자작령이 공격당해 영주 일가가 몰살당하고 귀족 거주지역이 파괴되면서 언제 다시 기습이 일어날지 모를 상황이었다. 더구나 바로 어젠 이곳 아킨스 자작령을 책임지고 있는 모트 자작을 패퇴시키면서 란타나 기사단까지 적으로 돌린 덕분에 카일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형국이었다. 그런데도 한가하게 백작가의 영애와 피크닉을 즐기려는 카일을 헌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젠 가도 됩니까? 이만하면 충분히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만?”
“물론입니다. 나가셔도 좋습니다.”
헌트가 뒤로 물러나자 툴린이 재빨리 마차를 움직여 내성을 빠져나갔다.
헌트가 멀어져가는 마차를 보며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론!”
“옛!”
“넌 즉시 발 빠른 병사 하나를 뽑아 녀석의 뒤에 붙여라! 어디서 뭘 하는지 확실히 알아봐, 어쩌면 놈이 성을 빠져나가려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난 하츠 조장을 만나 지금 상황을 보고하고 오겠다.”
“알겠습니다.”
론이 급히 병사들을 향해 달려가자 헌트 역시 내성 안으로 향했다.
* * *
“크윽! 쿨럭”
격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한 모트 자작이 손에 들린 최상급 포션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빌어먹을!”
모트 자작이 낮은 욕설을 내뱉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카일과의 결투에 패한 자작은 부하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숙소로 돌아왔지만 날이 밝은 지금까지도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카일의 끈적하고 집요한 오러가 끈질기게 내부에 남아 모트 자작의 오러와 충돌하며 내상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아껴둔 최상급 포션을 사용하고 나서야 겨우 카일의 오러를 밀어낼 수 있었지만, 내상이 온전히 치료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모트 자작의 내부에 남았던 오러의 정체는 암흑마기였다. 집요하고 끈질긴 마기가 모트 자작의 내부에 남아 지속적으로 내상을 입히며 괴롭힌 것이다.
“부단장님! 하츠입니다.”
“들어와.”
모트 자작이 분노를 경우 가라앉히며 안으로 들어선 하츠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분명 급한 일이 아니면 당분간 찾지 말라 명했을 텐데?”
모트 자작이 붉게 충혈된 눈을 들어 하츠를 노려보았다.
하츠는 모트 자작의 살기 어린 눈에 잠시 당황했지만,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조, 조금 전 내성 성문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그린넨 백작 영애의 마차가 내성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설마, 백작가의 영애가 외출했다고 날 찾아오진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백작 영애의 마차에 카일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뭐라!”
꽝-
모트 자작이 말아쥔 주먹을 내려쳤다.
“분명 내 명이 없이는 절대 성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 했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다른 일행 없이 영애와 마차에 함께 타고 있어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행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혹시 몰라 이니엘 영애의 거처에 심어 놓은 하녀에게 확인해보니 카일이 이른 아침 영애를 찾아가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둘이서만 말인가?”
“호위 기사가 주변에 있긴 했지만, 정원에서 둘이 함께 식사를 한 후 차를 마시며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이후 호위 기사 둘과 시종과 시녀 한 명씩을 대동한 채 외출을 나간 것 같습니다.”
“쯧, 역시 펠론 자작이군, 벌써부터 정략혼을 추진하고 있는 건가?”
“그린넨 백작가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요. 신분이나 가문이 백작가에 비해 떨어지긴 해도 일단 계승 작위를 가진 정통귀족에 상급 액스퍼트입니다. 백작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그렇긴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외출이야. 더구나 펠론 자작이라면 카일부터 성 밖으로 빼돌리고도 남을 인사지!”
모트 자작이 얼굴을 찌푸리자 하츠가 고개를 저었다.
“놈이 성을 빠져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미 각 성문에 기사들을 증원해 놈이 빠져나갈 길을 모두 차단해 놓았습니다.”
“역시 하츠로군.”
“감사합니다.”
모트 자작이 다소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댔다. 밤새 카일의 오러를 밀어내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한순간 피로가 몰려온 것이다.
“흠…”
“왜 그러십니까?”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무언가 놓친 것 같은데 알 수가 없단 말이지 녀석이 향한 곳이 서쪽에 위치한 숲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예전부터 귀족가의 자제들이 배를 타고 놀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배? 강을 끼고 있는 숲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하츠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모트 자작을 바라보았다.
꽝-
“이런! 속았다. 빌어먹을, 당장…!”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던 모트 자작이 일순 멈추더니, 천천히 다시 자리에 앉으며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부단주님, 서둘러 놈을 쫓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럴 필요 없다.”
“네?”
“큭큭, 이거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왔군. 넌 지금 즉시 벨런과 벤트를 데려와라! 녀석들과 갈 데가 있다.”
“…도대체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큭, 빚 갚으러 가야지.”
어리둥절해 하는 하츠를 뒤로하고, 모트 자작이 느긋하게 가죽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찝찝함이 사라지자 오히려 상쾌하고 편안한 기분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