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07화 (207/404)

207.이엘의 선택1

“정말 괜찮은 것이냐?”

점점 멀어져가는 천공탑을 보며 툴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걱정 마세요. 멀린 님 혼자 남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녀석들을 어떻게 믿고?”

툴린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얼마 되진 않았지만 멀린과 투덕거리며 정이 들었는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터그가 우릴 속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쁜 의도는 없어 보였습니다. 실제로 다친 사람 하나 없이 무사하지 않습니까?”

“한 번 배신한 녀석들이 두 번은 못할것 같으냐! 아무튼, 난 그 녀석들 마음에 들지 않아.”

툴린이 화난 얼굴로 투덜거리며 앞서 걸어가 버렸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툴린이 멀어져 가자 이번엔 워드가 다가와 투박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 안엔 멀린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워드와 멀린은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지낸 것 때문인지 사람들과 친분을 쌓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런 비슷한 점들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두 사람 사이의 친분은 더욱 두터워져 있었다.

“걱정 마세요. 그들은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카일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던 건, 터그가 천공탑에 남으며 했던 말 때문이었다.

“저희 형제들은 스승님의 뜻에 따라 크레센트 숲의 정당한 계승자를 따를 겁니다.”

갑자기 찾아온 터그가 자신의 팔에 새겨진 기묘한 문장을 보여주며 한 말이었다.

오래전 스승이 직접 자신의 피로 새겨준 베일러트 가문의 문장이었는데, 터그 형제들이 크레센트 숲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문장 덕분이었다.

“당신들은 사하를 따르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분을 이 땅의 진정한 후계자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날 찾아온 겁니까?”

“조금 전 이곳, 천공탑의 진정한 주인을 만났습니다.”

“아르산 님을 만난 겁니까?”

“네에.”

터그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놀랐나 보군요.”

“같이 온 두 여인들은 아르산 님이 나타나자 비명을 지르며 기절해 버렸습니다. 저희도 스승님의 언질이 없었다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쳤을 겁니다.”

터그가 아르산의 푸른 귀화를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라니요. 그냥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터그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일로 인해 이곳에 멀린 마법사님이 남기로 했습니다만, 혼자 일을 처리하기에는 아마도 힘에 부칠 겁니다.”

“그런 일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저희 형제들이 남겠습니다. 크레센트 숲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으니 분명 마법사님께도 도움이 될 겁니다.”

터그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터그와 형제들은 일행에 보호해야 할 여자들과 아이가 있어 오랫동안 여행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카일 역시 이 사실을 알고 터그를 이곳에 남게 한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카일이 터그와의 일을 떠올리며 걷고 있을 때, 이엘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잠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카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엘이 살며시 카일을 돌아보았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예에?”

이엘이 깜짝놀라 되물었다.

“계속 망설이시는 것 같아서요.”

카일의 말에, 이엘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아직도 시안느 경에게 화가 나 있나요?”

“화가 나다니요?”

카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난번 암흑마법사의 일로….”

“아! 그때의 일로 시안느 경이 절 피하는 겁니까?”

“맞아요. 저도 카일 님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거든요.”

“많이 놀라셨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그땐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시안느 경도 카일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 같았어요. 어쨌든 그녀는 시안느 경의 동생이니까요.”

“잘 됐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걱정이 없지는 않았다. 카일을 암흑기사로 만들어야 하는 사하와 이를 필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카일, 둘의 관계는 사실상 적이나 마찬가지였었다.

계속 카일과 시안느가 함께 다닌다면, 언젠가 자매가 서로를 적으로 대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 몰랐다.

‘최대한 빨리 이엘과 시안느를 동부에 데려다줘야겠어.’

카일이 앞서가는 시안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 일행은 어느새 아킨스 자작성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지! 신원을 밝혀라!”

성문을 지키던 두 명의 기사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몸짓과 눈빛만 보아도 최정예 기사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저희는 아일론 상단의….”

“카일!”

그때였다. 성 안쪽에서 카일을 부르며 루트가 달려 나왔다.

“루트 님!”

“무사했구나!”

“저희 모두는 무사합니다. 자작님과 상단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뒤를 따르던 중 쓰러진 상단 사람들을 보고 걱정했었습니다.”

“상단의 피해가 컸다. 상단 일꾼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지만, 다행히 부단주와 지부장만은 무사하다.”

루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 옆으로 다가온 기사가 루트를 보며 물었다.

“루트 경, 아시는 분입니까?”

“이 사람들이 바로 조세츠 자작께서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아… 이분들이! 연락은 이미 받았습니다만, 신원 확인은 필요합니다.”

기사의 말에 루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미 자신이 카일 일행의 신분을 확인해 준 상황이었다. 굳이 다시 신분 확인을 하겠다는 것은 루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금 날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까?”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단장님으로부터 성문을 철저하게 통제하라는 명을 받았고, 원칙에 따라 신분을 확인하려는 것뿐 루트 경을 믿지 못해서가 아님을 양해해주십시오.”

기사는 루트에게 정중히 사과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루트 역시 직접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기사를 향해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얼굴을 찌푸리며 기사를 노려볼 뿐이었다.

“신분 확인이야 어려울 게 없습니다.”

카일이 루트와 기사의 묘한 대치를 끊으며 앞으로 나와 신분패를 내밀었다.

“자유민 카일입니다. 이건 다핸 남작령에서 발급한 임시 신분패입니다.”

“임시 신분패라면, 왕도로 가는 중인가?”

“그렇습니다. 왕도에서 정식 신분패를 받을 생각입니다.”

신분패를 꼼꼼히 살핀 기사가 다시 신분패를 카일에게 돌려주었다.

“들어가도 좋다.”

“감사합니다.”

카일이 신분패를 돌려받고 물러나 루트에게 다가갔다.

“기세가 대단합니다.”

“그럴 거야. 모두 왕실기사단,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두 기사단 중 하나, 란트란 기사단이니까.”

“왕실기사단? 그들이 어떻게 이곳에 온 것입니까?”

“아킨스 자작가의 멸문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움직인 곳이 바로 3왕자님이다. 아마 3왕자님 휘하의 중립 귀족이 이곳을 영지로 하사받게 될 거다.”

“이상하군요. 아무리 왕실기사단이 빨라도 주변 영지의 기사단보다 빨리 도착할 수는 없었을 텐데요. 아킨스 자작령이 공격받고 있을 때 이미 3왕자님이 이곳 사정을 알고 계셨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런 거라면 나보단 툴린 마법사님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떠냐? 이곳에서 왕도까지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툴린 님이 유일할 것 같은데?”

“역시 거미들이 3왕자님을 밀고 있는 것입니까?”

카일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카일이 비록 툴린과 조세츠 자작을 가까이하며 친분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을 돕기 위해 왕위 다툼에 끼어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도 정확한 사정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거미들이 왕위 다툼에 끼어드는 일은 없을 거다. 만약 3왕자를 권좌에 올리려 했다면, 다른 왕자들의 세력이 늘어나도록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겠지.”

“그럼 이미 3왕자가 왕위에 도전하기는 늦었다는 말입니까?”

“큰 변수만 없다면 그렇고 볼 수 있지. 오히려 지금의 3왕자라면, 자신에게 더 큰 이득을 안겨줄 왕자를 선택해 지지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루트는 3왕자의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이런 사실은 귀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신분 확인은 끝났습니다. 모두 데려가도 좋습니다.”

“…그러지.”

루트가 기사를 싸늘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가지, 주군께서는 영주성에 계시네.”

루트가 더는 기사와 말을 나누고 싶지 않은지 곧장 몸을 돌려 앞서 걸어가자, 카일과 일행들이 급히 뒤를 쫓았다.

루트의 뒤를 쫓아 성안으로 들어선 일행은 완전히 무너져 폐허로 변한 영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부분의 공격이 귀족 거주지에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평민과 빈민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

“처참하군요….”

“영지에 남아 있던 귀족들 대부분이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몇 년 전 은퇴한 총관이 아직 살아있다는 정도가 불행 중 다행이지.”

“영주성도 멀쩡해서 다행입니다.”

“몇몇 불타고 무너진 곳은 있지만, 워낙 튼튼하고 실용적으로 지어진 성이라 피해가 적었다. 그래서 지금 주변 영지에서 몰려온 귀족들은 모두 영주성에 머물고 있지.”

“왕실기사단만 온 게 아니군요.”

“후계자 하나 남기지 않고 멸문했으니 주변에서 보기엔 최고의 먹잇감이지. 누가 영주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전까진 최대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 할 거다.”

“그렇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게 그을린 내성의 성벽을 올려보고 있을 때였다.

“이니엘!”

갑작스러운 외침과 함께 다급하게 성벽을 내려온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 이엘에게 달려왔다.

“작은 아버님!”

“네가, 살아 있었구나!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이냐? 주안 경은 어디 있는 것이냐!”

중년인이 주변을 돌아보며 분노한 듯 소리치자, 시안느가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작은 금패를 내밀었다. 그린넨 백작 가문의 기사단장임을 나타내는 신분패였다.

“펠론 자작님, 주안 벨로우 경께서는 이미 오래전 돌아가셨습니다.”

“벨로우 경이…!

펠론 자작이 시안느가 내민 금패를 손에 쥐며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벨로우 경이 죽다니, 도대체 누가 죽인 것이냐? 역시 마파린 후작가의 짓인가!”

“죄송합니다만 이곳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당한 곳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카일이 주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감히 귀족의 대화에 끼어들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펠론 자작이 분노한 듯 카일을 노려보자, 카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작은 아버님! 카일은 저와 시안느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준 은인이에요. 그리고 카일의 말대로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에서 나눌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이엘이 급히 펠론 자작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용병인 것 같은데, 저런 녀석이 목숨을 구해주었단 말이냐.”

“카일은 용병이 아니에요. 그는….”

“됐다. 조카의 말이니 믿을 수 밖에.”

팰론 자작이 손을 들어 이엘을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카일의 발치에 던졌다.

“보석이다. 너 같은 용병은 평생 만져보지 못할 거금이니, 그만하면 보상은 충분할 거다.”

팰론 자작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주머니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록 주머니는 작았지만, 고급스러운 천과 가죽을 덧대 만든 것으로 주머니 자체만으로도 제법 값진 물건으로 보였다. 그만큼 안에 든 보석 역시 펠론 자작의 말대로 값비싼 물건일 것이다.

“카, 카일!”

생각지도 못한 펠론 자작의 행동에 이엘은 물론 시안느까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이런 행동은 카일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팰론 자작의 행동은 귀족으로서 신분이 낮은 용병을 대하는, 어찌 보면 당연한 태도라 할 수 있었다.

“……큭, 감사합니다. 자작님!”

카일이 갑자기 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떨어진 보석 주머니를 들었다.

“이제 자작님을 만났으니 제가 할 일은 끝난 것 같습니다. 전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두 분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카일이 펠론 자작은 물론 이엘과 시안느에게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냉정하게 뒤돌아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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