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왕성을 향해(2)
“무슨 말씀입니까?”
“란타나 기사단은 이곳보다 몇 배는 넓은 왕성을 수호하는 최강의 기사단이에요. 그들의 경계가 허술할 것 같나요?”
“하지만 분명 허점은 있을 겁니다.”
“아니, 내성을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때였다. 공간이 갈라지듯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워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워드 님.”
“내부까지 확인했지만, 비밀통로는 안전하다. 하지만 내성에서 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나 혼자라면 몰라도, 이만한 인원이 빠져나가긴 어렵다.”
“전혀 방법이 없는 겁니까?”
“물론 시간을 두고 계획을 세운다면 허점을 만들 수도 있지만, 내일 새벽 성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흠….”
워드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제게 방법이 있어요.”
“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저도 카일과 함께 왕도로 가고 싶어요.”
“왕도로 가겠다는 말입니까?”
“맞아요. 왕도에 들렀다가 절 가문에 데려다 주시면 돼요.”
“그건….”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카일은 처음부터 절 동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줄 생각이었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펠론 자작님이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 백작가의 영애가 신분을 감추고 자유민으로 여행하는 모습을 펠론 자작이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 카일은 생각했다.
“그럼 작은아버지께서 허락만 하시면 함께 가도 좋다는 뜻인가요?”
“물론입니다. 펠론 자작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그렇게 하시죠.”
“좋아요. 그럼 내일 새벽에 찾아오겠어요.”
이엘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전에 자작님의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걱정 말아요. 이미 허락은 받았으니까요.”
“네에?”
“여기 오기 전 이미 허락은 받았어요. 아버님께도 잘 말씀해주시기로 했답니다. 호호.”
이엘이 웃으며 돌아서자 시안느가 잠시 카일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큭큭, 한 방 먹었구나.”
툴린이 멀어져가는 이엘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휴, 영지로 돌아가면 편할 텐데… 왜 절 쫓아 왕도로 가려는지 이해가 안되는군요.”
“정말 모르는 것이냐? 아니면 모르는 척하려는 것이냐?”
툴린이 카일의 얼굴을 살피며 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세상에는 수많은 기사가 있다. 그중에서 상급 엑스퍼트 이상의 실력자를 보유한 대영주가 얼마나 될 것 같으냐?”
“그야….”
“대영주라고 해도 공식적으론 1~2명에 불과하다. 물론 비밀리에 감춰진 기사들이 있겠지만, 공식적으론 그렇다. 하지만 그린넨 백작 가문은 다르다. 그들에게는 상급 엑스퍼트가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없다.”
툴린이 멀리 사라져가는 이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주인 없는 상급 엑스퍼트 부자가 나타났다. 비록 이름뿐인 몰락한 귀족이지만, 그래도 정통 계승 귀족에 작위까지 있다. 대영주인 백작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최상의 사윗감이 아니냐?”
“너무 나가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대영주인 그린넨 백작 가문입니다. 상급 엑스퍼트가 없다고 해도 이미 대영주의 반열에 들어선 가문이 뭐가 아쉬워서….”
“네 신분이 어때서, 오히려 신분으로만 따진다면 넌 고귀한 크….”
“툴린 님.”
카일이 급히 툴린의 입을 막았다.
“전 이대로가 좋습니다.”
“그건….”
“이러시면 툴린 님과 함께 다니기 어렵습니다.”
카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알겠다. 앞으로 조심하마.”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밀런과 루트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어떻습니까?”
“루트는 포션을 먹였으니 큰 문제가 없을 거다.”
“루트 님이… 말입니까?”
카일이 눈이 뒤집힌 채 게거품을 물며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루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히려 밀런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포션의 부작용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만든 포션을 먹였더니 부작용이 꽤 심하더구나. 뭐, 그래도 효과는 확실하다.”
“살아는… 있는 겁니까?”
“큭큭, 걱정 마라 곧 깨어날 거다.”
툴린의 확신에 찬 표정에 카일리 고개를 끄덕이더니 밀런을 바라보았다.
“밀런은 좀 심각해 포션을 쓰지 못했다. 마법사의 포션을 썼다간 부상이 심해 몸이 견디지 못할 거다.”
“그럼 서둘러 사제를 부르는 것이….”
“틀렸다.”
“네?”
“대지의 신전은 귀족 거주지와 인접해 있다. 확인해 본 바로는 이미 신전이 무너져 내렸다는구나.”
“그런….”
카일이 찌푸린 툴린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지금으로선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흠….”
툴린이 카일을 바라보자, 얼굴을 찌푸린 카일이 어쩔 수 없이 밀런의 가슴을 가르고 지난 상처를 세심하게 살폈다.
그리곤 상처에 손을 올린 뒤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웅-
순간 카일의 손에서 밝은 빛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밀런의 몸 안으로 스며들며 천천히 벌어진 가슴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웅웅-
“확실히 신성력의 기운이 강해졌구나, 설마 동결되었던 마나플라워를 풀어낸 것이냐?”
툴린의 물음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강력한 압력과 충격 덕분에 잠시 얼어있던 파편이 흘러나온 것뿐입니다.”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자 카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신성력의 밀도도 일반적인 사제보다 높구나, 상처가 거의 아물었어. 이만하면 큰 무리만 없다면 움직이는 것도 지장이 없을 거다.”
“다행이군요.”
“그보다… 부탁이 하나 있다.”
툴린이 품 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냈다.
“이번에 만든 마법사의 포션이다. 트롤의 피와 마나집적진을 이용해 만든 포션이다.”
“이걸 왜…?”
“여기에 신성력을 밀어 넣어보겠느냐?”
“네?”
“마법사의 포션은 신전의 포션과는 달리 트롤의 피를 제대로 정제하지 못해 부작용이 심하다. 대신 마나의 기운이 더해져 치료력에선 신전 것보다는 떨어져도 회복력에선 신전 포션을 능가한다.”
“제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군요.”
“그야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포션을 중화시키기 때문이지.”
“그럼… 이건?”
카일이 작은 병에 든 붉은 액체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의 양을 중화시키면 루트가 마신 포션 열 병을 만들 수 있다.”
“아!”
“어떠냐? 한번 해보겠느냐? 만약 신성력으로 부작용만 해소할 수 있다면 굉장한 물건이 나올 수 있다.”
“해보죠.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카일이 포션을 손에 쥐었다.
웅웅
카일의 손에서 일어난 순백의 기운이 포션을 감싸 안았다. 그러자 붉은 액체가 격하게 진동하더니 잠시 후 두 개의 층으로 분리되어 버렸다.
위쪽 3분의 2는 마치 맑은 물처럼 투명하고 깨끗하다면, 남은 3분의 1은 진한 보랏빛 액체가 담겨있었다.
“이건 전혀 생각도 못 한 현상이군.”
툴린이 병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지만, 액체는 전혀 섞이지 않고 본래의 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조금 더 연구를 해봐야겠지만, 분명한 건 실패는 아니다.”
“그럼 성공한 겁니까?”
“일단 맑은 부분은 포션이 분명하다.”
“다행이군요.”
“그렇지, 하지만 난 어쩐지 이 보랏빛 액체의 정체가 더 궁금하구나.”
툴린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액체를 바라보았다.
* * *
“공작님.”
“무슨 일이냐?”
“가우디 남작이 찾아왔습니다.”
“응?”
집사의 말에 트라발트 공작이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이번에 정계 복귀를 선언했지만, 이제 막 왕도에 올라온 공작이 곧장 왕궁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일단 왕도에서 생활할 저택을 구입하고 영지에 있던 기사단을 새롭게 정비해 저택을 수비할 기사단도 새롭게 구성해야 했다.
더불어 영지를 공격한 적들을 찾아내는 것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어 트라발트 공작은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집무실에서 보내고 있었다.
“영지 복구에도 시간이 촉박할 텐데, 왜 갑자기 찾아온 것이지?”
“공작님께 직접 말씀드리겠답니다. 아주 다급해 보였습니다.”
“흠…. 하긴 가우디 남작이 함부로 움직일 인사는 아니지, 들어오라고 전하게, 나도 잠시 쉬어야겠어.”
“차를 내오겠습니다.”
집사가 천천히 물러나고 곧 다급한 발걸음과 함께 가우디 남작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주, 주군! 헉헉헉….”
가우디 남작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트라발트 공작에게 예를 취했다.
“무슨 일인가? 쉬지도 않고 곧장 달려온 것 같은데?”
“그, 그보다 이, 이걸 먼저 봐주십시오.”
가우디 남작이 가죽천을 감아 놓은 기다란 물건을 탁자에 올렸다.
“이게 뭔가?”
공작이 가죽천을 풀어내자, 포효하는 드래곤이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스피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트라발트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아보시겠습니까?”
“포효하는 붉은 드래곤! 제국의 상징을 어찌 모르겠나! 더구나 이 붉은 스피어는 황실에서만 사용하는 특수합금이 아닌가?”
“맞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 직접 왕도 대장간에 확인해 보니 분명 황실의 스피어였습니다.”
“이걸 어디서 가져온 것인가?”
“영주성 첨탑 위에 박혀있던 겁니다.”
“…첨탑이라면, 설마 이번 습격에 사용된 스피어란 말인가?”
“그곳은 와이번이 아니라면 절대 오를 수 없는 곳입니다. 누군가 침입했다고 해도 그곳에 스피어를 박아두기는 어렵습니다.”
“……으득, 결국 이번 습격이 제국의 소행이란 말인가?”
“증거는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감히…!”
트라발트 공작의 몸에서 매서운 기운이 피어올라 순식간에 집무실을 잠식했다.
“크윽, 주, 주군….”
가우디 남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고통으로 일그러지자 공작이 급히 기운을 갈무리했다.
“괜찮나?”
“괜찮습니다.”
충격을 받은 듯 창백하게 변한 가우디 남작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
“들어오게.”
“조금 전 신원을 알 수 없는 자가 다가와 이걸 전해주고 갔습니다.”
찻잔을 든 시녀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집사가 단단히 밀봉된 작은 통을 공작에게 건넸다.
“일전에 말씀하신 표식이 있어 내부를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
집사의 말에 공작이 밀봉된 입구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마침 기다리는 소식이군.”
트라발트 공작이 거침없이 밀봉을 풀었다.
툭-
작은 통에서 떨어진 물건은 부러진 검과 함께 어느 한 인물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적힌 서신이었다.
공작은 굳은 얼굴로 천천히 서신을 읽어 내려가더니 부러진 검을 들어 올렸다.
“하하, 이러면 믿지 않을 수 없겠군. 도저히 믿지 않을 수가 없어.”
트라발트 공작이 약간의 힘을 주자 부러진 검이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아이젠 공작, 그대가 전쟁을 원한다면 나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주군…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보겠나?”
트라발트 공작이 가우디 남작에게 서신을 건넸다.
“…베인 자작?”
“카데인 제국, 아이젠 공작의 이복동생이자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고스트 기사단의 단장이지.”
“그럼 이자가…!”
“맞아! 이 부러진 검은 녀석의 독특한 검술로 인해 생긴 흔적이다. 아킨스 영지에서 발견된 물건이니 정확하겠지.”
트라발트 공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군…. 신중하셔야 합니다. 갑작스럽게 증거들이 나타나다니 이상합니다. 혹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라면….”
“하하, 그럼 철저하게 이용당해 줘야지! 혼란을 원한다면 그대로 따라줘야겠지.”
트라발트 공작이 환하게 웃으며 천천히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군.”
“물론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가 되겠지만 말이야. 집사!”
“예!”
“가신회의를 열겠다. 소집령을 내리도록.”
“예.”
트라발트 공작의 명을 받은 집사가 황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