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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208화 (208/404)

208.이엘의 선택2

“귀족인 줄은 알았지만, 설마 동부의 맹주 그린넨 백작의 여식인 줄은 몰랐군.”

루트가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이엘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영애의 안전을 위해 신분을 잠시 숨겼을 뿐 루트 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린넨 백작가의 영애라면 신분을 감추는 건 당연한 일, 걱정말게, 그 정도 일로 자넬 오해할 일은 없을 테니.”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왜 참았나, 나 같았으면 당장 결투를 신청했을 것이네!”

루트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는지 얼굴까지 붉히며 말했다. 하지만 정작 모욕을 당한 카일은 의외로 담담했다.

“저도 처음엔 화가 났습니다. 그런 모욕은 태어나서 처음 받았으니까요. 생각 같아선 바닥에 던져진 보석 주머니를 펠론 자작의 얼굴에 집어 던지고 싶었습니다.”

카일은 손에 쥐어진 고급스러운 주머니를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지으며 품 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전 기사가 아닌 용병이 되기 위해 세상에 나왔더군요.”

“그것과 이번 일이 무슨 상관이냐?”

“용병이 되면 수없이 귀족들을 상대해야 할 겁니다. 그러다 보면 귀족들로부터 가끔은 무시와 모욕을 당할 텐데, 그럴 때마다 귀족을 상대로 결투를 신청하면 아마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신분이 낮은 용병들이 귀족이나 기사를 상대로 결투를 신청한다고 해도 이를 받아들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니, 오히려 귀족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병사나 기사단을 동원해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론 용병 중에도 귀족이나 기사 작위를 가진 용병들은 결투를 신청하는 경우도 있지만, 극히 드문 경우였다.

“더구나 상대는 그린넨 백작가의 펠론 자작입니다. 그 정도는 제가 참아야죠. 덕분에 이렇게 거금을 손에 쥐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다만, 넌 이미 경지를 넘어선 검사다. 얼마든지 작위를 받아 기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어렵고 힘든 용병이 되려는 거냐?”

“글쎄요. 아직은 어느 한 곳에 메여있기보단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기사로 서임을 받고 누군가에게 충성을 바치는 순간, 나보다는 충성을 바친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할 테니까요.”

“자유롭게 살고 싶다? 확실히 카일 넌 아직 어리구나.”

“네?”

“자유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그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네?”

“넌 지금 기사도 용병도 아닌 그저 자유민 카일일 뿐 어디에도 소속되어있지 않다. 카일, 어떠냐? 넌 지금 무엇에도 얽히지 않고 자유를 누리고 있느냐?”

“그건…….”

카일이 주변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한 무리를 이끌며 그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과 얽혀 있었다.

“그럼 루트 님이 생각하는 자유는 어떤 것입니까?”

“글쎄, 아마도 구속된 삶 속에서 찾는 자유가 진짜 자유가 아닐까?”

“구속된… 자유?”

“난 스스로의 의지로 주군께 충성하며 그분에게 구속되어 있지만, 그분의 뜻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이 역시 나의 의지이며 나의 뜻이다. 이것 역시 나의 자유가 아닌가?”

루트가 미소를 지으며 카일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어딘가에 얽매이며 구속된 삶을 살아간다. 그 속에서 어떤 자유를 찾을 것인가는 자신의 선택이겠지, 다만 카일, 넌 무엇 때문인지 의도적으로 귀족이나 기사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역시 너의 선택이겠지, 하지만 부디 다시 한번 신중히 너의 앞날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란다.”

루트의 진심 어린 충고에 카일의 눈빛이 흔들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트가 미소를 지었다.

* * *

카일과 헤어진 이엘과 시안느는 펠론 자작을 따라 내성 깊숙이 들어섰다.

“여긴…?”

“아킨스 자작의 가족들이 머물던 곳이지만, 지금은 우리 그린넨 백작가에게 배정된 곳이라 사람들의 시선은 걱정할 필요 없다.”

응접실로 들어선 팰론 자작이 화로 위에 올려진 주전자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일단 자리에 앉거라, 시안느 경도 안도록.”

“감사합니다.”

시안느가 이엘의 옆에 앉자, 팰론 자작이 직접 찻잎을 우려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일단 몸부터 녹여라, 이야기는 그 뒤에 듣겠다.”

“감사해요. 작은아버지.”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찻잔을 받아 들며 뜨거운 차를 조심스럽게 마셨다. 그동안 팰론 자작은 붉게 타오르는 화로를 뒤적거리며 그녀들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 펠론 자작의 기대와는 달리, 이엘은 전혀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실수하셨어요.”

“무슨 말이냐? 실수하다니?”

“카일에게 모욕을 준 건 실수하신 거라 말씀드린 겁니다.”

이엘이 자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 아가씨….”

갑작스러운 이엘의 말에 시안느도 놀랐는지 당혹스러운 얼굴로 이엘을 바라보았다.

탕-

“고작 용병 나부랭이 하나 때문에 조카인 네가 날 훈계하는 것이냐!”

분노한 팰론 자작이 탁자를 내려치며 벌떡 일어나 이엘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엘 역시 지지 않고 팰론 자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분명히 말씀드리죠. 조금 전 카일에게 모욕을 준 건 자작님의 큰 실수예요.”

“자작…!”

펠론 자작이 이엘의 말에 순간 얼굴이 굳었다.

사적으로는 팰론 자작이 이엘에겐 작은아버지라면, 공적으론 그린넨 백작 가문에서 분가한 하위 귀족 가문에 불과했다. 당연히 그린넨 백작을 섬기는 펠론 자작으로서 이엘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더불어 이엘은 지금의 이 자리가 사적인 자리가 아닌 공적인 자리임을 천명한 것이다.

“좋습니다. 영애께서 이 자리가 공적인 자리임을 천명하셨으니 지금의 대화는 백작님께 그대로 보고가 될 것입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당연히 이번 일은 아버님께 정확히 전달해 주셔야 해요.”

이엘이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자 팰론 자작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백작에게 보고하겠다는 말은 그저 이엘의 괘씸한 태도에 그녀를 흔들어 보려는 생각에 꺼낸 말이지, 정말 백작에게 보고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이엘이 이처럼 당당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번 대화가 가문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란 말이었다.

“그럼 이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일단 카일은 용병이 아니에요. 그는 다핸 남작령에 소속된 천인장의 아들이자 자유민이죠.”

“천인장이면 고작 기사급입니다. 더구나 다핸 남작령이라면 남부 최남단의 작은 영지, 그런 곳의 기사라면… 훗, 오러만 다루면 누구나 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설마 이런 사소한 일로 절 훈계하시는 겁니까?”

팰론 자작이 사납게 이엘을 노려보며 물었다. 하지만 이엘은 그런 펠론 자작을 보며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고작 작은 영지의 천인장이 상급 엑스퍼트라면 누구도 믿지 않겠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사실인걸.”

“상급 엑스퍼트…!”

“아… 아가씨!”

이엘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펠론 자작은 갑작스러운 상급 엑스퍼트의 등장에 놀랐다면, 시안느는 이엘이 카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보일의 경지를 밝힌 것에 대한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보인 것이었다.

“정말입니까? 그런 오지에 상급 엑스퍼트가 있다는 것이!”

“분명 사실이에요. 상급 엑스퍼트가 아니라면 우릴 추적해온 힐튼 남작을 누가 막을 수 있었겠어요.”

이엘이 팰론 자작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거짓말이었다. 당시 힐튼 남작은 마나가 동결된 채 카일에게 다리가 부러졌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카일이 힐튼 남작의 다리를 부러트렸단 사실을 믿지도 않겠지만, 믿는다면 더 큰 문제였다. 분명 펠론 자작은 당장 힐튼 남작을 제거하기 위해 척살대를 다핸 남작령으로 보내려 할 것이다.

“힐튼 남작을 막아낸 것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그의 경지는 상급 엑스퍼트가 확실합니다.”

팰론 자작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린넨 백작 가문은 동부의 맹주를 자처하지만, 상인 가문이란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막대한 부를 쌓았음에도 기사 가문이 주축을 이룬 북부와 서부에 밀려왔다.

실제 무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기사 전력에서도, 평기사의 숫자는 다른 곳보다 월등히 앞서지만, 두 명의 상급 엑스퍼트를 보유한 서부나, 최상급에 근접했다 평가받는 힐튼 남작을 보유한 북부에 밀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그린넨 백작 가문은 이러한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기사 가문과 혼인동맹을 통해 적극적으로 타 가문의 검술을 받아들였고, 동시에 이렇게 얻어진 검술들을 바탕으로 상급 검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벌써 수십 년째 이렇다 할 상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 없는 상급 엑스퍼트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물론 다핸 남작령의 천인장이란 지위를 가지고는 있지만 말이다.

“맞아요. 힐튼 남작께서 그분의 경지를 직접 확인해 주셨으니 분명 상급 엑스퍼트가 확실해요. 남작이 직접 그에게 마파린 후작가의 기사단장 자리를 제안까지 했으니까요.”

“설마, 그가 벌써 마파린 후작가의 사람이 되었단 말입니까?”

팰론 자작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동부와 북부는 벌써 수십 년째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양 전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부 사정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마파린 후작은 강력한 기사 전력으로 동부 여기저기를 찔러보며 기회를 노리고 있다면, 그린넨 백작 가문은 막대한 전비를 통해 대량의 용병과 기사들로 철벽처럼 수비하며 겨우 막아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아직 마파린 후작의 최대 전력인 힐튼 남작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그가 기사단을 이끌고 직접 전투에 참여한다면, 지금의 방어선이 얼마나 버텨줄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마파린 후작가에 상급 엑스퍼트가 한 명 더 추가된다면, 백작가로서는 재앙적 상황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아니에요. 그분은 힐튼 남작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남작령에 남기로 했어요. 그곳은 사별한 부인과의 추억이 어린 곳이라 절대 떠나지 않겠다면서요.”

“흠…. 힐튼 남작의 제안이 거절된 것은 다행입니다만, 그가 사별한 부인을 잊지 못했다면 저희 백작 가문의 제안 역시 거절하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몇 번 백작 가문으로 올 것을 청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어요.”

“아가씨께서도 실패했다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팰론 자작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린넨 백작 가문에서 상급 엑스퍼트에게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막대한 재물이나 작위였다.

하지만 상대가 돈과 명예를 거부하고 촌구석 영지에 남겠다면 백작가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력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맞아요. 그분을 직접적으로 가문에 끌어들이기는 힘들어요. 하지만 우리에겐 다른 방법이 있잖아요.”

“다른 방법이라면…?”

“그에게는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이 있죠.”

이엘이 눈을 빛내며 펠론 자작을 바라보았다.

“설마, 조금 전 본 그 녀석을….”

“맞아요. 카일, 그를 저의 반려로 삼아 가문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요.”

팰론 자작은 갑작스러운 이엘의 선언에 너무 놀라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하니 이엘을 바라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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