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모트 자작(2)
“으아악, 지루하군.”
길게 기지개를 켜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난 젊은 기사 벤트가 따분한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여기오면 좀 재미난 일이 있을까 했더니, 지루함의 연속이군. 벨런 자넨 아무렇지도 않나?”
벤트가 침상에 누워 작은 책을 읽고 있는 벨런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러나, 난 조용해서 좋기만 한데? 이렇게 편하게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
은은한 미소까지 지으며 벨런이 책장을 넘겼다.
“단장님께서 3왕자 저하를 지지한 이후 쉴 틈이 없긴 했지. 란타나 기사단의 지지를 받는 저하께 문제라도 생기면 기사단의 명예가 어찌 되겠나.”
“그러니 하는 말이야, 여기 있을 동안 만이라도 충분히 쉬어 두라고, 돌아가면 지옥 같은 근무의 연속일 테니, 정 심심하면 나와 한판 어떤가? 그러고 보면 우리가 대련을 해본 지도 오래된 것 같은데.”
벨런이 책장을 접고는 반쯤 몸을 일으켰다. 벤트가 동의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갈 것만 같았다.
“대련은 무슨, 자네 머리엔 책과 검 둘뿐인가? 그보다 더 건설적이고 재밌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지 말고, 우리 나가세.”
“어딜 가려고, 부단장님 말씀 못 들었나? 순찰을 제외하곤 내성 안에만 머물라고 하셨지 않나?”
“내성을 빠져나가자는 말이 아니야.”
벤트가 벨런의 손에 들린 책을 빼앗듯이 옆에 내려두곤 팔을 잡아당겼다.
“어딜 가려고? 지금 내성에도 귀족들이 여럿 와있네, 특히 그린넨 백작가는 최대한 피해야 해! 그놈들과 얽히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거야.”
“걱정 말게, 아주 재밌는 곳을 발견했으니까. 자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지.”
“즐거움…?”
벤트의 말에 벨런이 잠시 망설였지만, 팔을 잡아끄는 벤트를 보며 못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려고 그러는 건가?”
“일단, 따라와 보면 알아!”
벤트가 웃으며 문을 나서자 벨런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벨런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방안에만 있었던 터라 지루하긴 마찬가지였었다.
* * *
“칫, 이거 서러워서. 하녀들이 살던 곳에서 자야 하다니, 차라리 내성 밖에서 숙소를 찾는 게 낫겠다.”
밀런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옆에 있던 루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심한 녀석.”
“뭐!”
“조금 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거리 전체가 파괴된 곳투성이다. 어디서 이 많은 인원이 머물 곳을 찾을 생각이냐!”
“그야….”
루트의 말에 인상을 찌푸린 밀런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앞서가던 하인이 돌아서서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총관께서도 사정이 있어 그런 것이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사정?”
“이곳에는 지금 왕실기사단뿐만 아니라 여러 귀족 가문들이 몰려와 있습니다. 다행히 아직 이렇다 할 분란은 없지만,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괜히 여러분들과 충돌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해주십시오.”
“상황이 많이 안 좋은가?”
“모두 신경이 날카롭습니다. 어젠 시중을 들던 아이가 심하게 매를 맞기도 했고요. 총관께서 급히 나섰기에 망정이지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어차피 이곳은 곧 왕실 소유가 될 텐데?”
“저 같은 하인이야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영지 경계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동안이야 강력한 기사단을 보유한 아킨스 자작에게 굴복해 땅을 빼앗겼던 인접 영주들이었지만, 자작가의 멸문 소식에 잃었던 땅을 되찾기 위해 서둘러 달려와 성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강력한 란타나 기사단 덕분에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지만, 그동안 아킨스 자작이란 강력한 적으로 인해 한 몸처럼 움직이던 영주들이 이젠 득실을 따라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영주가 정해지기 전 영지의 경계를 정확히 매듭짓는 것이 그들로서도 좋겠지, 어떤 귀족이 내려올지 모르니 말이야, 그보다 아직 자네 이름도 모르는군.”
“아! 제 이름은 얀 입니다. 혹 시키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얀이 웃으며 다시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얀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검은 돌을 두텁게 쌓아 만든 2층 건물과, 오래되어 여기저기 파인 곳이 많긴 했지만, 단단한 돌을 깔아 만든 넓은 마당이 함께 딸린 작은 별채였다.
“여깁니다요.”
“여기가 하녀들이 거주하던 곳이란 말인가?”
주변을 둘러본 코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비록 외관이 화려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하녀들의 숙소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잘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예전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분명 어제까진 하녀들이 사용했습니다. 성 안쪽에 빈방이 많이 생겨 모두 내성으로 옮겼지만요.”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모습에서 이번 습격에 적잖은 하인과 하녀들이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피해가 컸나 보군.”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잠시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던 얀이 화제를 급히 돌리려는 듯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조금 쉬고 계시면 하녀들이 와서 청소도 하고, 부족한 침구류도 가져다드릴 겁니다. 혹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하녀들에게 말씀하시거나 절 찾으시면 됩니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제 일인 걸요. 그보다 조금 전 아일론 상단을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네, 무슨 문제가 있나?”
코퍼가 얀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마도 지금 숙소로 찾아가신다고 해도 만나기 어려우실 겁니다. 상단 사람들 모두 성 밖으로 나가려고 준비 중이거든요. 곧 출발할 겁니다.”
“성 밖으로?”
“죽은 사람들을 찾으러 간다고 들었습니다.”
얀의 말에, 코퍼가 며칠 전 죽어 있던 상단 일꾼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코퍼 용병단은 오랫동안 아일론 상단과 함께했기에 알게 모르게 친분 있는 상단 일꾼들이 많았다. 하지만 용병들이야 길바닥에서 생을 마감하는 일이 허다하다 보니 죽은 일꾼들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 던 것이다.
“그들이 어디 모여있는지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아마도 성 동쪽 마구간에 모여 있을 겁니다. 수레와 마차 때문에 총관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걸 보았습니다.”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나? 우리도 그들과 합류를 해야 할것 같군.”
“부탁이라니요.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고맙네.”
코퍼가 얀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뒤를 돌아봤다.
“용병단은 짐만 내려놓고 모두 아일론 상단과 합류한다.”
“아! 좀 쉬나 했더니, 또 일이군.”
브린이 투덜거리면서도 가장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버크와 아덱이 뒤를 쫓았다. 야튜 역시 단장인 코퍼의 짐을 받아 서둘러 안으로 향했다.
“이런, 이젠 우리만 남은 건가?”
얀을 따라 멀어져 가는 코퍼 용병단을 보며 밀런이 중얼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영주성으로 들어서며 하나둘 사람들이 빠져나가더니 건물 앞에는 툴린과 세인, 그리고 루트와 밀런 자신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놈, 허튼 짓거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루트가 밀런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칫, 내가 무슨 짓을 한다고….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들어가자.”
밀런이 투덜거리며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남은 일행들도 건물 안으로 하나둘 들어섰다.
건물은 튼튼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오랫동안 수리가 되지 않아 낡은 곳이 많았지만, 하녀들이 생활하던 곳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깔끔했고 청소도 나름 잘되어있어 바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인 경은 여길 사용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방 여기저기를 둘러본 루트가 2층 끝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인인 세인을 생각해 가장 안전하면서도 사내들과 거리를 둘 수 있는 곳으로 세인을 안내한 것이다.
“고마워요. 루트 경.”
“아닙니다. 그리고….”
루트가 잠시 망설이며 세인의 눈치를 살폈다.
“하실 말씀이 있다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곳 뒤뜰에 제법 큰 우물이 있다고 합니다. 보통 빨래를 하던 곳인데… 워낙 외진 곳이라 하녀들이 가끔 목욕을 하기도 한답니다.”
“네?”
“그러니까… 그게, 아무래도 사람들 눈을 피하려면 지금이 좋을 것 같아….”
루트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세인은 그때서야 루트의 말을 이해했는지 짧은 탄성을 터트렸다. 비록 천공 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모두 한순간 긴장감이 풀어지며 몰려온 피로감에 제대로 씻을 생각도 못 한 채 쓰러져 잠이 들었다. 덕분에 벌써 3일째 제대로 씻지 못했던 것이다.
루트가 이런 세인을 배려해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고마워요. 루트 경, 미처 생각도 못 했는데….”
“아닙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저로서도 다행입니다.”
루트가 웃으며 물러나자 혼자 남은 세인이 검을 내려놓고 입고 있던 레더 아머를 벗었다. 순간 옷에서 풍겨오는 쾌쾌한 땀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런 불쾌한 냄새를 풍기며 카일과 함께 걸었다는 부끄러운 생각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세인은 곧 갈아입을 옷을 챙겨 급히 뒤뜰로 향했다.
넓게 펼쳐진 뒤뜰에는 루트의 말이 사실인 듯 길게 세워진 장대 위로 하얀 천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여기구나!”
하얀 천을 피해 세인이 도착한 곳은 땅을 깊게 판 여느 우물과는 다른 형태였다. 아래로 푹 꺼진 공간에 격자로 돌을 쌓아 만든 독특한 형태로, 우물이라기보다는 샘물에 가까워 보였다. 더구나 땅이 안쪽으로 푹 꺼져있어 외부와의 시선까지 차단해주고 있어 안심하고 씻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큭, 어때 내 말이 맞지!”
“누구냐!”
상의 단추를 반쯤 풀었을 때, 입구에서 들려온 낮은 웃음소리에 세인이 급히 망토로 몸을 가리며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레더 아머를 벗으며 검집도 함께 놓고 왔기에 미처 검을 가져오지 못했다.
“하녀 중에 이런 미인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벤트가 눈을 빛내며 세인을 음침한 눈빛으로 살폈다. 벨런 역시 다소 놀란 표정으로 세인을 바라보았다.
“누구냐고 물었다.”
세인이 굳은 얼굴로 다시금 소리치자 벤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자신들은 왕실기사단의 기사들이다. 일개 하녀가 반말할 상대가 아니었다.
“쯧, 얼굴이 좀 반반하긴 하지만 시골 영지라 그런지 하녀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뭐 괜찮아! 특별히 이 벤트 님께서 친히 교육을 시켜주지. 큭.”
벤트가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세인을 향해 다가갔다.
“멈춰라! 난 하녀가 아니다.”
“큭, 이젠 신분까지 도용하려는 것이냐! 크게 혼이 나야겠구나!”
벤트 입술을 비틀며 세인에게 달려들려 할 때였다.
“이런 개자식들이! 누굴 넘봐!”
갑작스러운 외침과 함께 어디선가 나타난 멀린이 벤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헉!”
갑작스러운 기습에 깜짝 놀란 벤트가 급히 검을 뽑아 밀런의 검을 막았다.
꽝-
워낙 갑작스러운 기습이라 미처 충격을 해소하지 못한 벤트가 밀려나자, 밀런이 급히 세인을 보며 외쳤다.
“뭐해! 어서 피하지 않고.”
“아! 고마워요.”
세인이 급히 달려 나가자, 뒤에서 지켜보던 벨런이 검을 뽑았다.
“오지 마! 이 개새끼는 내 상대다. 넌 저년이나 잡아!”
“이런 망할, 누가 개새끼야!”
밀런이 고함을 치며 벤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벨런이 곧 돌아섰다.
“좋아! 그럼 수고하도록.”
히죽 웃음을 흘린 벨런이 곧 몸을 돌렸다.
“이런!”
벨런이 급히 고개를 숙이자 머리 위로 아슬하게 검이 스쳐 지나갔다.
“엑스퍼트?”
벨런이 눈앞에 루트가 분노한 얼굴로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감히 세인 경을 욕보이려 하다니 가만두지 않겠다.”
“…세인 경? 기사였나?”
벨런이 당황한 표정으로 벤트를 돌아보았다. 벤트 역시 루트의 말을 들었는지 순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어쩐지 너무 예쁘다 했어.”
“어쩌지?”
“일단 이 녀석들부터 조져! 해결은 나중에!”
벤트의 말에 벨런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루트를 향해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 * *
“그러니까 저 두 녀석이 세인 경을 욕보이려 했단 말이군요.”
카일이 심각한 부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기사를 노려보며 루트를 향해 물었다.
“그렇습니다.”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트 자작이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니, 오히려 저 녀석들은 지금 란타나 기사단을 모욕하고 있다. 저 세인이란 여기사는 란타나 기사들을 공격하고 부상을 입혔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모트 자작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서 어쩔 생각입니까? 분명 기사들 간의 정당한 대결이라 들었습니다.”
“큭, 물론 나 역시 기사 간의 정당한 결투를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모욕을 당하고 참을 수는 없는 법, 당연히 결투로 해결해야겠지.”
“지금 세인 경을 상대로 모트 자작님이 결투를 벌이겠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모트 자작이 손에든 장갑을 내려다 보며 말하자, 카일이 모트 자작의 앞을 막아섰다.
“자작님은 제가 상대해 드리지요. 그녀는 제 사람이니 말입니다.”
“하하하, 자네 사람이라면 더욱 재미있겠군. 미안하지만, 기사의 대결은 귀족과 기사만의 신성한 대결! 자넨 자유민이 아닌가? 그러니 괜히 나섰다가 다치지 말고 여기서 지켜보고 있게.”
모트 자작이 웃으며 한발 다가서자 카일이 굳은 얼굴로 또다시 모트 자작의 앞을 막아섰다.
“귀족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