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왕성을 향해(1)
“그, 그만….”
모트 자작이 피를 토하며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카일은 여전히 검게 물든 눈으로 모트 자작을 노려보았다.
“내, 내가 졌다. 그러니… 제발!”
결국 고개를 떨군 모트 자작이 패배를 선언하자, 카일의 눈가로 희미한 순백의 기운이 일어나 천천히 암흑마기를 밀어내며 본래의 금빛 눈동자를 되찾았다.
“부단장님!”
카일이 모트 자작에게 겨누었던 검을 거둬들이자 하츠를 비롯한 기사들이 급히 달려와 무릎을 꿇고있는 모트 자작의 앞을 막아섰다.
“뒷일은 알아서 처리하실 거라 생각하겠습니다.”
“…쿨럭, 크롬벨가의 모트, 마일론 가문의 카일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왕실과 사교계에 정식으로 알리겠다.”
모트 자작이 피를 토하며 겨우 입술을 뗐다. 모트 자작은 란타나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왕실 소속이다. 정당한 결투에서 패했음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곳도 바로 왕실이었다. 더불어 사교계에 이 사실이 정식으로 알려지게 된다면 모트 자작이 그동안 쌓아 올렸던 모든 명예가 한순간 무너지고 더불어 모트 자작을 제물로 카일은 사교계에 화려하게 대비하게 될 것이다. 철저히 카일이란 존재를 비밀로 감춰야 하는 3왕자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아니, 그전에 하실 일이 있지 않습니까?”
카일이 아직도 힘겹게 버티고 선 세인을 돌아보자 모트 자작이 입술을 깨물며 카일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녀석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이미 모트 자작은 내부는 거칠고 파괴적인 암흑마기로 인해 찢어지고 엉클어져 당장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었다.
“…기사단의 명예를 더럽힌 벤트와 벨런을… 기사단에서 불명예 제명 하겠다.”
“부, 부단장님! 제, 제명이라니…!”
하츠가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모트 자작은 손바닥을 펴 하츠를 막았다.
“그만!”
“제명은 너무 과합니다. 차라리 제가 녀석들을 설득해 스스로 기사단을 그만두도록 만들겠습니다. 불명예 제명만큼은 거두어 주십시오. 그리되면 녀석들은 더 이상 기사단에 입단할 수 없습니다.”
하츠의 말에 모트 자작이 카일을 잠시 돌아보았지만, 카일은 두 사람의 대화에 전혀 관여할 생각이 없는 듯 한걸음 뒤로 물러나 관망하듯 바라볼 뿐이었다.
“결정은 이미 내렸다. 물러나라 하츠!”
“하, 하지만….”
“물러나라! 하츠, 이건 부단장인 나 모트의 명이다. 설마 내 명을 거부할 생각이냐!”
“아, 아닙니다.”
분노로 붉게 충혈된 모트 자작의 눈동자에 깜짝 놀란 하츠가 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번 피해에 대한 모든 배상은 나 모트가 하겠다. 어떠냐! 더 바라는 것이 있느냐? 없다면 이만 돌아가겠다.”
“더 이상 자작님과 좋지 않은 일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큭, 이미 내 명예는 바닥까지 추락했다. 과연 너와 밝은 얼굴로 마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그런가요.”
“다음번엔 이 빚은 꼭 갚아주마. 기대하고 있어라.”
모트 자작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앞을 막아선 조세츠 자작으로 인해 걸음을 멈출 수밖에는 없었다.
“…비켜주시겠습니까? 보시다시피 제가 자작님과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못 됩니다만.”
“정말… 날 이용하고, 배신하려 한 것인가?”
조세츠 자작이 억눌린 음성으로 모트 자작을 향해 물었다.
“배신? 큭큭,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카일의 표현이 절묘하군요. 사냥이 끝나면 더 이상 사냥개는 필요 없다고 했던가요.”
모트 자작의 말에 조세츠 자작이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
“어, 어떻게 날 배신할 수 있지? 그대들과 3왕자를 이만큼 이끌어온 것이 누군지 벌써 잊었단 말인가…?”
“물론 잘 알죠. 모두 조세츠 자작님 덕분인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말입니까?”
“뭐라…!”
“자작님 역시 그분을 배신하고, 지금은 3왕자 저하를 모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대의를 위해!”
“물론 잘 압니다. 3왕자님과 저희 역시 대의에 따라 자작님을 살짝 이용한 것뿐이니, 자작님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모트 자작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더니 천천히 걸어 나갔다.
“하츠! 넌 지금 바로 왕도로 가 저하께 물건과 함께 지금 상황을 알리고 일정을 앞당겨야 한다고 전해라.”
“부단장님께서 직접 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난 따로 여기서 할 일이 있다.”
모트 자작이 지나온 길을 살기 어린 표정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 * *
“허허! 대단하군. 란타나 기사단, 그중에서도 모트 부단장을 이기다니….”
“그것보단 저 아이의 실력이 놀랍지 않습니까? 모트 자작을 이겼다는 건 이미 상급 엑스퍼트를 넘어섰단 말인데… 허, 차기 마스터의 자리는 이미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차기 마스터라.”
잠시 수염을 쓸어넘기며 생각에 잠겨있던 소린 남작이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사람은 급한 일이 있어 나가봐야겠군.”
“남작님께서 급한 일이 어디 있다고…?”
“그런 건 자네가 알 것 없네!”
소린 남작이 폰트 남작을 한 차례 쏘아보며 급히 장내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보던 펠론 자작이 한차례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소린 남작이군, 눈치가 빨라.”
“네?”
“듣남작이 아끼는 어린 손녀가 미인이란 소문이 남부 사교계에는 제법 알려졌지. 아마도 곧 볼 수 있을 것 같구나.”
“아!”
“소린 남작이 비록 남부에서도 작은 남작가의 주인이라곤 하지만, 제법 수완도 좋고 눈치도 빠른 늙은이지. 다만, 이번엔 욕심이 과하군.”
“카일이 남부 출신임을 생각하면 남작으로서도 욕심낼 만하죠.”
“넌 걱정도 안되느냐?”
“그다지….”
이엘이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의 눈은 힘겹게 카일에게 다가서는 세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어쩌면 그녀의 가장 큰 적은 오랫동안 카일의 곁에서 그를 기다려 온 세인일지도 몰랐다.
“카일 님.”
“괜찮습니까?”
“상처는 크지 않아요. 그보다 카일 님이 계승 작위를 가진 정통 귀족인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건 어쩌다 보니….”
카일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카일은 세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정통 귀족이 아니다. 그저 오크랜드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한 힐튼 남작으로부터 반강제로 반지를 넘겨받았을 뿐이었다.
다행히 시카니스의 도움으로 마을로 안전히 돌아와 여러 번 반지를 돌려주려 했지만, 그때마다 거부하는 힐튼 남작으로 인해 지금껏 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이젠 스스로 반지의 주인임을 공식적으로 자처한 만큼 싫든 좋든 가문을 이을 수밖에는 없었다.
“아!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밝히고 싶지 않은 신분을 드러내셨군요.”
카일의 난처한 표정에 세인이 급히 사과했다. 정통 계승 귀족이라도, 귀족의 작위와 가문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귀족들도 있다.
바로 몰락한 귀족들이다.
귀족이란 때로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신분적 우위를 내세울 수도 있지만, 귀족으로서 걸맞은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해야만 했다. 더불어 지속적으로 귀족들과 교류하며 가문을 알리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적지 않은 골드가 필요하다. 때문에 영지가 없는 몰락한 귀족 가문들은 이를 감당하지 못해 딸을 부유한 늙은 상인과 정략혼을 시키거나 때론 신분을 감추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세인은 카일 역시 신분을 감추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몰락한 귀족 가문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아닙니다. 귀족 신분에 대해선… 지금 이야기하기엔 적당하지 않군요.”
카일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펠론 자작을 보며 말했다. 힐튼 남작은 그린넨 백작 가문과 적대적인 마파린 후작가를 섬기는 하위 가문이자, 그린넨 백작 가문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힐튼 남작의 계승 작위를 카일이 이었다는 사실을 펠론 자작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카일 님.”
이엘이 환하게 웃으며 펠론 자작과 함께 카일에게 다가오자, 카일이 먼저 펠론 자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먼저 도움에 감사합니다.”
“하하! 아니야, 귀족으로서 정당한 결투를 방해하는 행동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지! 앞서는 내가 자네에게 결례를 했군. 마음이 상했다면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그때의 일은 모두 잊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럼 정식으로 다시 내 소개를 하지, 그린넨 가문의 펠론이라네.”
“마일론 가문의 카일입니다. 이쪽은 다핸 남작가의 세인경입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인 몰티엔 입니다.”
“반갑네, 경이 란타나 기사 6명을 이겼단 이야기는 들었네, 정말 대단한 실력이야!”
“아니에요. 이 모두 카일 님께서 제게 검술을 알려주신 덕분인걸요.”
“…검술을?”
펠론 자작이 깜짝 놀라 물었다. 검술의 비전은 직계가족이 아니면 알려주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도 카일이 검술을 알려줬다면 세인과 카일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검술이라기보다는 그저 작은 요령 몇 개를 알려드린 겁니다. 검술이라고 할 것도 없죠. 이만큼 검술을 새롭게 발전시킨 건 세인 경이 아니십니까?”
“그건….”
“이런, 이제 보니 두 사람 다 검술에 있어선 천재란 말이군.”
“과찬이십니다.”
“어떤가? 오늘 그대의 승리를 축하할 겸 만찬을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그건….”
카일의 난처한 표정에 이엘이 황급히 펠론 자작의 팔을 잡았다.
“작은아버지, 만찬도 좋지만, 지금은 카일 님에게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런, 미처 생각을 못 했구나. 상급 엑스퍼트인 모트 자작과 결투를 벌였다면 자네도 정상적인 몸 상태는 아닐 텐데 말이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다시 하는 수밖에.”
카일이 고개를 숙이자, 펠론 자작이 미소를 지으며 물러나 이엘과 시안느를 남겨두고 돌아섰다.
“카일 님.”
“아가씨. 편하게 불러주셔도 됩니다.”
카일은 갑작스러운 이엘의 존대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그럴 수야 있나요? 카일 님은 엄연한 계승 귀족에다 곧 작위를 이어받으실 거잖아요.”
이엘이 눈을 빛내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제가 불편해 그런 것이니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그럼 카일 님도 전처럼 편하게 이엘이라 불러주세요.”
“…그건.”
“안되나요? 카일 님.”
이엘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그럼 그러죠. 이엘.”
“고마워요. 부탁을 들어줘서. 카일.”
이엘이 환하게 웃었다.
“지금이 그리 웃을 때는 아닌 것 같구나.”
툴린이 굳은 표정으로 카일에게 다가왔다.
“모트 남작이 지금은 순순히 돌아갔어도 분명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하려 들 거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입니다.”
“언제 떠날 생각이냐?”
“내일 새벽녘에 영지를 빠져나가 곧장 왕성으로 행할 생각입니다.”
“글쎄? 모트 자작이 쉽게 성문을 열어줄 것 같지는 않구나.”
“굳이 성문을 통할 필요가 있습니까? 성문이 아니라도 빠져나갈 다른 길이 있지 않습니까?”
“비밀통로를 이용할 생각이군요.”
이엘이 카일의 옆으로 바짝 나가와 물었다.
“그럴 생각입니다.”
“저 녀석이 알고 있는 비밀통로의 존재를 모트 자작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툴린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조세츠 자작을 가리켰다.
“터그 형제가 혹여 비밀통로를 이용하다 발각되지는 않을까 해서 워드 님께 비밀통로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드려 놓았습니다.”
“어쩐지 내성에 들어온 이후 워드가 보이지 않더라니.”
툴린이 한결 안심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성만 빠져나가면 어렵지 않게 성을 벗어날 수 있겠구나.”
“인원이 줄었으니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카일의 말에 툴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아마도 내성을 빠져나가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을 거예요.”
카일과 툴린이 당황한 표정으로 이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