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09화 (209/404)

209.이엘의 선택3

“아, 아가씨께서 직접 말입니까? 하지만 그는 고작 자유민에 불과합니다. 어찌 대영주의 영애께서 그런 자를 반려로 삼으려 하십니까? 안 됩니다.”

“왜 안 되죠? 그를 받아들이는 순간 가문이 그렇게 염원하던 상급 검술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분명 좋은 기회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애를 어찌 그런 자에게….”

팰론 자작이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이엘의 제안은 상급 검술을 얻는 동시에 상급 엑스퍼트를 가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아무리 사별한 부인에게 애틋함이 남아 있다지만, 자식의 부탁이라면 한 번 더 신중히 생각할수 밖에 없었다. 설령 부탁을 거절한다고 해도 가문이 위기에 처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차피 영지에 돌아가면 곧 제 혼처를 찾겠죠. 그리고 가문을 위해 얼굴도 모를 누군가에게 팔리듯 시집을 갈 거예요. 언니들처럼 말이죠. 아닌가요?”

“그건….”

팰론 자작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이엘을 바라보았다. 당장 이엘의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혼처를 정하지는 못했지만, 만약 이엘이 멀쩡히 돌아간다면 백작은 곧 그녀의 혼처를 찾아 나설 것이다.

“비록 그의 신분이 자유민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의 부친은 상급 엑스퍼트에요. 마음만 먹는다면 어딜 가든 남작의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강자죠.”

“그렇다고 해도 쉬운 결정은 아닙니다. 아가씨는 그린넨 백작 가문의 직계혈통입니다. 아무리 가문의 숙원이 달린 일이라도 혈통 문제는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녀석이 귀족의 피를 이었다면 몰라도… 허락을 받긴 어려울 겁니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먼저 그 녀석의 신분 내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자유민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오래전 몰락한 귀족이거나 방계혈통일 수 있습니다. 그럼 백작님을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부탁드려요. …작은아버지.”

“……이제 공적인 대화는 끝난 것이냐.”

펠론 자작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편안하게 말을 놓았다.

“죄송해요.”

“하하, 아니다. 그만하면 가주께 지급으로 알려야 할 중요한 일이다. 너의 생각도 과히 나쁘지 않았다.”

“감사해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흠… 그 녀석을 마음에 담은 것이냐.”

펠론 자작이 이엘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맞아요. 카일을 많이 좋아해요.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엘이 펠론 자작에게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솔직히 그 녀석이 너와 어울릴지는 모르겠다. 세상을 살다 보면 피와 살을 먹고 살아가는 맹수의 배 속에서도 때론 멍청한 개새끼가 태어나는 법이지. 과연 녀석이 아비처럼 맹수일지 아니면 멍청한 개새끼일지 걱정이구나”

대륙에는 수 많은 천재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하지만 그들이 일구어낸 가문들은 한때 성세를 구가하다 한 대를 넘기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재성을 타고난 선대의 능력을 따라가지 못해 좌절하거나 외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했던 만큼, 펠론 자작은 이엘이 선택한 카일이란 녀석이 나약하고 멍청한 녀석은 아닌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풋, 걱정 마세요. 카일이 나약하고 멍청한 개새끼일 리는 없으니 말이에요.”

이엘이 펠론 자작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작은아버지께서는 설마 절 감정에나 휘둘리는 나약한 소녀로 보신 건가요?”

“흠, 녀석이 아비만큼 대단한 맹수로 자랄 거란 말이냐?”

펠론 자작이 이엘의 말이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그렇게 물으신다면… 아니에요.”

“무슨… 뜻이냐?”

자작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이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이미 사나운 맹수니까요.”

* * *

“루트 님.”

루트를 따라 영주성에 들어선 카일과 일행 앞으로 왜소한 노인이 다가왔다.

“벨 총관님.”

“손님을 데려오신 겁니까?”

벨 총관이 루트의 뒤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이들은 조세츠 자작님의 손님들입니다. 바쁘신 줄은 알지만 쉴만한 곳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시겠지만 지금 성에 머물고 있는 귀족과 기사분들 때문에 남은 방이 거의 없습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자작님의 손님을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루트가 난감한 얼굴로 벨 총관을 바라보았다.

“흠… 아예 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워낙 누추한 곳이라….”

벨이 카일을 비롯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더니 턱에 난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마치 너희에게 내어줄 곳은 그곳뿐이라는 듯 고개까지 돌려버렸다.

“그, 그곳이 어딥니까?”

“뒤채에 하인들과 하녀들이 머물던 별채가 있습니다. 좀 낡긴 했지만, 청소를 하면 쉴 수는 있을 겁니다.”

“하, 하인들이 머물던 곳을 쓰라니… 그건 좀….”

“그곳도 조세츠 자작님을 생각해 배정해 드리는 겁니다. 좀 구석지고 외지긴 했지만 그래도 독채가 아닙니까? 귀족이나 기사분들과 얽히는 것보단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건 그렇지만….”

“괜찮습니다. 저희야 어느 곳이든 쉴 수만 있으면 족합니다. 다만 여기 세인 경께서 머무실 곳은 따로 배정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카일이 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기사인 동시에 여인이었다. 하인들의 거처에서 사내들과 함께 생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벨 총관 역시 그제야 세인을 발견했는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용병들 무리에 아름다운 여 기사가 포함되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허허, 이제 보니 여기사님이 계셨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럼 여기사님은 2층에….”

“아니, 괜찮아요. 저도 일행과 같은 곳에 머물겠어요.”

세인이 고개를 저었다.

카일을 비롯한 일행 모두가 낡고 누추한 숙소를 배정받은 상황에서 혼자 신분을 내세워 좋은 곳에서 잠을 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카일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세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크음, 여 기사님이 거부하시니 어쩔 수 없지요.”

벨 총관이 기분이 상한 듯 고개를 획 돌려 하인을 불렀다.

“이분들을 비어있는 뒤채로 안내해 드려라!”

“거긴 하인들이 머물던 곳이라 청소도 안 되어 있을 텐데요….”

“이 녀석! 시키면 ‘알겠습니다.’ 하고 냉큼 갈 것이지 어디서 말대답이냐! 이놈!”

벨 총관이 화가 난 듯 들고 있던 지팡이로 하인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아이쿠, 잘못했습니다요. 총관님!”

머리를 부여잡은 하인이 급히 뒤로 물러나 일행에게 달려왔다.

“따라오시지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요.”

하인이 총관을 피해 급히 앞장서서 걸어갔다.

“넌 나와 자작님께 가자. 아마도 널 보면 무척 기뻐하실 거다.”

“잘됐군요. 마침 저도 작님을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자작님을? 혹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아무래도 일정을 앞당겨 왕도로 서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왕도로?”

“네”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자작님은 아무래도 이곳에 며칠 더 머물러 계실 것 같은데… 조금 더 쉬었다가 함께 움직이는 것이 어떠냐?”

“죄송합니다. 급한 일입니다.”

카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 급하면 어쩔 수 없지만, 일단은 먼저 자작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거라. 그다음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루트가 카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대화 중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루트 경, 혹 상단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알려줄 수 있겠습니까?”

코퍼가 루트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 마티슨 부단주와 토일 지부장은 1층 끝 방에서 쉬고 있으니 찾아가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코퍼가 감사를 표하며 물러나자 루트는 카일을 데라고 원형 계단을 지나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복도를 가득 메운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식만 보아도 이곳이 성에서도 가장 좋은 방 중 하나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똑똑-

루트가 웃으며 문을 두드렸다.

“루트입니다.”

“들어오게”

안쪽에서 조세츠 자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거라.”

“같이 들어가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난 따로 할 일이 있으니 어서 들어가 보거라.”

루트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뒤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나도 알려줄 말이 있다.”

루트가 미소를 지으며 손짓하자 카일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카일! 역시 살아 있었구나! 하하.”

문 안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조세츠 자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일을 반갑게 맞이했다.

“자작님께서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나야 먼저 출발한 덕분에 공격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상단의 피해가 너무 커 걱정이구나.”

“두 분은 어찌 지내고 계십니까?”

“죽은 상단 식구들을 찾기 위해 준비 중이다. 모두 찾아 가족들에게 데려다줄 거라며 곧 성 밖으로 나갈 기세더구나.”

“그렇군요.”

카일이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작님.”

그때였다.

자작의 맞은편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아! 미안하네, 잠시 자넬 잊고 있었군.”

“아닙니다. 그보다 이 아이가 말씀하신 바로 그 아이입니까?”

“그렇네, 이 아이가 바로 카일이라네.”

조세츠 자작이 웃으며 카일을 돌아보았다.

“카일, 인사드리거라, 왕실기사단인 란타나 기사단의 부단장, 모트 자작이다.”

“카일입니다.”

“모트 자작이네. 과분하게도 란타나 기사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지.”

“자! 인사는 그 정도면 되었네,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나눠보세, 카일, 너도 앉거라.”

“아닙니다. 두 분의 환담에 제가 끼어서야 되겠습니까? 자작님께 인사를 드렸으니 전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조금 전까지 우리도 자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네. 이제 이야기 당사자가 직접 찾아왔으니, 자네와도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데. 내게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느냐?”

왕실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아킨스 자작령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모트 자작이 직접 말을 건네자 카일 역시 쉽게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알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모트 자작은 상급 엑스퍼트로 여러 기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알아둬서 나쁠 것 없단다.”

“하하, 자작님께서 제 얼굴에 금칠을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 자네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기사들이 많은 건 사실이 아닌가? 란타나 기사단 역시 단장보단 자넬 더…!”

“자작님!”

순간 모트 자작이 얼굴을 굳히며 조세츠 자작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하하, 미안하네. 내가 잠시 말실수를 했나 보군. 자네가 너그러이 용서하게.”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모트 자작이 조세츠 자작을 바라보며 정중히 사과했지만, 카일은 조세츠 자작의 말에서 단장인 래쇼트와 부단장인 모트 사이에 묘한 갈등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더불어 조세츠 자작의 얼굴에 떠올랐다 사라진 미묘한 미소도 카일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자네가 주먹만으로 루트를 이겼다지?”

“…네에?”

잠시 상념에 젖어있던 카일에게 모트 자작이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져왔다.

“조금 전까지 너와 루트의 대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네가 상당히 독특한 격투술을 익힌 피스트 워리어란 소릴 들었네. 검도 제법 잘 다룬다지? 언제 한번 자네의 격투술을 꼭 보고 싶군.”

“아닙니다. 격투술은 그저 재미 삼아 조금 익혔을 뿐입니다. 루트 경과의 대련 역시 운이 좋았습니다. 더구나 당시 루트 경께서는 부상이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전히 실력을 펼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겸손할 필요 없다. 루트 같은 기사를 운만으로 이길 수는 없지. 그보다… 재미 삼아 익힌 격투술로 루트 경을 이겼다니, 자네의 검술이 어떨지 정말 궁금하군. 당장이라도 검을 나눠보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모트 자작이 미묘한 눈빛으로 카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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