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모트 자작(3)
“귀족이면 되는 겁니까?”
카일이 모트 자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뭐라?”
“귀족이면 당신과 결투를 할 수 있는 거냐 물었습니다.”
“…당신?”
모트 자작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지금 네가 보인 행동은 심각한 귀족 모독행위다. 이 자리에서 참한다고 해도 누구도 내게 잘못을 논할 수 없다. 그분이라도 말이다.”
모트 자작이 검을 움켜쥐며 당장이라도 카일의 목을 베어버릴 듯 노려보았다.
“모트 자작, 안 되네!”
조세츠 자작이 급히 모트 자작의 팔을 잡았다.
“이런 모욕을 받고 참으란 말입니까?”
“자네가 여기서 카일을 죽이는 순간 래쇼트 백작은 절대 자넬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거야! 3왕자 저하까지 말이야!”
“흥, 좋습니다. 어차피 저 녀석이 귀족인 절 모욕했으니 잡아가는 건 누구도 말릴 수 없을 겁니다.”
모트 자작이 카일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조세츠 자작!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부상을 입은 밀런과 루트의 상처를 돌보고 있던 툴린이 굳은 얼굴로 조세츠 자작을 노려보았다.
“툴린 님…!”
“설마 자네가 우릴 배신하려는 건가!”
“아닙니다. 전 그저….”
“듣기 싫네! 이번일 적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할 거야! 조세츠 자작.”
“그건….”
“칫,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군. 하츠!”
모트 자작이 툴린을 돌아보며 고개를 젓고는 하츠를 불렀다.
“부단장님!”
“저 녀석을 잡아라! 죄목은 귀족 모독죄다.”
“알겠습니다.”
하츠가 앞으로 나서며 뒤쪽으로 늘어선 십여 명의 란타나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녀석을 잡아라!”
“잠깐!”
하츠의 명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일단의 기사들이 몰려나왔다.
“펠론 자작!”
“모트 자작, 좋은 구경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벌써 결투가 끝난 건가?”
펠론 자작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미 바닥에는 펠론 자작도 잘 알고 있는 란타나 기사단의 조장 토프가 다섯 명의 기사들과 함께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물론 다섯 명의 기사를 연이어 상대한 세인 역시 여기저기 부상을 입었는지 검을 지팡이 삼아 겨우 몸을 의지하며 카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쉽군, 자네의 최측근 기사가 결투를 벌인다는 소식에 급히 달려왔는데… 아무래도 저 여기사가 이긴 모양이군.”
“무슨 수작이냐, 펠론 자작!”
“하하, 수작이라니, 난 그저 결투 참관인이나 되어볼까 해서 찾아온 것뿐이라네, 아무리 란타나 기사단이 왕실기사단이라고는 해도, 공정한 대결을 위해서라면 참관하는 귀족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뭐라!”
“아! 걱정 말게, 그렇다고 이 좋은 구경거릴 나만 볼 수는 없어 성에 있는 귀족들에게 연락을 넣었으니까!”
펠론 자작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모트 자작을 바라보았다.
“…이놈이!”
모트 자작이 분노한 듯 주먹을 말아쥐었다. 고작 엑스퍼트 중급에 불과한 펠론 자작의 목을 당장이라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동부의 맹주 그린넨 백작의 동생이었다.
비록 그린넨 백작 가문이 무력에선 여타의 대영주들보다 약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보유한 막대한 금력만큼은 정계에서 다른 대영주들보다 훨씬 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모트 자작, 참으시오. 그는 지금 여론을 이용, 우릴 압박해 카일을 구하려는 거요. 이제 보니 그동안 카일과 동행했던 여인이 그린넨 백작가와 연관된 것 같소. 여기서 펠론 자작의 수에 말려들면 안 되오.”
조세츠 자작이 펠론 자작의 뒤편에서 걱정스럽게 카일을 바라보는 이엘과 시안느를 발견하곤 급히 분노로 붉게 달아오른 모트 자작을 진정시켰다.
“저놈이 나와 기사단을 조롱하고 있는데도 참으란 말이오?”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3왕자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다 카일이란 녀석까지 내어달라고 하면 어쩌려는 거요.”
“걱정 마시오. 몰티엔 가의 세인이야 기사로서 정당한 대결을 펼쳤으니 어쩔 수 없지만, 펠론 자작이라도 귀족을 모욕한 카일은 구할 수 없을 거요. 자작이 부른 귀족들이 오히려 카일의 족쇄가 될거요.”
“좋습니다. 자작님의 말대로 지금은 참지요. 하지만… 으득, 반드시 펠론 자작만은 내 검으로 죽이고 말 거요.”
모트 자작이 이를 갈며 하츠를 바라보았다.
“뭘 하느냐! 귀족을 모독한 카일을 잡아라!”
“잠깐!”
펠론 자작이 급히 손을 들었다.
“귀족 모독죄라니? 무슨 소리요.”
“큭, 말 그대로요. 고작 자유민인 주제에 저 녀석이 날 모독하며 결투를 신청했소. 설마 펠론 자작께서는 녀석을 두둔하며 편을 드시려는 거요?”
“…그건.”
“허, 자유민이 귀족을 대상을 결투를 신청했단 말입니까?”
그때, 낡고 긴 갈색 코트를 입고 둥근 구슬 장식이 박힌 지팡이를 손에 든 노신사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아킨스 자작가의 서남쪽에 자리한 영지의 주인, 소린 남작이었다. 아킨스 자작에게 빼앗긴 서남쪽 평원지대를 되찾기 위해 지금껏 영지에 머물고 있었다.
“오랜만에 소린 남작님과 의견이 일치하는군요. 아무리 자유민이라도 귀족을 모욕하면 그만한 벌을 받아야죠.”
소린 남작의 뒤로 건장한 체구의 젊은 사내가 시종 하나를 데리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폰트 남작은 아킨스 자작의 서북쪽 영지의 주인으로, 소린 남작과 마찬가지로 빼앗긴 영지를 찾기 위해 자작령을 찾아왔다.
문제는 되찾아야 할 땅 역시 소린 남작과 상당 부분 겹쳐,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 언쟁만 이어가고 있었다.
“폰트 남작, 자네도 온 건가?”
소린 남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야 펠론 자작님의 서신을 받고 황급히 달려왔습니다. 기사, 그것도 여기사가 왕실 기사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다니 찾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하하.”
폰트 남작이 크게 웃으며 숨을 몰아쉬며 버티고 선 세인을 바라보았다.
“대단합니다. 여섯 명을 상대하고도 아직도 버티고 서있다니. 더구나 저런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흥, 행여 넘볼 생각이면 꿈도 꾸지 말게, 켈토 단장이 자네 같은 바람둥이에게 딸을 줄 것 같은가?”
“케, 켈토 단장이면 다핸 남작가의….”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켈토 단장의 딸이야! 이름이 아마 세인이라고 했던가? 아킨스 자작이 직접 혼담을 넣었다가 엑스퍼트에 올라서면서 거절당했다고 하더군. 이제 보니 단장의 검술을 제대로 전수받은 게 분명해.”
“…그렇다면 데릴사위를 들일 텐데…. 아쉽지만 제가 포기를 해야죠.”
폰트 남작이 아쉬운 듯 마른 입술을 핥으며 천천히 펠론 자작, 정확히는 이엘과 시안느에게로 다가섰다.
“자작님, 부르심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왔는가?”
펠론 자작의 이마에 잠시 깊은 골이 생겼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이엘을 바라보았다.
“영애, 이쪽은 남부의 폰트 남작입니다.”
정중하게 고개까지 숙인 펠론 자작의 말에 폰트 남작이 화들짝 놀라며 급히 한걸음 물러났다.
펠론 자작이 영애라며 깍듯이 대할 사람이라면 그린넨 백작의 딸뿐이었다.
“폰트 남작님이셨군요. 그린넨 백작가의 셋째 이니엘 그린넨입니다.”
“아…. 세, 셋째 영애셨군요. 포, 폰트 남작입니다.”
설마 백작의 직계혈족인 그린넨 영애가 직접 나타날 줄은 몰랐던 폰트 남작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칫 영애에게 실수라도 하는 날엔 그날로 자신의 영지는 대륙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반가워요. 남작님.”
“소린 남작입니다. 설마 백작가의 직계 혈족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도착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답니다. 남작님.”
“아, 그러셨군요. 혹 시간이 되신다면 저녁을 함께하며 환담하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이런, 남작께는 죄송합니다만 영애께선 오늘 도착하신 터라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나이가 드니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습니다그려.”
소린 남작이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상황이 묘하게 꼬이는군.”
모트 자작이 갑자기 등장한 이엘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펠론 자작과는 달리 이엘은 그린넨 백작가의 직계혈족이다. 아무래도 무게감이 팰론 자작과는 다를 수 밖에는 없었다.
더구나 펠론 자작이 이엘의 신분까지 공개했다는 건 적극적으로 이번 일에 관여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거 골치 아프게 생겼군.”
모트 자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골치 아플 것 있습니까? 검사는 검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법. 저와 정당하게 대결을 벌이면 쉽게 해결될 일 아닙니까?”
“큭, 네 녀석이 루트를 이겼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날 따라오려면 한참은 멀었다.”
“그럼 더 간단한 것 아닙니까?”
“뭐라?”
“절 정당하게 꺾으면 누구도 당신을 방해하지 못할 것 아닙니까? 왜 결투를 피하려 하는 겁니까? 혹시….”
카일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흐렸지만, 누구든 카일의 뜻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카일의 언행은 분명 귀족인 모트 자작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펠론 자작이 카일을 도우려고 나섰다고 해도 결코 용인될 수 없었다.
“…끝이군.”
“작은 아버지!”
“아무리 화가 나도 지금, 저 녀석의 행동은 지나치다.”
“하, 하지만… 카일은…….”
“아무리 검술이 탐난다 해도, 귀족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행동까지 용인할 수 없다.”
펠론 자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소린 남작과 폰트 남작 역시 펠론 자작과 마찬가지 생각인지 고개를 저었다.
“큭, 이거 너무 싱겁게 끝났군. 녀석을 끌고 와라! 내 친히 녀석에게 귀족을 모욕하면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똑똑히 알려주마.”
“알겠습니다.”
하츠가 카일을 노려보자 카일의 얼굴엔 오히려 미소가 번졌다.
“글쎄요? 그건 제가 귀족이 아닐 때의 이야기 아닙니까?”
갑작스러운 카일의 말에 하츠의 걸음이 뚝 멈췄다.
“무슨 수작이지?”
“제가 귀족이라면 귀족 모독죄는 성립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더불어 모욕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결투로 해결을 봐야겠죠.”
카일이 모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품속에서 작은 반지를 꺼내 손에 끼웠다.
“이러면 어떻습니까? 이젠 자격이 생긴 겁니까?”
카일이 손을 들어 모트를 가리켰다.
“인장 반지!”
모트 자작이 깜짝 놀란 얼굴로 카일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노려보았다.
인장 반지는 귀족 가문의 당대 가주나 후계자임을 뜻한다.
더구나 카일의 손에 끼워진 반지는 꽃문양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즉 단승 귀족이 아닌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계승 귀족 가문이란 뜻이었다.
“가짜 인장 반지를 사용하면…!”
모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카일의 손위로 선명한 빛의 인장이 떠올랐다.
반지에 오러를 주입하면 나타나는 선명한 인장은 반지가 가짜가 아니란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진짜군.”
“저 아이가 귀족가의 정식후계자란 말인데… 그럼 귀족 모독죄는 애초에 성립할 수 없군. 그럼 역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모트 자작은 결투를 벌일 수밖에는 없겠군.”
소린 남작과 폰트 남작이 언제 싸웠냐는 듯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눴다.
“계승 귀족, 역시 일개 용병이 상급 검술을 만들어낼 리가 없지!”
펠론 자작의 얼굴이 절로 밝아졌다.
비록 용병으로 가문을 이어 왔다고 해도 계승 귀족이라면 순혈 귀족을 뜻한다. 더구나 가주가상급 엑스퍼트까지 올랐다면 그린넨 백작도 이엘과의 혼인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넌 몰랐느냐?”
펠론 자작이 이엘을 돌아보자, 이엘 역시 깜짝 놀란 얼굴로 카일의 손에 끼워진 인장 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몰랐어요. 카일은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녀석, 꽤 사람을 놀래키는 제주가 있구나.”
펠론 자작이 웃음을 지으며 이엘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런 이엘의 뒤에서 카일을 바라보는 시안느의 두 눈은 세차게 흔들렸다.
카일의 손에 끼워진 인장 반지는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반지였다. 바로 힐튼 남작이 카일을 후계자로 지목하며 넘겨준 반지였기 때문이었다.
“인장 반지라…. 큭, 설마 이런 대비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하긴, 그분이라면 귀족가의 인장 반지 정도야 어렵지 않지.”
모트 자작이 엉뚱한 상상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카일은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는지 그저 가만히 모트 자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좋다. 카일 그대가 인장 반지를 꺼낸 이상 결투를 피할 수 없군. 나 크롬벨 자작가의 모트, 내 명예를 더럽힌 그대 카일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마일론 남작가의 카일, 모트 자작의 결투를 받아들이며 내 명예를 되찾기 전까지 검을 놓지 않을 겁니다.”
“좋다. 카일 어디 얼마나 대단한 실력인지 한번 보자!”
“얼마든지!”
카일의 말이 끝나는 순간 모트 자작이 곧장 카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일 역시 지지 않고 마주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