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모트 자작(1)
”이런, 한동안 조용하더니 아직도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못된 버릇을 못 버렸군.”
조세츠 자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못된 버릇이라니요. 기사에게 대련은 신성한 것, 버릴 수가 없지요. 다만 요즘은 관심 가는 기사를 찾지 못했을 뿐입니다.”
모트 자작이 카일을 돌아보며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지금은 참아주게, 이 녀석은 방금 사지에서 돌아왔다네, 지금은 충분히 휴식이 필요해.”
“제가 너무 앞서 갔군요. 앞으로 함께하다 보면 기회가 많을 텐데 말입니다. 하하.”
“함께… 하다니요?”
카일이 당황한 표정으로 모트 자작을 바라보았다.
“어떤가? 그대라면 우리 란타나 기사단에 들기에 충분한 실력을 지닌 것 같은데?”
“지금 절 왕실기사단에 들이시겠단 말입니까?”
“그렇네, 비록 파격적인 결정이긴 하지만 조세츠 자작님의 추천도 있었고, 그 나이에 중급 엑스퍼트 끝자락에 올랐다면 자격은 충분하다네.”
“자작님께서 절 추천하셨단 말입니까?”
설마 자작이 자신을 왕실기사단에 추천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카일이 당황한 표정으로 조세츠 자작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말씀이라 당혹스럽군요.”
“왕실기사단에 드는 것은 커다란 영광이다. 모두 널 생각해 만든 기회니 거절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조세츠 자작이 미소를 지으며 카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전 기사도, 귀족도 아닙니다. 왕실기사단이라면 왕실로부터 서임을 받아야 할 텐데….”
“걱정할 것 없다. 카일 넌 3 왕자께서 직접 기사 작위를 내리실 것이다.”
“3 왕자께서 말입니까?”
“원칙을 따지자면 왕실기사단은 모두 전하께 서임을 받아야 하지만, 이미 란타나 기사단이 3왕자님을 지지했으니 3 왕자님에게 서임을 받아도 무방하단다.”
“자넨 앞으로 란타나 기사단에서도 최정예기사들이 모인 나 모트의 직할대에 배속되어 왕실과 3 왕자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게 될 것이네.”
모트는 카일이 거절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 그에게 기사단이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넨 나와 이틀 뒤 왕도로 올라 3 왕자 저하를 뵙고 기사의 서임을 받으면 될 거야.”
“미리 축하하지. 이제 곧 자넬 왕실 기사로 만나게 되겠군.”
조세츠 자작이 환하게 웃으며 카일의 어깨를 두들겼다.
“죄송하지만, 제가 꼭 두 분의 뜻에 따라야 합니까?”
카일이 굳은 얼굴로 조세츠 자작과 모트 자작을 돌아보았다.
“무슨 뜻인가?”
모트 자작이 카일을 노려보며 물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으며 차갑게 식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제 거취에 대한 문제인데 제 의견은 전혀 담겨있지 않아 여쭙는 겁니다.”
“설마 기사단에 들지 않겠다는 말인가?”
“두 분의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전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습니다.”
“…결국 거절이란 말이군.”
“애초에 제가 원한 적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자작님께서는 제가 용병이 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카일이 조세츠 자작을 조용히 응시했다.
“굳이 용병에 집착할 필요가 있겠나? 왕실기사단이면 앞으로의 출세가 보장된 자리가 아닌가? 모두 자넬 위해서야.”
“절 위해서란 말입니까?”
“그렇네!”
“그럼 묻겠습니다. 제가 맡을 자리는 왕실기사단입니까, 아니면 3 왕자의 개인 기사입니까?”
카일이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조세츠 자작을 바라보자 조세츠 자작이 당황한 듯 더듬거렸다.
“그, 그건…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란타나 기사단은 3 왕자를 지지하는 만큼….”
“지지와 충성은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조세츠 자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설마 카일이 이런 질문을 던질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애초부터 자작의 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계속해 말을 이었다.
“지금은 왕실기사단이 서로 다른 왕자를 지지하고 있지만, 새로운 국왕이 즉위하면 즉각 충성을 맹세하고 새로운 국왕의 명을 따른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왕자 저하에게 충성을 바치고 서임을 받는다면, 그 순간 왕실이 아닌 왕자 저하 개인의 기사가 됩니다. 아닙니까?”
“그건….”
“왜 갑자기 절 3 왕자 저하의 기사로 만들려 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제가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두 분의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카일이 일어나 조세츠 자작과 모트 자작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하하… 이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군. 설마 자네가 왕실기사단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을 줄이야. 안 그렇습니까, 자작님?”
“모트 자작!”
“이미 자작님의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이런 모략은 처음부터 저와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젠 제 방식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좋을 듯하군요.”
모트 자작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해일처럼 엄청난 기세가 카일을 향해 밀려왔다.
“자작! 카일을 헤쳐선 안 되네.”
조세츠 자작이 황급히 모트 자작에게 외쳤다.
“걱정 마십시오.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저도 단장님의 손에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절 어쩌실 생각입니까?”
“걱정 말게. 그저 조용한 곳에서 당분간 쉬고 있으면 될 거야! 자네의 안전은 확실하게 책임져주지.”
“왠지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이군요.”
카일이 어느새 뒤로 물러나 있는 조세츠 자작을 돌아보며 보며 말했다.
“미안하네.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어쩔 수 없었네. 설마 그분께서 다시 세상에 나올 줄이야…. 그분을 제어하려면 자네가 필요해.”
조세츠 자작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전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생각이 없습니다.”
카일이 모트 자작을 노려보며 답했다.
“큭큭, 그런가? 아쉽군. 쉽게 갈 생각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모트 자작이 검을 손에 쥐었다.
똑똑-
순간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울리며 방안에 맴돌던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부단장님! 하츠입니다.”
“무슨 일이냐! 지금은 자작님과 중요한 대화 중이니 급한 일이 아니라면 나중에 다시오라.”
“죄송합니다. 제 선에선 처리하기 힘든 일이라….”
문밖에서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에 모트 자작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곧 마음을 가다듬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돌아왔다.
“들어오너라.”
모트 자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단단한 체구의 사내가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묘한 대치 상황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평온한 모트 자작의 얼굴을 보며 안심한 듯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인가?”
“아무래도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연무장에서 결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결투? 설마 그린넨 백작가와 분쟁이 난 것인가?”
“아닙니다. 오늘 처음 본 기사였습니다.”
“기사? 영주성에 그린넨 백작 가문 말고, 우리 란타나 기사단을 상대할 기사가 있었던가?”
모트 자작이 의아한 듯 캐묻자 하츠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만 상대의 검술이 대단합니다. 벌써 크고 작은 부상으로 5명의 기사가 쓰러졌습니다. 지금은 토프 경이 그녀와 결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녀? 설마….”
“상대는… 여기사입니다.”
쾅-
모트 자작이 서탁을 내려치며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 여기사 하나를 상대하지 못해 조장인 토프까지 나섰단 말이냐!”
“면목이 없습니다. 부단장님, 상대의 검술이 워낙 빠르고 독특해 쉽게 잡을 수 없었습니다. 토프 역시 유리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 급히 달려왔습니다.”
“허허, 설마 토프까지 고전한다는 말이냐?”
“송구합니다.”
하츠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운이 좋군. 아무래도 우리의 대화는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아. 보시다시피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하츠가 돌아서자 카일이 급히 자작을 불렀다.
“잠시만! 함께 가시지요. 아무래도 그 여기사, 저와 관계가 있을 것 같군요.”
카일이 여전히 굳은 얼굴로 모트 자작을 바라보았다.
* * *
“미안해요, 시안느 경. 미리 말을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어요.”
펠론 자작이 물러난 응접실 안. 붉게 타오르는 벽난로를 무심히 응시하며 앉아있는 시안느를 향해 결국 이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시안느 경이 카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지만… 저도 그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알잖아요. 이대로 돌아가면 전 얼굴도 알지 못하는 귀족에게 팔려가듯 시집을 가야 해요.”
이엘이 슬픈 표정으로 시안느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정략혼이 싫어 카일을 선택하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작은아버지께 말씀드린 건 모두 사실이에요. 언제부터인진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제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젠 그와 헤어지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아요.”
“카일도 알고 있는 일입니까?”
“아니, 아직 말하지 못했어요. 그는 언제나 바빴으니까요.”
“그럼… 카일의 허락도 없이 보일 님에 대해 밝히셨단 말인가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이대로 영지에 돌아간다면 다신 카일을 볼 수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사실을 카일이 알면 아가씨께 크게 실망하고 말 겁니다. 카일을 좋아하셨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하셔야 했어요.”
시안느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죠. 최대한 비밀로 하는 수밖에는….”
“그것까진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그다음은 어쩌실 생각인가요. 그는 귀족이나 기사 자리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재물로는 더더욱 설득할 수 없고요. 아시잖아요.”
“알아요. 그래서 당분간 카일과 동행하며, 최대한 그의 마음을 얻어볼 생각이에요.”
“그럼….”
“당분간 그와 함께할 생각이에요. 그러니 시안느 경의 도움이 필요해요.”
“아, 아가씨….”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이엘의 모습에 시안느가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카일을 좋아하는 시안느 경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제가 도움을 청할 사람은 시안느 경 뿐이에요. 만약 저와 카일이 이루어진다면 시안느 경만큼은 저도 거부하지 않겠어요.”
“…전 아가씨의 기사입니다. 제가 어찌 아가씨와 사내를 나눌 수 있겠어요. 그런 말씀 마세요. 전 아가씨를 지키는 호위 기사로 만족해요.”
시안느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고마워요. 시안느 경,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어요.”
이엘이 고개를 숙인 시안느의 두 손을 감싸 쥐며 미소를 지었다.
꽝-
그때였다. 부서질 듯 문이 열리며 펠론 자작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다. 서둘러 연무장으로 가야 할 것 같다.”
“무슨 일이세요.”
“가면서 이야기하자!”
펠론 자작이 서둘러 이엘의 손을 잡고 다급히 밖으로 향했다. 시안느 역시 급히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조금 전 연무장에서 란타나 기사단이 웬 여기사를 상대로 결투를 벌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좀 놀라긴 했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 하지만 곧 놀라운 소식이 들리더구나! 여기사가 연이어 승리를 거두더니 나중엔 조장급 기사를 쓰러뜨렸다고 하더구나.”
“세인 경이군요.”
이엘은 란타나 기사와 결투를 벌인 기사가 세인이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역시 잘 아는구나! 그래, 그 여기사가 다핸 남작가의 세인 몰티엔이다.”
“결투라고는 하지만 세인 경이 승리했다면 큰일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리 다급히 가시는 건가요?”
“여기사가 무려 다섯의 평기사와 조장급 기사를 쓰러트렸다. 다음은 누구일 것 같으냐?”
“그야…!”
“왕실이면 몰라도 여기서 그녈 상대할 기사는 부단장인 모트 자작뿐이다.”
“설마 부단장이 여기사를 상대로 결투를 벌이겠습니까?”
“모트 자작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는 지독한 결투광에 자존심 또한 강해 그런 일로 란타나 기사단의 명예가 떨어지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그럼… 설마!”
“그래, 모트 자작이 세인이란 여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하려는 순간 다른 사람이 나섰다. 너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설마….”
“참고로 말하면 모트 자작은 상급 엑스퍼트다.”
펠론 자작의 말에 이엘과 시안느가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