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16화 (216/404)

216.왕성을 향해(3)

해가 저문 늦은 저녁 무렵, 코퍼용병대와 함께 토일이 카일을 찾았다.

“카일… 님,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토일이 반가움에 달려가려던 걸음을 멈추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카일 님께서 계승 귀족이란 사실도 들었습니다. 그동안 무례한 행동이 있었다면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아,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그저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카일이 서둘러 토일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저 같은 평민이 고귀한 귀족분에게… 당치 않으십니다.”

“그럴 리가요. 전 예전처럼 토일 님과 편하게 지내고 싶어요.”

“그래도… 어찌…….”

“부탁드려요.”

카일의 말에 고개를 숙였던 토일이 슬며시 카일의 얼굴을 살피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될까… 요?”

“물론입니다.”

“하하, 좋다. 그럼 나도 이전처럼 편하게 대하마.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된다.”

“걱정 마세요. 그럴 리 없으니까. 그보다 이번에 상단의 피해가 컸다고 들었어요.”

카일의 말에 밝게 웃음을 짓던 토일의 표정이 침울하게 굳어져 버렸다.

“이번에 상단 일꾼 절반 정도가 목숨을 잃어, 더 이상 상행을 이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코퍼용병대와도 이곳에서 계약을 종료하기로 했다.”

“그럼 부단주님께서는 본단이 있는 왕도로 곧장 올라가시는 겁니까?”

“아니다. 이번에 너무 무리하셨는지 여기서 며칠 더 휴식을 취하셔야 할 것 같구나.”

“설마, 병이 나신 겁니까?”

“그저 피로에 지친 것이니 큰 걱정은 하지 말거라. 며칠 휴식을 취하시면 일어나실 거다.”

“다행이군요.”

“넌 어쩔 생각이냐? 모트 자작과의 결투에서 이겼다는 소식은 들었다만, 걱정이구나. 자작은 편협한 인물이라 널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텐데….”

“저도 짐작은 하고 있어요. 해서 내일 성을 떠날 겁니다.”

“모트 자작이 쉽게 허락하지 않을 거다.”

“허락을 받고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설마, 몰래 빠져나갈 생각이냐?”

토일이 급히 주변을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린넨 백작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펠론 자작과 친분이 있었느냐?”

토일이 깜짝놀라 물었다.

그린넨 백작 가문은 트라발트 공작 다음으로 상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영주이자 상인 가문이었다.

아일론 상단처럼 작은 중소 상단의 입장에서는 그린넨 백작 가문과의 작은 인연 하나만으로도 앞으로 상단을 이끌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펠론 자작보다는 백작 가문의 영애와 약간의 친분이 있죠.”

“여, 영애?”

“저와 함께 다니던 이엘과 시안느 경을 기억하시죠?”

“설마!”

“맞아요. 이엘이 바로 그린넨 백작 가문의 셋째 영애에요. 시안느 경은 그녀의 호위기사죠.”

“허허, 귀족일 거란 생각은 했지만, 설마 백작가의 영애일 줄은 몰랐구나. 그럼 이전부터 왕래가 있었던 거냐?”

토일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카일이 계승 작위를 가진 정통 귀족이라면 그린넨 백작 가문과 오래전부터 왕래하며 친분을 쌓아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럴 리가요. 그저 우연히 알게 된 것뿐이에요.”

“우연?”

“죄송하지만 더 이상 자세한 말씀은 드릴 수가 없어요.”

“귀족가의 비밀이라면 궁금하기는 하지만, 할 수 없지, 그보다 아쉽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영애와 좀 더 친하게 지낼 걸 그랬다.”

토일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흠, 아무리 펠론 자작의 도움이 있다고 해도 내성을 빠져나가긴 쉽지 않은 일이다. 왕성에서라면 다른 기사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여기선 전력에서 펠론 자작이 열세다. 모트 자작이 무력을 내세우면 펠론 자작도 물러날 수밖에는 없다.”

토일이 고개를 저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더니 곧 말을 이었다.

“차라리 래쇼트 백작을 기다리는 건 어떻겠느냐? 잠시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백작만 돌아온다면 모트 자작도 어쩔 수 없을 거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백작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아니, 모트 자작 역시 백작이 돌아오기 전 어떻게 해서든 저와의 일을 끝내려 할 겁니다. 그 전에 여길 빠져나갈 생각이에요. 모트 자작도 설마 곧장 성을 빠져나갈 거란 생각은 못할 겁니다.”

“허를 찌를 생각인가 보구나.”

“내성만 빠져나가면, 다음부터는 쉬울 테니까요.”

“아! 비밀통로…!”

카일의 말에 토일 역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휴, 그럼 결국 너와도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구나.”

“그동안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아니다. 오히려 우리 아일론 상단이 큰 도움을 받았다. 부디 조심히 왕도로 올라가거라.”

토일이 아쉬운 표정으로 카일의 어깨를 두들겼다.

* * *

이른 아침, 카일과 일행들은 최대한 란타나 기사단의 눈을 피해 내성 깊숙이 자리한 이엘의 거처로 향했다. 백작가와의 분쟁을 걱정해서인지, 다행히 내성 안으로 들어갈수록 란타나 기사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카일 님 되십니까?”

내성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중년의 기사가 다가와 절도있게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제가 카일입니다. 백작영애를 뵙기위해 찾아왔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내를 맡은 기사 토랜입니다.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기사 토랜이 앞장서 걸으며 조십스럽게 카일을 살폈다.

“제게 궁금하신 것이 있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저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아 여쭤본 것뿐입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토랜도 안심이 되었는지 다소 굳었던 얼굴이 풀어졌다.

“송구합니다. 고작 평기사에 불과한 제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상급 엑스퍼트, 그것도 차기 마스터로까지 거론되는 카일 님을 만났다는 생각에 그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차기… 마스터?”

“어제의 결투를 본 기사들도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 평생 잊지 못할 결투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토랜이 선망 가득한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이미 상급 엑스퍼트에 들어선 카일의 강함에 매료되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한 말씁이군요. 그럼 이제 진정 묻고 싶은 말을 들어볼까요?”

“그건…!”

“아마도 초급의 끝자락에서 정체된 지 오래된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걸 어떻게….”

토랜이 깜짝 놀라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전체적인 균형이 미묘하게 어긋났군요. 아마도 검술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마, 맞습니다. 수십 년 전 제국의 기습에 조부께서 돌아가시며 검술 일부가 유실되었습니다. 다행히 부친께서 부단한 노력으로 일부 복원했지만, 완전하진 않아 십 년째 중급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검술의 문제는 제가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해결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시간도 부족하고요.”

“아, 알고 있습니다.”

토랜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도 지금 당장 떠나야 하는 카일에게 큰 기대를 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상급엑스퍼트에게 작은 조언 하나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물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토랜 님의 문제는 지금 당장이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네?”

“좀 아플 수 있습니다.”

카일이 주먹을 말아쥐며 한 발을 내딛는 순간, 토랜의 아랫배에 정확히 카일의 주먹이 내려꽂혔다.

퍼억-

낮은 타격음과 함께 토랜의 신형이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크윽, 쿨럭!”

토랜이 격한 기침을 토하며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냈다.

“아랫배로 통하는 마나포인트에 타격을 가해 막힌 통로 일부를 열었습니다. 돌아가 쉬지 말고 마나연공검을 펼쳐 아랫배의 마나포인트를 가득 채우세요. 그럼 경지를 넘어설 수 있을 겁니다.”

카일의 말에 고통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여 피를 토하던 토랜이 급히 카일을 바라보았다.

“저, 정말입니까?”

“전 벽에 작은 실금을 만들어 놓은 것뿐입니다. 경지를 넘어서는 것은 오직 토랜 님의 부단한 노력에 달려있어요.”

“아!”

토랜이 급히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카일의 말에 따라 수련을 하고는 싶지만, 아직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카일 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고 언젠가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하하, 그저 작은 도움일 뿐이니 잊으셔도 됩니다.”

카일은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지나쳤다.

* * *

“다 왔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정원에서 카일 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른 분들은 절 따라오시지요. 내성을 빠져나가려면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서두르시죠.”

토랜이 카일에게 고개를 숙이며 툴린을 비롯한 일행을 데리고는 서둘러 정원을 빠져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카일이 급히 사라져가는 토랜과 일행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정원 안쪽으로 급히 들어섰다. 그러자 뜻밖에도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이엘이 카일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카일.”

“…이엘?”

카일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엘과 함께 작은 탁자 위에 차려진 고급스러운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식사 전일 것 같아 준비했답니다.”

“죄송합니다만, 내성을 빠져나가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복장은….”

카일이 옅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장신구와 아름다운 푸른 드레스를 갖춰 입은 이엘을 돌아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카일에게 잘 보이려고 새벽부터 준비한 건데… 마음에 들지 않나요?”

이엘이 슬픈 표정으로 카일에게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제가 예쁜가요?”

카일의 말에 이엘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호호, 다행이에요. 카일의 마음에 든다니.”

난처한 표정을 지은 카일에게서 한걸음 물러난 이엘이 식탁으로 향하자, 카일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순 이엘의 장난에 말려들었다는 생각에 화도 났다.

“휴, 아무래도 이엘은 여길 떠날 생각이 없나 보군요. 미안하지만 식사는 다음 기회에 함께 하기로 하죠.”

카일은 냉정하게 돌아섰다.

카일은 은밀하게 성을 빠져나가기 위해 서둘러 달려온 것이지, 이엘과 함께 즐겁게 식사나 하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잠깐, 기다려요.”

설마 카일이 냉정하게 돌아설거란 생각은 못했는지, 이엘이 황급히 일어나 카일을 불렀지만 카일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잠시만!”

앞서가는 카일의 앞을 어디서 나타났는지 시안느가 급히 막아섰다.

“설마, 시안느 경도 절 막을 생각입니까?”

카일이 굳은 얼굴로 앞을 막아선 시안느를 바라보았다.

“아니,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잠시 장난을 치긴 했지만, 이러시는 건 다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잠시만 아가씨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시안느가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사이 급히 다가온 이엘이 카일의 팔을 붙잡았다.

“카일!”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카일이 돌아서자 이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카일이 이렇게 화를 낼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카일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뿐이었다. 그러기 위해 어제저녁부터 부족한 장신구와 드레스를 찾아 준비했지만,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엘은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말을 하려 했지만, 어색하게 굳어진 상황에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난감해져 버렸다.

침묵이 이어지고 카일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갑게 굳어가자, 보다 못한 시안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카일도 알겠지만, 어제의 결투로 카일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 서둘러 성을 빠져나가려 이엘을 찾아왔지요.”

“이른 아침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그린넨 백작가라고 해도 은밀하게 성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요. 기사단의 힘에선 밀리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시안느의 솔직한 말에 카일의 얼굴은 더더욱 굳어지자, 그녀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정문을 통해 내성을 빠져나가는 것은 가능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카일의 물음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지 시안느를 대신해 이엘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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